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6-
"상처"
영은의 목을 끌어안은 혜영의 손끝에
묘한 향기같은게 느껴진다.
평소같으면 담배를 피고와서 뒤에서 자신의 목을 덥썩
끌어안곤하는 그녀에게 벌써 싫은 소리를 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따뜻한 느낌이 싫지않아 영은은
한참을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상했던지 혜영은 조심스럽게 팔을 풀고
영은의 코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할머니가 오늘 좀 이상하네.외로워 보이는구려."
혜영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
머리에 바른 젤때문일까...?
금방 감아 풀어헤친듯 혜영의 머리는 촉촉하게 젖어있다.
그녀가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영은은 혜영을 밀어낸다.
"저리 좀 비켜.정신 없어."
그녀의 퉁명스런 말투에 헤영이 입을 내밀며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럼 그렇지.웬 분위긴가 했네.언닌 참 재미없다.그거 알어?"
영은은 아무말없이 웃어보이기만 한다.
"다 찾았어?"
"아니.이제부터 찾으려고,근데 언니 있잖아..."
영은은 혜영이 그 큰목소리로 수다를 늘어놓을것 같아
손가락으로 옆자리를 가리키며 주의를 준다.
수업에 쓸 고대 문양에 관한 자료 준비로 오래간만에
찾은 도서관...
그녀는 도서관안을 휙 둘러봤다.
영은은 문득 진이가 떠올랐다.
시험기간만 되면 서로 자리를 잡아주던 두사람.
우리가 왜 이렇게 된걸까...?
어떤 슬픔이 영은의 가슴을 짓누른다.
영은은 따라나오려는 혜영을 억지로 앉혀놓고
자신의 착찹한 심정을 달래려
밖으로 나왔다.
창가에 기대섰다.
코끝으로 바람이라도 느끼고 싶어 영은은 눈을 감고
얼굴을 창문밖으로 내밀어본다.그러나
앞으로 가로막힌 건물때문인지 그녀가 기대한 바람은
한자락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한 남자가 여자의 감은 눈속으로 들어와 가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로 불어오다 돌아서버린 바람...
그도 저렇게 가로막힌 무언가에 가슴이 아팠던걸까...?
아무런 설명도,변명도 없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사람.
그날의 수치스러웠던 기분이 떠올라 모욕감마저 들게하는 그를
그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올라
영은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막연히 놓치기 싫었던 그에 대한 설레이는 감정이 이젠
슬픔이 되어 모든것이 우울하기만 하다.
그를 보기위해 매일 매일 얼마나 행복했던가.
가지지 않아도 한껏 부풀어 즐거워했던 날들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단숨에 걷어가버린 그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거짓말처럼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꿔버린
그를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것만 같다.
한사람때문에 이렇게 웃고 우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질뿐이다.
'엄마!나한테 너무 과분한거였나봐.그런 감정.내가 가지기엔...'
행여라도 자신의 생모나 어머니의 것처럼 그런 사랑을 하게된다면...
사랑도 유전일까...?
처음으로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진다.
가슴이 아프다.
이런 생각까지해야하다니...
갑자기 어깨가 흔들렸다.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웃고 있다.
"야!자주 보네!"
인호였다.
방금 커피를 마신듯 그에게서 커피향이 느껴졌다.
"어!인호구나.밥 먹고 오는거야?"
"그래.이거 아깝다.10분만 널 빨리 만났어도 밥값버는데..."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영은은 다시 그가 생각났다.
영은의 얼굴에 스치는 어두움을 눈치챈듯 인호는 일부러
더 명랑한척 큰소리로 말했다.
"너,요즘 더 예뻐졌다.젖살이 좀 빠졌네."
"야.넌 뭐 어른같네."
인호의 환한 미소가 영은의 마음까지 밝아지게 한다.
예전부터 인호는 그랬다.
영은은 진이덕에 알게 되긴 했지만 인호와 평소 가깝게 지냈다.
