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기억2-
"두려움의 시작"
영은은 열린 방문틈새로 어머니의 긴 한숨을 듣는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당신의 눈물을
영은은 속시원히 대신 흘려주고 싶다.
붙잡으면 가지 않을 사람임을 어머니는 알고 계실것이다.
그러나 영은이 아는 그녀는 분명 또 한번 아버지를
떠나게 하실게다.아니 이번 여행은 아마 그녀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나직한 음성이 들린다.
"그냥 놔둬.겨울옷까지 왜 챙기나.그래도 이사람이..."
그는 어쩌면 그녀를 떠나기 싫은지도 몰랐다.
늘 그는 돌아왔다.
그녀가 있어서인지,영은이 있어서인지
오래지 않아 그녀들의 곁으로 돌아와 여느 집의 가장처럼
무겁지도,가볍지도 않게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초등학교때까지 영은은 자신이 입양아라고 생각했다.
살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족함 없이 자신을 거두어준
부모님을 그녀나름대로는 사랑했다.
철이 들 무렵의 어느날
너무나 당당하게 널 입양했노라고 얘기하는 어머니앞에서
영은은 놀라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그래도 계속 엄마랑 살 수 있는거지?"라고...
그때 어머니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무뚝뚝하고 잔정없는 그녀의 눈에서 소리없이 똑똑 떨어지는
눈물을 보니 영은은 갑자기 슬퍼져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어머니의 눈물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은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모든것이 더뎠고 둔감한 아이였다.
목을 가누는것도,뒤집는것도 그리고 기기,걷기,말하기 등
무엇하나 앞서는 것이 없었다.
학교를 다닐때도 뭐든지 항상 뒤처져 자신도 재미를 못느꼈다.
단 하나 잘하는게 있다면 달리기였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면서 달리기를 잘하는것으로 덕을 볼만한 데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그마저도 의욕을 잃었다..
초등학교 4학년 운동회때 달리기에서 영은이 일등하자
시장일로 늦게 도착해 가뿐숨을 가라앉히던 어머니는
너무나 환하게 웃으셨다.그리고
옆에 서 있는 아주머니에게 저애가 내애라고 자랑이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영은을 가리켰다.
영은은 못올거라 여겼던 엄마가 자신을 보고 서 있는걸 보고
너무도 격앙되어 손목에 도장을 받고 그냥 뛰어오는 바람에
상으로 주는 연필과 공책을 받는 일도 잊어버렸다.
그날 저녁에서야 그것들이 생각나 제대로 잠을 이루지도 못했지만
영은은 엄마가 자신을 보아주러 온 사실만으로 너무 기뻤다.
여느때같았으면 늘 시장일을 핑계대며
이웃집 아주머니나 고모를 대신 보냈을 일이었기때문에...
영은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보다
어머니와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긴 시간이 없어 슬펐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는 부드럽고 다정한 분이셨지만
왜인지 영은과 단 둘만 남는 시간을 피하시는 눈치였다.
두사람은 늘 영은을 외롭게 혼자 남겨두는것으로
벌을 주고 상처를 입혔다.
건설공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늘 지방 출장이 잦으셨고
천도매상으로 수월찮은 몫돈을 만지시는 어머니는
가게의 허름한 다락방에서 주무시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나 영은은 자신이 뛰쳐나가지만 않으면 자기를 내몰거나
구박하는 사람이 없어 어쩌면 자신이 덜 불행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아니 그리 여기고 살기로 했었다.
가끔은 비오는 날이나 무언가를 잊고 나간 날이면
인자한 아버지가 학교를 찾아오셨고
급하게 돈이 필요한 날이면 어머니의 가게로 가면 되는
영은은 아니 그녀의 가정은 그리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영은의 예민하지 않은, 오히려 둔감한 성격덕에
그녀의 사춘기도 그리 모진 추위없이 그리그리 지나갔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게에 들른 고2의 어느 여름날
그 근처에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왔다가
영은은 친구들과 어울려 가게에 잠깐 들렀다.
어머니는 잠깐 가게를 비우셨는데 옆 가게 아주머니의 친척인듯한
아주머니 한분이 가게를 대신 보고 있었다.
영은이 옆가게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자 그 아주머니는 눈짓으로
누구냐고 묻는듯 했다.
아주머니는 조금 말을 더듬듯 ,"아아!따알...!"했다.
입양아임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어머니의 성격덕에 자신을 보는
측은한 시선에 영은은 별 스스럼없이 잘 길들여져있었다.
이사람,저사람 곱씹는 재미에 사는 시장 사람들의 속성을 영은은
잘 안다.두사람은 눈빛으로 주고 받을것이다.
