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414

[제16회]


BY byelover 2001-11-26

-기억11-
"어머니의 손"

눈물에 젖은 영은의 손을 잡아쥔 것은 그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그를 뿌리치고 내빼듯 그녀는 집으로 달려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낼 틈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어머니는 문앞에서 영은을 잡아끈다.
"엄...마...!"
영은은 느닷없는 어머니의 출현에 놀랄 겨를마저 없다.
다짜고짜 보자마자 자신의 손을 잡고 그녀를 집안으로
들여놓고는 어머니는 험한 눈길을 보냈다.
어머니는 무슨 일로 이렇듯 노여운것일까..?
영은은 급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잠시 어머니는 마루 가운데 앉아 숨을 돌리며 말했다.
"너...가서 술좀 사와라..."
"네에...?'
영은의 놀란 눈을 보며 어머니는 보일듯 말듯한 웃음을 흘리셨다.
"왜...?술은 너만 마실줄 아는것 같았니?"
어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말한건 처음이었다.
영은은 어머니의 제의가 두려워진다.
"왜요...?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넌 뭔 일이 있어야 술을 마시니?"
왜 그러세요?엄마!왜 그러는건데...?
영은은 말없이 일어섰다.
어떤 술을 사야할지 망설이던 그녀는 소주 한병을 집어든다.
가게는 집에서 오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어
영은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본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
그와의 일은 잊은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문을 들어섰다.
어머니는 벌써 상을 차려놓고 외출복차림 그대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나란히 놓인 소주잔을 내려다보며 영은은 가는 웃음소리를 냈다.
"엄마!왜 그래?"
"술이나 얼른 이리 내!문좀 닫고...날이 차다."
어머니와 마주 앉은 술자리.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청승맞은 느낌마저 들었다.
어머니는 영은이 따르려는 것을 한손으로 밀어내며 영은의 잔에
술을 따랐다.그리고는 자신의 잔도 채운다.
영은은 이런 어머니의 행동이 낯설기만 하다.
가끔 집에 돌아온 어머니의 몸에서 희미한 술냄새가 날때도 있었다.
그러나 영은이 아는 어머니는 술을 입에도 못 댔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던걸까...?
어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잔을 채우기를 여러번했다.
영은이 한잔도 채 비우지 못하자 어머니는 물었다.
"왜...?자리가 어렵니...?"
"아니,엄마도 알면서...나 술 잘 못하는거...소주는 더 못해."
"알긴,내가 너에 대해 아는게 뭐가 있니?"
어머니의 발개진 볼뒤에 감춰진 서운함이 영은의 눈에 띄었다.
"왜그래?뭐가...?엄마 오늘 왜 이러는건데...
나한테 뭐 서운한거 있어요?그런거야 ?"
어머니답지 않았다.
여자다움,그것은 그녀의 모습이 아닌것 같았다.
영은의 눈길을 느끼며 어머니는 입가에 알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왜...?엄마가 이상해보여...?"
대답없는 영은의 얼굴을 어머니는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외의 말을 했다.
"이것아!벌써부터 눈물을 달고 다녀.왜...!"
그것이 물음인지 독백인지 영은은 알 수없었지만
왠지 가슴이 저며왔다.
자신의 모든걸 다 알고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영은은 남은 술을 마시며 말했다.
"무슨소리 하시는지 모르겠네.누구 얘기야?응?"
"너...연애하니...?"
"....."
"왜 아니라고는 말 안하니?"
"아니야.연애는 무슨..."
"난 니 에미다.내가 널 내 뱃속에서 낳진 않았어도 ...
넌 내 딸이고..."
어머니는 목이 메이는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갑자기 취기가 느껴지는지 상체가 조금 흔들렸다.
영은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엄마!왜 이래?갑자기 그런 얘긴 왜해?누가 뭐래?
엄마한테 뭐라 그래?응?"
어머니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눈물을 보이셨다.
흐르는 눈물은 닦을 생각도 없는지 그냥 내버려둔채
빈잔에 다시 술을 따르려 술병을 든다.
영은이 술병을 뺏는다.
"엄마!이러지마!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이러지마!
왜 이러는지 제발 말좀 해줘.응...?"
어머니의 손이 영은의 손을 살며시 잡아 쥐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어머니의 손...참으로 오래간만에 잡아 본 엄마의 손이었다.
어머니는 영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한손으로 닦아내며
흐느끼듯 한숨을 내쉰다.
다시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영은아!미안하다.엄마가 ...잘못했어.용서해라.미안...하다...!"
영은은 두렵다.어머니가 자신을 앞에 두고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유모를 두려움이 느껴진다.
어떤것에도 흔들림이 없어뵈던 강인한 어머니의 얼굴에
비치는 연약함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점점 나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 나올 그 어떤 말들.
