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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인연 2001-08-26

제3부 상실의 세월

한줌의 재가 되어버린 정태를 품에 안고 지숙은 아크라를 떠나왔다.
고향에 도착한 정태는 아버지의 무덤 옆에서 고이 잠이 들었지만 서울로 상경한 지숙은
고향 땅에 묻힌 정태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의 말대로 정태를 고향에 묻고 온 것이 지숙은 몹시 후회가 되었다.
비록 머지않아 흙이 되어버릴 남편이지만 지숙의 가까운 곳에 두고 싶었다.
지숙은 정태와의 추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편지를 쓰며 그리움을 달랬지만 그것은 죽음보다
슬픈 고문이었다.

사랑하고 보고 싶은 자영 아빠!

당신의 육체는 이제 한줌의 재가되어 흙 속에 묻혀 버렸지만 당신의 영혼은 아직도 내
품속에서 꿈을 꾸고 있답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온기를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느끼고 있답니다.
세면을 끝낸 당신의 얼굴에서 상큼한 비누 향이 배어 나와 당신이 내 곁을 스쳐 갈 때마다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아침이 시작되어도 나의 마음속에서는 당신을 볼 수 있답니다.
퇴근을 하여 현관문을 들어서는 당신의 미소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그러나 잠이 깨면 그 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몸서리를 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날은 당신이 내 곁에 있던 마지막 날이었기에 자꾸만 떠올리게 됩니다.
그 날의 기억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긴 호흡을 수 없이 삼키면서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진정 시킵니다.

아크라의 아침은 후덥지근한 기온과 바람이 온몸을 휘감으며 스콜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우기가 되면 하루에도 두 세 번씩 쏟아지는 스콜을 보며 우리는 일상의 일부분처럼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스콜은 언제나 30여분 정도 지속되었지요.
그러나 천지를 개벽할 것만 같은 스콜도 그치고 나면 언제 큰비가 내렸냐는 듯이 태양은
열사의 대지 위를 더 뜨겁게 달구었고 당신은 그 대지 위에 몸을 바쳤습니다.

당신이 떠난 그날은 마흔 일곱 번째 당신의 생일이었지요.
당신은 생일날 아침에 늑장을 부리는 자영이를 꾸중하다 결국 자영이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예견을 하였나요? 당신의 그 꾸지람이 자영이를 살렸습니다.
만약 자영이까지 교민 체육대회에 동행을 하였다면 자영이도 당신과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지켜주지 못하고 나 혼자만 죽음의 문턱에서 빠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지 못한 것이 이토록 아쉽고 미안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와 자영이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렸습니다. 난 당신과의 인연을 결코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절망 때문에 아름답고 이별은 상처 때문에 망각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당신의
영원한 인연, 지숙은 살아 갈 것입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병원에서 지숙이가.

열어 놓은 아파트 베란다를 넘어 들어오는 삼월의 상큼한 아침이 황토 빛 화분에서 뿌리를
내린 철쭉 가지를 가볍게 흔들고 있다.
예년에 비해 추운 겨울을 보낸 탓인지 철쭉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들은 낙엽처럼 힘이 없어
보이고, 토실토실한 꽃망울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숙은 무관심했던 자신을 질책하며 철쭉의 시든 잎사귀들을 떼어 내고서 베란다의 수도에
비닐호수를 연결하였다.
먼저 철쭉 화분에 물이 넘치도록 주었으나 지숙은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자, 이번에는
행운목, 벤자민 등 그리고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아열대 지방 식물의 화분까지 물을 흠뻑
뿌렸다.

"아이고! 죽지도 않고 잘도 사네?"