'불쌍도 하지.'
'불쌍하긴...그래도 저앤 선택받았지.다른 애들에 비함...'
'그려.그래도 잘 키웠네.지 엄마라구 이런데 찾아오는거 보면...'
'모르지.다 키워 시집이나 보내주면
그러곤 지 핏줄아니라고 발길도 안할지...쯧쯧'
영은은 문득 친구들은 모르는
자신의 비밀을 들키기라도 할까 두려워져
빨리 이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다행히도 출석부나 교복 그리고 얼굴에는 '입양아'라고
씌어있지 않으니 반 친구들은 그녀를 특별한 아이로
쳐다보는 일은 없었다.물론 담임선생님은 알고 계시겠지만
그런 것으로 영은을 이상하게 보거나 문제 삼는 일은 없었다.
영은은 급하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그때 그녀의 뒤통수에 급하게 달려와 박히는
낯선 아주머니의 한마디가 영은을 그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 에밀 꼭 빼닮았네."
영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홱 돌아본다.
두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수근댔다.
"그러니 숙이 가슴이 어쨌겠어?"
숙이.십년가까이 친구처럼 지내는 아주머니가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영은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심한 두통을 느꼈다.
마음은 당장 다시 가게로 뛰어올라가 두사람을 붙들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누구 얘길 하는거냐고,
그럼 자신은 누구냐고...묻고 싶었지만
영은의 몸은 자꾸만 자꾸만 그곳에서 멀어지려 했다.
한번도 어머니를 원망해본적이 없었다.
자식이 없어 고아원을 찾아
처음 눈에 들어온 자신을 인연으로 삼았다는 그녀의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영은은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서러움이 북받쳐 오른다.
키운 자식이래도 부모 자식간이라 이상한 예감이 들었던지
어머니는 그날 밤 12시가 다 되어 전화를 걸어
어색한 목소리로 때이른 등록금얘길 들먹이셨다.
영은은 어린 시절 자신을 가운데 앉혀놓고
큰소리로 울부짖던 어머니를 기억해냈다.
'이 애를 보면서 ,이 애를 보면서 나한테 빌어.이 애가 커가는걸
보면서 당신이 나한테 무슨짓을 했는지 뉘우치라고...으으흐...'
평소에 잘 다투시는 두 분이었지만 그날은 여느때완 달랐다.
출장을 막 다녀 오신듯한 아버지의 가방을
마당의 수돗가쪽으로 집어던지며
어머니는 미친 사람마냥 큰소리로울부짖었다.
그리고는 초저녁 잠을 자고 있던 영은을 안아다
마루 한가운데 앉혔다.
눈을 비비며 올려다본 어머니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보기 흉했다.무서워진 영은이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자 그녀는
냉정하게 영은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소리내어 우는 영은.영은은 아버지를 불러보았지만
그역시 영은을 외면했다.
엄마!나 좀 봐요.
엄마!엄마!엄...마....!
아버지는 영은의 곁으로 와 살며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보신다.
"영은아!엄마 잘 돌봐 드려라.너도 요즘 작품하느라 바쁘겠지만..."
아버지는 말끝을 흐리신다.
영은은 대답대신 아버지를 꼬옥 끌어 안았다.
부쩍 말라버린 자신의 아버지.
문득 영은은 자신이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멀리 가실것처럼 왜그래.아버지는 정년 퇴직 안하실거야?
젊은 사람들 일 좀 하게 그만두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버지는 이미 떠나버린듯 했다.
자신의 두팔안에 안겨있는 외소한 몸집의 남자는
벌써 수년전에 그녀들을 떠나버린 아버지의 초라한 겉껍질에
불과했다.
그래요.아버지! 이젠 이 감옥에서 떠나세요.
훨훨 날아가세요.엄마가 보내실때 가세요.
얼른 얼른... 뒤도 돌아보시지 말구요.
영은은 늘 그녀의 아버지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긴 형벌을 받고 있는것만 같아 죄스럽다.
"아버지!엄마랑... 이제 그만 헤어지세요..."
차마 이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화를 내시는 대신 영은의 팔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냈다.
이제 두사람의 문제는 더이상 영은이 아님을
세사람 모두 알고 있다.
분노의 오랜 침묵이 만든 무관심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셨다.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들줄 모르는 그녀의 분노가 그걸 말했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를 사랑하셨지만
어머니를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두사람은 서로를 피해 집으로 들어와서는
서로의 흔적을 느끼고 또 나갔다.
그렇게 두사람은 날마다 어긋나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내려 앉은 고통만큼 검고 무거워보이는
커다란 가방을 끌며 아버지는 대문앞으로 걸어가신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제법 큰 소리로
결의라도 하듯 비장하게 말했다.