학년이 바뀌고 전공이 나뉘는 바람에 진이의 써클애들과도
통 만날일이 없었다.갓 입학했을때부터 은근히
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인호는 진이의 단짝인 영은에게 더
친절했었다.늘 퉁명스러운 진이의 말투때문에 인호는
상처입는 일이 많았다.
보기보다 마음이 순하고 여린 인호는 진이에게 제대로
고백한번 못하고 일년넘게 혼자만 가슴앓이를 했다.
영은에게 그런 자신의 마음을 비춘적이 있어
그녀가 진이에게 인호얘길했다.
진이는 웃기만 했다.
두사람 사이 무슨 일이 있긴 했을까...?
그렇게 인호는 혼자 마음을 접은듯 했다.
얼마전부터는 사귀는 사람이 있는것 같아 보였는데...
써클실앞에서 그와 함께 있는 여학생을 두어번 본 기억이 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인호는 군대얘길 꺼낸다.
"하긴...너도 남자니까..."
무심코 한 혼잣말이었는데 인호는 소리내어 웃는다.
"뭐...?그럼 여태 내가 여자같았냐?"
"아니...그게 아니라...후...그렇게 들렸니?"
영은도 그의 웃음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인호가 웃음을 멈춘뒤에도 그녀는 소리내어 웃고 있다.
영은의 비어있는 웃음소리를 듣다
인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영은아!너...혹시나해서 물어보는건데..."
그는 자신의 군대얘기를 할때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영은을 본다.
"얘는 무슨 얘길할려구 이리도 뜸을 들이실까...?"
그녀는 인호를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야아!빨랑 얘기해.사람 궁금하게...내가 왜...?"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하긴 요즘들어서는 서로 얼굴을 부딪혀도 별로 할말이 없어
아주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지나쳤었다.
그는 아마도 일부러 무슨 얘긴가를 그녀에게 해주고 싶어
가던 걸음을 멈춘것 같았다.
"너...민재 선배 좋아하니...?"
'결국 이 아이 입을 통해서 또 그를 떠올려야 하는군'
그를 떠올리면 가슴부터 아프다.
왜 그걸 묻냐고...그럼 안되느냐고 인호에게 물어보고 싶다.
영은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왜...?그게 궁금했어...?"
인호는 대답대신 피식하고 웃어보인다.
"그래.니가 얼마전에 나한테 그 선배 연락처 물어볼때...
그때 물어보려 했지."
"근데...?근데 왜 그러지 않았니?"
"그냥...설마 했지."
지금 또 이 앤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인호를 쳐다보는 영은의 눈은 또다시 다가오는 두려움에
한없이 흔들렸다.
자상한 그가 그걸 모르고 지나칠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인호는 조금 망설이는것 같더니 결심한듯 이내 말을 잇는다.
"영은아!아니길 바란다."
듣고 싶지 않았던 그의 단호한 말에 그녀는 또한번 가슴이 아프다.
영은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려 힘주어 말했다.
"왜...?무슨...뜻이니...?"
인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그런거구나."
인호는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가 모르는 애라면...나랑 아무 상관 없는 애라면 이런 말
굳이 할 필요도 없겠지.그래도 넌 나한테..."
영은은 괜시리 감정이 고조되어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수가
없다.인호도 진이와의 일을 알고 있는걸까...?
"너...진이 얘기하려는거니...?"
그녀의 말이 의외였던지 그는 조금 놀라는 표정이다.
"진이...?왜 진이도 그 선배 좋아하니...?
니네 둘이...어떻게 된거야?"
아직 인호는 거기까지는 모르는것 같다고 생각하며
영은은 조금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괜시리 넘겨 짚지마.난...그래.진이한테 들은거냐구..
그런 뜻이야."
그렇게 둘러치면서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남들이 봐도 진이와 나...웃긴 걸까...?
인호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다.
너 아직도 진이 완전히 포기한거 아니구나...
