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트인 시야가 시원해짐을 느끼게 하는 강변길을 미순과 봉순은 오랜만에 걷고 있었다. 뭔가 이야기가 하고 싶을 때 이곳에 오면, 차분히 생각이 정리되면서 마음속에 묻어 둔 것을 털어낼 수가 있어서, 누구라도 마음이 답답할 땐 서로에게 데이트를 청했고, 서로의 기분을 잘 아는 두사람은 그 데이트에 말없이 응하곤 했었다. 비록 왔다가 아무말 없이 돌아가는 일이 생겨도, 이곳의 분위기만으로 벌써 스스로 정리가 된 상태라는 것을 알기에, 말하려 하지 않으면,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우리 정말 오랫만이지?"
봉순의 물음에 미순은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오늘의 데이트는 미순이 청했다. 막연히 이곳
을 찿아오면 뭔가 실마리가 풀리고, 자신의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봉순에게 데이트를 청했던 것이다. 뭐든 숨길것이 없고, 어려서부터 친형제 보다
더 가깝게 지낸 탓에, 서로에 관해 사소한 것까지 모른 는 것이 없는 두 사람인데도, 미순은
봉순에게 남편에 관한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자신이 더욱 초라해지고 격하되는 느
낌이 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봉순 처럼 혼자 살았더라면. . . 미순은 봉순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늘
마음 한구석으로, 예전의 실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지 못한 채, 그 마음을 속이고 혼자 살
아가는 봉순이가 너무 안됐다는 생각과, 빨리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생각
을 해 왔었지만, 지금은 봉순이 부러웠다. 그리고 저렇게 혼자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진실
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사랑하는 길은 아닌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
를 늘 미순에게 하소연하면서도 어쩐지 혼자 사는 것을 즐기는 듯한 봉순의 모습에서 미순
은 자유와, 자존심과, 꿈이 보여지는 듯 했다.

"혼자 사니까 좋니? 물론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서 함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건 나의
잘못된 고정관념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야만 더 행복하지 않
을까 생각하게 되는 탓에, 넌 혼자여서 외롭겠다고 미루어 짐작하게 되거든, 그런데 넌 내
생각을 언제나 부끄럽게 하곤 했어, 외로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해 보여서. . . 정말 혼자가 좋은 거야?"

"홀가분하고 내 마음대로 하니까 좋기는 좋지만 늘 자유롭고 좋은 것만은 아니야. 누가 시
키는 것도 아닌데 늘 스스로를 단속하며 살게돼. 역시 성격 탓이겠지? 혼자면서도 늘 자유
롭지 못하고 외로운 걸 보면. . ." 봉순 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즈음은 사실 네가 부러워. . .만일 내가 너와 같은 입장이라면  굉장히 자유분망 하게 살
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돼."

"치, 네가 ? 내가 널 한 두 해 겪고 사니? 너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내 입장이 되고
보면 나보다 더할걸? 스스로를 구속하고, 혹시라도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까,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건가 하며 바른 생활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할 꺼면서. . ."

"애는 내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지 방종하며 살고 싶다고 했니?"
미순은 봉순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봉순과 이야기하면서도 뭔가 딴곳에 있는듯 한 느낌으
로 앉아 있던 미순이가 조용히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뜻밖의 상황에 봉순은 지금 미순
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던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늘 낙천적이라 얼굴에서 웃음을 잃지 않던 미순이가 얼굴에 수심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과
이야기하면서도 딴 것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자주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순이 우는 모습
을 조용히 지켜보며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봉순에게 미순 이 뜻밖의 말들을 쏱아내기 시작했
다.

"봉순아, 도데체 사랑이란게 뭘까? 나 그 사랑이라는 것의 정답이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요
즘 너무 힘들어. 옛날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던 것 같아."
"사랑에 정답이 어디 있겠니, 그저 마음가는 대로 사는 거지. . . 참, 그것도 상황에 따라 어
려울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사랑?  지금 이 나이에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하다니, 넌 아직
도 소녀같아.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  넌 늘 그 사랑 속에 빠져 행
복하게 지내면서. . ."