좁은 베란다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낸 생명의 끈질김에 지숙은 감탄사가 절도 나왔다.
고향의 흙에서 작렬하는 태양 빛을 받으며 자라야 할 식물들이 먼 이국 땅에, 그것도 냉기
가득한 아파트 베란다에서 비좁은 화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식물들이 대견스럽다.
화분에 물을 흠뻑 뿌리고 난 지숙은 먼지가 내려앉은 베란다에 물을 뿌리고 가루 비누를
풀었다. 청소하는데 거추장스러울 것 같은 샌달도 벗어버렸다. 발가락사이에 얼음 덩어리가
낀 것처럼 물은 차갑다.
지숙은 철수세미로 베란다 바닥을 닦아내기 시작하였다. 베란다 여기저기에 팔십 년의 생을
보낸 촌로의 얼굴에 난 검버섯 같은 얼룩이 이끼처럼 붙어있다.
지숙은 쪼그리고 앉아 세월의 슬픔을 닦아내려는 듯 힘을 다해 얼룩을 벗겨내자 이마에는
이내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흐르는 땀방울을 옷소매로 훔치며 지숙의 수세미질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수세미가 지나간 베란다의 타일들은 시커먼 땟물을 토해내고 물이 흐르는 비닐호수를 갖다
대자 타일들은 하얀 백자처럼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휴~우! 이렇게 깨끗한 것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베란다 바닥을 쳐다보는데 눈썹에 걸린 땀방울과 눈앞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지숙은 물이 젖은 손으로 땀을 닦고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모아 머리 끈으로 동여매고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허리의 통증 때문인지 수세미를 놔버린
손은 어느새 허리를 받치고 있었다.
순간, 생각지도 않았던 현기증이 머리 꼭대기에 내려앉아 소용돌이를 쳤다.
지숙은 창문틀을 잡고서 휘청거리는 몸을 유리창에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자 현기증은 날개를 접은 듯 사라지고 삼월의 꽃샘바람은 지숙의 마른 입술을
핥으며 지나가고 철쭉의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은 봄 햇볕이 봉긋한 젖가슴을 밟고 있다.
지숙은 그때서야 몸에 중심을 잡고 침대보를 걸쳐놓은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를 쳐다보았다.
905동과 906동의 사이에 빠끔히 얼굴을 내민 뭉게구름이 청포 빛 하늘에 번지자 지숙은
핀란드의 하늘을 떠올렸다.
핀란드의 하늘은 사시사철 파란색을 띄고 있었고 눈앞에 파란색의 셀로판지를 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투명했었다.
순간적으로 지숙의 눈앞에 정태의 얼굴이 스쳐갔다.
지숙의 눈썹은 금새 촉촉하게 젖어 들었고 언제 일어났는지, 잠이 덜 깬 자영이가 베란다
창문을 두드렸다.

"엄마! 뭐해?"

지숙은 자영이의 목소리를 듣고서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서 베란다를 청소했던 수세미와
비닐호스들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언제 일어났니? 더 자지 않고."

일요일이면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잠을 자던 자영이는 외국 항공사 승무원의 꿈을
갖고 올해 Y대 불문학과에 입학한 지숙의 딸이다.
자영이의 겉모습은 어엿한 숙녀이지만 일상의 언행은 아직도 소녀의 티를 벗지 못했다.
유년시절을 대부분 외국에서 보낸 자영이는 느슨하고 자율적인 학교 생활에 길들어져
국내 고교에 전입을 했을 때는 학교에 가기 싫다며 짜증을 내기 일쑤였고 한동안 한국교육
시스템에 쉽게 적응을 하지 못했다.
자영이는 학교를 갈 때마다 학교 생활에 불만을 늘어놓았다.

"지겨워 죽겠어, 엄마! 학교 가기 싫단 말이야! 국어 수학이 너무 어려워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것뿐만 아니고 선생도, 아이들도 맘에 안 들어. 다시 외국 가고 싶어, 엄마!"

자영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지만 자신도 외국으로 다시 갈 수 없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영아, 세상은 네 맘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지! 참고 지내야지. 그러다 보면 좋은 친구도
사귀게 되고 자연스럽게 적응이 되는 거야. 어서 준비하고 나가, 그러다 지각하겠다."

자영이는 J고에 전입한 후, 새로운 환경의 학교 생활에 쉽게 적응을 못하고 지숙을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외국에서 학교를 보낼 수도 없는 상황에 불만을 터뜨리는
딸아이가 한편으로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숙은 그때마다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며 딸의 고충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자영아 여기는 한국이야! 그리고 너도 한국사람이고."
"몰라! 엄마는 맨 날 그 얘기야...."
"모르면 열심히 배워야지. 학원에는 힘들게 왜 다니는데. 내년이면 고3이야, 한국에서는
대학 가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마지못해 책가방을 매고 현관을 나서는 딸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따라나선 지숙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자영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었다.