"내 곧 오리다!"라고...
영은은 아버지의 뒷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아..."그녀는 그를 불러 세울 힘이 없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가게에 나가시지도
방에서 나오시지도 않으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안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말 떠나신걸까?
그렇게 모질게 냉정한 어머니의 곁에서
아버지는 드디어 그녀를 더이상 견딜 자신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런 그녀를 끝없이 사랑하는 자신이 두려운지도 몰랐다.
어쨌든 영은의 나이 스물두살이 되던 그해
아버지는 나선 대문을 다시는
들어서지 않으셨다.
영은은 어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버지를 절대로 용서할수 없는거냐고...
그리고 자신이 떠나주길 바라느냐고...
어머니는 영은의 젖은 눈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미 용서했다고,
너를 나에게 주었기때문에...
그리고
용서할수 없는건
그를 용서한 자신이라고...
영은은 아버지의 또다른 사랑으로
생긴 아이였지만 그녀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지금의 어머니때문이라는걸 안다.
임신중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로 충격을 받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생모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계단에서 굴렀다.칠개월이나 되던 아이는 뱃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후 아버지는 여자를 만나지 않았지만
여자도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고 이를 안 어머니는
아이를 낙태시키려는 여자를 찾아가 설득했다고 한다.
니가 내 아이를 죽였으니 나에게 아이를 달라고..
아니 그건 차라리 협박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뱃속의 아이는 남자였다고 했다.
이 얘기는 그녀의 고모가 해 준 얘기였다.
영은은 여기까지 듣고 속이 메쓱거리고 토할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고모는 어린 영은에게 이런 얘길 해야 하는 자신이 싫지만
영은이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을 다 이해하려면
그럴수 밖에 없노라고 두손을 꼭 잡아주며 울먹였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된 듯
더럽게도 얽힌 자신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이 역겹게 느껴졌다.
고모는 이렇게 덧붙엿다.
영은이 어긋나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운듯...
"그래도 넌 내 조카야.내 피붙이라구...이렇게 잘 키운
네 엄마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영은은 생모에 대한 기억에 목말라 한 적이 없다.
가끔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일부러라도
무뚝뚝한 어머니에게 더 엉겨붙었다.
귀찮다고 역정을 내는 그녀에게 영은은 더없는 연민이 느껴졌다.
영은은 다음날 오후수업만 있는데도
어머니의 밥상을 보아놓고 그녀를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
아침 일찍 집을 나왔다.
아버지가 떠나시며 흘린 눈물일까...
새벽비라도 내린듯 거리는 젖어 있었다.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 앨까?
엄마!나 그래도 되는거야?응?
처음으로 자신에게 살아서 벌떡거리는 가슴을 느끼게 해 준 사람.
영은은 그 남자를 떠올리며 어느새 밝아진 자신을 느꼈다.
아버지를 벌써 잊어버리게 한 사람.
영은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
학교 건물이 보이는 언덕에 다다르자 저 멀리서
누군가가 새벽 운동이라도 하다 온듯 헉헉거리며 뛰어와
영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해맑게 웃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누구...?아....!
영은은 금새 수줍어져서 얼굴을 붉혔다.
"안녕하세요."
오늘 그는 새하얀 츄리닝차림이었다.
군복을 벗은 남자는 훨씬 어려 보였다.
"자식!여기가 군대냐?얼어가지곤...하하!쉬어..."
이 사람은 진이와 내가 자기때문에 어떤 상황인지 알기나 한걸까?
문득 요즘 들어 불쑥불쑥 자주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그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너 오늘 오전수업 없잖아."
"그걸 어떻게...?"
"놀라긴...니네 건물에 가서 보고 왔지."
"네...?왜요?"
"왜요는 일본 담요다.자식아...하하하..."
갑자기 그는 영은의 손을 덥썩 잡는다.
순간 영은의 몸은 감전이라도 된듯 얼얼해진다.
"어쨌든 반갑다.그럼 안녀엉!"
진이의 써클 친구들이 영은의 이름으로 장난치는 말투였다.
"참 너 성이 안씨래매.그래.나중에 또 보자.안녀어응.가라."
이건 나에 대한 관심일까?
영은은 다시 저만치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보고 서 있었다.
차도에 내려선 영은을 향해 누군가 클랙션을 울린다.
영은은 정신이 퍼뜩 들어 보도로 올라 섰다.
그를 만나기만하면 맥없이 정신을 놓게 된다.
방금전의 우울함도 잊은채...
이렇게 유치하게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이게 사랑이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