"나도 그런 줄 알았더니만. 그게. . . 사랑도 색깔이 변해 가더라구. . . 처음엔 핑크빛, 그 다
음엔 빨간빛, 그리고 파랗고, 하얗고, 초록이고 보라고, 때로는 회색빛에 검은 빛까지. . . 어
떨 땐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았던 하얀색으로 되돌리고 싶을 때도 있구 말이야."
"재미있는 표현이네."
"내 생각에 사랑은 원하는 빛깔찿기 인 것 같아. 사람이 아니구. . .

한사람에게서 가지각색의 색깔들을 다 찿아 내며 지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원하는 색깔
이 늘 핑크 빛뿐이라서 핑크빛이 시든 상대를 버리고 새로운 핑크빛을 전해주는 다른 어떤
이를 찿아 다니는 사람도 있고, 핑크빛과 빨강 파랑 녹색 노랑까지는 허용하되 다른 색깔이
끼어 들려고 하면 단호하게 거부하여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거나 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 .
남의 색깔이 더 고와 보여 그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도 있고. . . 이 빛깔도 저 빛깔도 지켜내
지 못하고 마구 흐트려놔서 결국엔 검정이 되어 버리는 사람도 있구,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색깔속에 있을땐 행복해하지만 원치 않는 색깔속
에 서게 될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같아. 상대방은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고, 추
구하는 색깔만 다르게 변했을 뿐인데도 그걸 참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니까. . . 나도
요즈음 사람을 빼내 버리고 색깔만을 찿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돼. 그러면서도 한편으
론, 사람을 빼고 색깔만 찿아 다니다가 사람이 없이 허상만을 추구했을 뿐이라고 깨닫는 순
간이 올까봐 그게 두려워. 색깔만 탐닉하다 진짜로 귀중한 걸 잃게 될까봐서. . .

어쨌든 모두들 처음엔 색깔을 보고 사람을 선택하기보다는 사람을 보고 색깔을 꿈꾸었을 테
니까. 그러니까 색깔보다는 사람을 보는 것이 더 나은 사랑법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내가 원하던 색깔을 줄 것 같았던 그 사람에 대한 기
대가 허물어지면서 그 사람을 버리고 싶고, 그 색깔을 내게 제시 할 것 같은 다른 어떤 이
를 동경하게 되는 거. . . 그게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저지르는 잘못이 아닌가 싶기도하구. .
."

"미순 아, 요새 너희 남편 마음이 변했니? 딴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미순의 이야기를 듣고 대번에 미순의 마음을 읽은 봉순이 미순에게 물었다.
". . . . . "
아무 말 없이 강쪽만 바라보며 걷는 미순을 보며 봉순은 가슴이 미어져 왔다. 그저 사람 하
나 믿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조건이 나쁜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친구가 아니었
던가. 그런데 그 친구를 그 사람이 배신했다니. . . 설마. 그러나 지금 얼굴에서 윤기와 빛이
사라지고 절망을 담고 있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친구의 모습은, 그것은 사랑을 잃은 사
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도데체 어떤 사람인데?"
"어떤 사람인가는, 상대가 누구인가는 내겐 중요치가 않아. . .다만, 그 사람이 다른 색깔의
사랑을 원하게 되었다는 것이 가슴아플 뿐이지. 그래,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람. . 잠시
지나가는 바람일 뿐일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그사람에게 뭔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 왜 이렇게 되었을까. . .내가 뭐가 부족한 건가. . .
나는 왜 그 사람에게 이제는 기쁨을 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 .생각하면 할수록 내 자
신이 너무 초라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 봉순아, 이제 난 정말, 그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없
는 여자가 돼 버린걸까?"