그것이 무서웠다.
기어이 어머니는 영은에게 그 무서움을 던진다.
"어린것,그 핏덩어릴 ...떼어오면서...난 무서웠다."
이제와서 왜 이런 얘길 하는거지...?
제발...그만 하세요...!
그러나 영은은 어머니의 눈을 보며 그렇게 말할수가 없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어하는듯한 그녀를 말릴수 없을것 같다.
"널 안고 오면서...난 복수하고 싶었어.나한테 지은 죄를...
그런데...너의 눈을 들여다 보며 ...그 마음을 잊어버리고 말았어.
널 미워하며 살려고 했는데...널 사랑하게 되버렸지.근데...
근데 말이야.그러는게 아니었어.널 떼어오는게 아니었다구..."
아니에요.엄마!잘한거야.날...날 이렇게 엄마옆에 있게 해준거...
나 원망 한적 없어.진심이야.근데...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너...네눈에 눈물 흘리게 하며 널 키우고 싶진 않았는데...
너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그애한테 못할 짓 했어.좋은 엄마가
되주지도 못하고...널 얼마나 보고 싶어했겠니...?이렇게...
이렇게 이쁜 새끼를..."
영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어머니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니는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싶은걸까...?
그녀는 영은의 생모를 '그애'라고 칭했다.
가끔 영은에게 그녀의 얘기를 혼잣말처럼 했다.
'나쁜 애는 아니었어.맑아보이더라.나한테...잘못했다고...
널 미워하지 말아달라고...울면서 내 손을 잡더라.매달리지도
않았어.네 얼굴 ...한번도 못 봤을거야.아이같더라.새옷 입고는
...이쁘다고...고맙다고 ...달아나듯 가버렸어.내가 잡기라도
할 것처럼...얼마나 날 원망했겠냐.서로 악연으로 만나서...'
그리고 영은이 묻기라도 할까 싶어 그랬는지 이렇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사업한답시고 데려다 놓은 아이였지.
고향이 어딘지 어디서 사는지는 모르겠다.몇번 가게로 데리고
오긴 했지만...물어보지 않았어.'
영은은 애써 자신에게 그녀의 얘길 해주는 어머니가
애처롭게 느껴졌다.그래서 말했다.
'엄마!나...안 궁금해.진짜루...난 좀 이상한 앤가봐.그런 얘기해도
남의 얘기같아.엄마가,우리 엄마가 왜 그런 이상한 얘길 나한테
하고 있나 싶어.나한테 ...그런 얘기 하지마.이젠...'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어머니는 알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그때 영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것 같았다.
"영은아!너...눈물 흘리는 사랑같은거...하지 마라.
네 눈에 눈물이 흐르면 엄마 가슴엔 피눈물이 흐른다.너만은...
그래.너만은 그런거 하지마라.응...?너 아직 어리잖니.
엄마가 잘못했어.이제부터...네얘기 들어줄께.엄마랑 얘기해.
너...지금 만나는 사람...만나지 마라.알겠니...?"
영은은 갑자기 설움에 북받쳐 소리내어 흐느꼈다.
어머니는 영은의 눈물에 가슴이 아팠던 걸까...?
자신의 눈먼 사랑이 어머니마저 또다른 슬픔에 젖게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그앨 보내는게 아니었어.그애한테 네 아버지랑 너,둘 다 떼어놓은건
잘못한거야.차라리 내가 갔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그녀만큼 아버질 사랑하지 않았다고...
언젠가 영은에게 어머니는 이런 얘길 한적이 있었다.
집안이 어려웠던 어머니가 당시 돈많은 집안의 아들이었던
아버지의 일방적인 구애에 결혼을 하게 되었었다고...
그리고 아버지의 외도에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어머니는 여자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여자에게 미안해 했던걸까...?
"영은아!딸은 엄마팔자를 닮는다는 말...틀린거겠지?
말도 안되는 그 소리가 요즘 자꾸만 귀에 박히는구나.
아니다.그건...말도 안되는 소리야.그렇고 말구..."
어머니의 어깨는 언제부턴가 너무나 야위어 있다.
그러나 지금 영은은 그 작고 가는 어깨에 한없이 기대고 싶어진다.
상을 밀어놓고 어머니의 옆에 다가와 가만 앉았다.
"엄마!그런 말이 어딨어.엄마가 어때서...나...아무일 없어요.
정말이야....걱정해줘서...고마워요.난 ...괜찮아."
"그애랑 너,그리고 니 아버지...그렇게 살게 내버려뒀어야 했어."
어머니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신걸까...?
사랑을 빼앗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여자와 아버지라고 생각하는걸까...?
영은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두렵다.
사랑을 뺏긴 사람이든,빼앗은 사람이든
어느누구의 사랑도 닮고 싶지 않기에...
어머니는 다시 영은의 손을 잡으며 결심하듯 말했다.
"영은아!그럼 약속해라.아무 사내하고나 맹세같은거 하지 않기로..."
영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보인다.
"그리고 엄마가 정해주는 사람이랑 만나기로..."
"네...?무슨...?"
"싫으면 사귀지 않아도 괜찮아.그냥 친구처럼...그렇게 한번만
만나봐라.알겠지...?"
뜻밖의 제안에 영은은 얼른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손을 잡은 어머니의 손에 다시 힘이 느껴지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어머니는 영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웃음을 보이신다.
영은은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어머니를 만난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