자영이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버리자 지숙은 베란다 바닥에 고인 물을
걸레로 훔치기 시작하였다.
구정물을 흠뻑 머금은 걸레를 온힘을 다해 쥐어짜자 걸레에서 떨어지는 구정물은 하수관을
타고 들어갔다.
지숙은 오랜만에 느끼는 후련함에 답답했던 가슴이 파란 하늘처럼 투명해 진 것 같았다.
청소를 마친 지숙은 걸레를 헹구어 베란다 빨래걸이에 걸쳐놓고 거실로 들어 왔다.
거실 소파에는 자영이의 허물인 듯한 외투가 걸쳐 있고, 탁자 위에도 카세트 테이프와 CD
그리고 월간 잡지 등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자영이의 방은 이보다 더할 것이다. 물건 하나도 정리정돈 할 줄 모르는 딸아이를 생각하니
지숙은 화가 치밀어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영아! 뭐하니? 너 빨리 나와서 네 물건들 챙겨 이것아!"

화장실에 들어 간 자영이는 지숙의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고 침묵만 흐른다.

"뭐 하니? 빨랑 나오지 않고."

지숙이가 다시 한번 큰소리를 치자 자영이는 잔뜩 불만스런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엄마 왜 그래? 아침부터."
"이게 뭐야! 너도 이제 어른이야! 언제까지 엄마가 네 방, 네 물건까지 정리해 주어야
하니?"

자영이는 찡그린 얼굴을 하며 소파에 있던 옷과 탁자에 있는 물건들을 쓸어모아 가슴에
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 간 뒤 문을 닫아 버린다.
방문을 닫아버린 딸을 생각하니 지숙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저러다 딸이 마음의 문까지
닫아 버릴까 싶었다.
지숙은 아침부터 괜한 큰소리를 냈나 싶어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며 딸아이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였다.

"자영아! 아침 먹어야지?"
"엄마 나 더 잘 거야! 이따가 일어나서 내가 차려 먹을 게!"
"그래라! 그럼. 찌개는 가스렌지 위에 있다. "

닫혀진 문틈으로 나지막하게 새어 나오는 자영의 목소리에는 졸음이 잔뜩 묻어 나왔다.
사실 지숙도 요즘 입맛을 잃었다.
마땅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어쩌다 입맛이 돌아도 음식을 만들어 놓고 보면 자영이는
밖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고 들어 와 두 식구를 위해 만든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양보다
쓰레기로 버리는 양이 더 많았다.
그러나 아들 지현이가 상경하는 날이면 푸짐한 음식을 만들어 놓아도 쓰레기가 될 염려가
없어 마음은 편했다.
지현은 그런 지숙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이 최고라며 맛깔스럽게
먹어 주었다. 지숙은 그런 아들이 늘 고마웠다.
지현이는 지방에 있는 K기술원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다 보니 엄마가 요리한 음식을
늘 먹고 싶어하였다.
정태를 대신하여 아들 지현이가 엄마의 요리 솜씨를 인정해 줄 때면 늘 뿌듯했다.
정태와 결혼을 하면서 지숙은 솜씨 없는 요리를 하느라 시간만 나면 요리 책들을 탐구하며
요리 배우기에 열중했었다. 많은 요리 중에 정태는 해물찌개를 특히 좋아했다.
그런 정태의 식성 덕분에 지숙은 이제 해물찌개를 끓이는 일은 도사가 되어 버렸다.
정태와 달리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어진 지현이와 자영이는 해물찌개를 끓여 주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숙은 이제, 정태의 기일과 명절날을 제외하곤 해물찌개를 더 이상 끓이지 않는다.