"이 세상에 자신의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기쁨
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되어지질 않아.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자식을 낳
았다는 단순함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귀중한 존재이니까, 젊은시절 순수의 마음으로 만나
순수하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뿌리를 내린 고향같은 존재이니까. . .그저 니 말대로 잠
시 바람일 뿐일거야. 너 자신을 비하시키지 말고 그냥 기다려. . .반드시 제 자리를 찿아 올
꺼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그사람이. . .향락을 탐닉하다가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바보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미 그사람은 예전에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나와 함께 할 시간을 다른사람에게 써 버리고, 다른사람을 만나기 위해 날 속이는
그 사람을 배신자로 몰아 매몰차게 차버리고, 아이들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
망처럼 들면서도. . . 난 사람만 보이고 색깔이 안보여.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
어. 시작을 해도, 끝을 내도, 그건 내 몫이기 때문에 감당하고 결정 내리기가 너무 힘들어.
어떤 길이 정말 옳은 길일까? 도데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 봉순아, 나 어떻게 해
야 하는 거니?"

봉순 인 미순 의 눈을 바라보며 머리 속에서 윙윙거리며 맴도는 말들을 뱉어 낼 수가 없었
다. "인생은 모두 각자가 운영하는 거야. 그 사람의 삶의 몫까지 네가 떠맡을 필요가 있을
까?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근본과 뿌리를 버리고 자신의 이기심만을 위한 잘 못 된
길로 접어드는 걸 그냥 두고 보게는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아, 허지만 이미 네게로 돌아 올
수 없는 사람이라면 정리해.  존중받지 못하면서 잘못된 환경인줄 알면서 방치한다면 너나
아이들을 위해 좋아질 것이 하나도 없어. 그게 너와 아이들을 위한 길이야.

니 나이 적기나 하니? 이제 생의 절반을 살았다면 살은 나인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휘
둘리지 말고 빠져 나와. 그래서 웃고 살아, 지금 네 모습 정말 가슴이 아퍼. 네 마음속에 이
번 상황만 지나면 다시 회복 될 거라고 믿는 거 알아, 그리고 네가 그걸 다 수용 할 수 있
을 정도로 넉넉한 사람이라는 것도 난 믿어.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건데? 아무도 모르쟎
아. 물론 내일일수도 모레일 수도 있지만 더 길어 질 수도 있어. 난 네가 그 긴 시간 속에서
아퍼하고 힘들어 하는 거 보고 싶지 않어 정말.

다시 시작하면 넌 착하니까 분명히 너에게 좋은 색깔을 보여줄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제발 미련스럽게 그 사람의 인생을 걱정하지 말고 네 인생을 돌아봐. 한 번 뿐인 인생
인데 왜 힘들게 살려고 하는 거야. 하루를 살아도 즐겁게 보람되게 살다 가야지. 배신한 사
람때문에 아파하면서 살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니?

물론 너도 그 사람처럼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지키면서 적당히 즐길 수도 있겠지. 허지만 그
렇게 하는건 자신을 너무 초라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하는 일 아니니?  자신의
양심에게도 부끄러운 일이구, 그리고 상대방이 그렇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거, 그것도
일종의 죄악이라구. . . 차라리 더 죄짓고 살지 않도록 만들수 없다면 네가 포기해. 그리고
나서 너에게 맞는 다른이를 찿아. 굳이 새로 시작하고 싶지 않거든 그냥 니 일을 찿던가. 지
금처럼 네 남편과 함께 하는 그런일 말고, 너를 키워줄 그런 일. . . 어쨌든 넌 지금 당장은
그 사람과 헤어진다는 건 내가 보기엔 힘든 것 같으니까, 세 번의 기회를 준다 생각하고 그
시간동안 널 위한 투자를 해, 만약의 경우 홀로서기 할 준비를 하라는 거야." 봉순은 미순에
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봉순은 미순에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고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순에게 남편과 헤어진
다는 건 죽음과도 같은 일이라는 걸 잘 알기에 , 그들이 헤어진다는 건 아무죄도 없는 아이
들에게 또다른 죄를 짓는 일이 되겠기에, 어쩌면 용서를 통한 구원의 길이 가장 올바른 해
결 방법 일수도 있기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