기어이 인호는 영은에게 하기로 했던 말을
다 쏟아붓고 갈 참인것 같다.
진이의 일이 아니라면 인호는 또 어떤 놀라운 말을 하려
저리도 고심하는걸까...아무말도 듣고 싶지 않다.
영은은 인호의 궁금증이 괜한 호기심이길 바래본다.
그러나 한참뒤에 입을 연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너...그 선배 좋아하지마라.아니 정리해라.니 마음..."
"인호야.너 무슨 말..."
"그 선배.여자 있어.그냥 사귀는 사이 아니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영은은 인호가 지금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수가 없다.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행여 눈물이라도 보일까 걱정스러웠는지
인호는 영은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주고는 저만치 갔다.
그는 아마도 그녀에게 많이 미안해하는것 같다.
무슨 말인가를 더 하고 싶은 눈치였는데 영은의 반응이 생각보다
진지해서인지 ..
모두들 너무 배려 깊은 사람들이어서 자신이 그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이렇게 모진 얘기들로 걸음을 막는것일까...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참을수 없이 그에게 화가 난다.
영은은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긴것도 부족해
그를 가지기도 전에
이런 상처를 받고 있음이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
'여자가 있다고...?그게 무슨 말일까...?
그럼 나에게 한 말과 행동들은 다 뭐야...?'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나고 부터는 모든게 엉망이다.
아버지가 떠나신것에도,어머니가 그리 힘들어하시는것도
모두 눈감고 모른체 했었다.
자신의 위험한 감정에만 젖어...
그런데...그런데 이게 뭔가...
'미안해요.다 내탓이었어.그런데도 모르는척 한 댓가를..
이렇게 치루나봐.미안해요.난 ...'
모든것이 그의 탓인것만 같이 여겨졌다.
자신을 그리도 초라하게 만든 그였지만
그래도 무슨 말못할 사정이 있을것이라 자위해왔건만...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그에게
한없이 미련을 두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순간이나마 그에게 모든것을 허락하고 싶었던
자신의 무모한 감정을 지금이라도 되돌리고 싶다.
그렇게 ...그럴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영은은 진이의 말처럼 인호의 얘기도 믿고 싶지 않다.
혜영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아까,진이가 언니 찾던데...만났어?"
진이가...?
"아니...무슨 일 땜에...?"
"언니!진이랑...싸웠어?"
영은은 남은 국을 후루룩하고 마시곤 그릇을 챙겨 일어섰다.
혜영이 따라 일어섰다.
영은이 말했다.
"우리 술마실까...?"
혜영은 벌써 한 캔을 다 비운듯 캔을 조금 찌그러뜨리고 있다.
그리곤 영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은은 이제 겨우 세모금을 마셨을 뿐이었다.
"이렇게 빈 강의실에 앉아 술마셔 보기도 처음이네.
분위기 괜찮은데..."
혜영이 말했다.
차가운 알코올이 몸속으로 꾸울꺽하고 타고 흐르는 느낌이 났다.
자신의 아픈 속으로 들어가 눈물이 되는 술.
눈물이 모자랄때 그래서 술이 필요한거로구나.
영은이 부끄러운듯 물었다.
"혜영아!넌 누굴 좋아하면...행복했니?"
혜영은 영은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왜...?내가 선수같아 보여?"
"아니...그래도 넌 나보다는 그런 감정 잘 알것 같아."
"언니!아니야.나 언니보다 그런거 더 몰라.
하면 할수록 알수 없는거...무진장 아픈거...
그런데도 빠져 나오기 싫은거...
그게 사랑 아닐까...?"
사랑...?
그래.그건...자꾸만 커져가는 두려움같다.
지금 내가 더 슬프고 무서운건...
이렇게 상처를 받아도 그가 보고 싶은거야.
누가 무슨 얘길하든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
그사람을 만나고 싶어.지금 당장...
너무 보고 싶어서 가슴이 터져버릴것 같아.
나 어쩌면 좋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