지숙은 밥 대신 녹차로 허전한 속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주전자에 물을 끓는 동안 지숙은 소중하게 보관해 놓은 잔 세트를 찬장에서 끄집어냈다.
청색과 적색으로 그림이 그려진 부부 잔 세트는 정태와 프랑스를 여행하였을 때 구입한
것이었다. 자주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캐나다와 핀란드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가끔씩
꺼내 사용을 했었다. 정태가 썼던 청색 그림의 잔에서 정태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물이 끓자 지숙은 청색 잔에 말린 녹차 잎을 넣고 끓는 물을 조심스럽게 부었다.
끊는 물이 잔을 반쯤 채우자 말라 있던 녹차 잎은 금새 부드럽게 펴지며 피어오르는 김
속에 진한 향기를 내 뱉는다.
녹차의 향기가 정태의 향기처럼 진하게 콧속으로 스며들었고 정태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태는 커피보다는 녹차를 더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세작차를 즐겨 마셨다.
세작은 새봄이 되면 홍차 나무에서 가장 먼저 돋아 나오는 새순을 4월 초순에서 5월 초순에
절취한 것이다.
세작차는 5월말에서 8월까지 수확한 중작, 대작차와는 달리 감칠맛 성분인 아미노산류가
더 많이 함유되어 있어 쓴맛과 떫은맛이 덜하며 혀끝에 녹차가 닿는 순간 고소한 맛과
은은한 향이 탁월하다.
지숙은 피어오르는 녹차의 향기를 맡으며 정태의 사진이 걸려 있는 안방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침 대신 녹차 끓여 왔어요."
".............."
"당신은 일요일 아침이면 녹차를 즐겨 마셨잖아요."

사진 속의 정태는 지숙의 정성어린 녹차 대접에 만족하고 있는 듯이 엷은 미소를 띠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지숙을 응시하고 있다.
지숙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곱게 다림질하여 옷걸이에 걸어 둔 정태의 하얀 와이셔츠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것 같은 정태의 모습을 습관처럼 떠올렸다.
이런 습관 때문에 지숙은 정태가 입었던 옷들을 한 벌도 버리지 못하고 사별한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간직을 하고 있다.
정태와 사별하고 새로운 봄을 맞이할 때마다 지숙은 정태가 입었던 옷들을 꺼내 정성스럽게
손질하여 옷장에 보관을 했다.
그러나 세 번째를 맞이한 봄에는 아직 옷장을 열지 않았다.
지난겨울 정태의 기일을 맞이하여 고향에서 상경한 시어머님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정태의
와이셔츠를 보시고 지숙에게 물었었다.

"애비 옷을 아직도 치우지 않았니?"
"네 어머님. 일년만 더 있다 치울 거예요."

시어머님은 어느새 지숙의 속내를 읽어낸 듯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하셨다.
지숙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녹차의 향기가 사라질 즈음에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정태의 감색 및 쥐색 양복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옆에는
캐나다에서 생활을 했을 때 토론토 시내 백화점에서 구입한 베이지 색 바바리 코트가 걸려
있다. 주인을 잃은 코트가 처량하게 보였다.
코트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지숙은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숙은 코트를 꺼내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코드에서도 정태의 향기가 났다.
양복 한 벌 한 벌을 꺼내어 만질 때마다 정태의 표정과 함께 지난날의 기억들이 머리 속을
스치자 지숙은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벌써 세 번째의 봄을 맞이하는구나. 이제는 잊혀 질만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태와 나는 어떤 인연일까?'

지숙은 이제, 정태가 생각날 때마다 예전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며 정태의 명복을 빌 뿐이다.
지숙은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에 남편 없는 여자가 자신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무진 애를 쓰며 그간 세월을 보냈다. 자신에게 매달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나약한 생각은 버려야 했다.
다행스럽게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고, 대학생인 지현이는 의젓하게
공부에도 열중하였다. 자영이 또한 구김 없이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등대처럼 불을 밝혀 주는 막내 시동생 정인이가 가까이 있어
지숙은 남편이 없다는 불안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살수가 있었다.

옷장 서랍을 열자 정태의 캐주얼 복장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고 정태가 신었던 양말들이
곱게 접혀 있다. 서랍 가득히 정태의 향취가 녹차 향기처럼 배어 나온다.
지숙은 정태가 봄과 여름에 입었던 옷들만 다시 옷장에 걸어 두고 춘추복들은 보자기에
묶어 방 한구석에 밀어 놓았다.
시어머님 말씀대로 이제 정태의 춘추복은 치워 버릴 때가 온 것이다.
이 옷들을 태우고 나면 가을과 겨울의 정태는 떠나고 봄과 여름의 옷을 입은 정태가 지숙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지숙의 가슴에 느닷없이 찬바람이 몰려 왔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려 들면서 찬바람은 얼마 동안 지숙의 가슴속을 휘감아 돌다 긴
한숨이 되어 허공에 흩어 졌다.

[제4부 내별의 노래]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