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덕은 지금 공장과 붙어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출판사에서 자신의 일을 취재하러 나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 손님은 그동안 자신이 키우고 꿈꿔온 패션에 대한 주관과 나만의 생각들을 듣고 싶어 할 것이었다.
나름대로의 셈풀과 설명을 위한 자료들을 준비하며, 가게에 있을 아내 미순에게 전화를 걸
었다.
"나야, 오늘 손님 오기로 한 거 알지? 시간이 다 되었는데 당신도 가게는 미스리한테 맡기
고 잠깐 건너오지 그래?"
"저까지요? 됐어요. 당신 취재하러 오는데 제가 뭐하러요. 당신이나 손님 대접 잘 하시고 하
고 싶은 애기 빼놓지 말고 차근차근 다 하세요,"
"안돼, 당신이 와야지. 나 혼자는 싫어. 빨리와 알았지? 기다리고 있을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상덕은 아내의 당황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자상하면서도 대범하고 속이 깊어서 헤아리기 힘든 사람. 언제나 자신을 아이 다루듯하며
일일이 챙겨주는 아내는 피터펜의 웬디 같은 여자였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과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어 남들에게 곧잘 속아주고 어리숙하게 구는 것이 불안하기도 한 귀여
운 여자. . .
어떨땐 아들녀석과 막내딸 보다도 더 어린아이처럼 굴어 아이들조차 엄마를 챙겨야 한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여자. 그 여자와 함께 해 온 지금까지의 생은 얼마나 따듯했던가, 그
리고 함께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상덕은 내심 아내가 고맙다는 생각을 하며 쇼
파위로 걸터 앉았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대조출판에서 나온 한 우희예요. 사장님 맞으시죠?"
카메라 가방을 옆에 들고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여자가 상덕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예.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오셨군요. 앉으시죠."
가볍게 악수 한 손을 놓으며 여자에게 앉기를 권하고 상덕도 마주 앉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외모와 조그마한 체구에 비해 당돌함이 느껴지는 설흔은 조금 넘어 보이는
그런 여자였다.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찿기가 어렵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설명을 잘 해 주셔서 금방 찿았습니다. 둘러보니 듣던 대로 선생님의 작품들은
시장물건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고품스러운 품위가 느껴지네요. 이 것 들이 셈플인가
보죠?"
"예, 그것이 셈플이고 이쪽 것들은 카다로그와 자료들입니다. 필요하시면 가져가셔도 좋습니
다."
어느 정도 일에 대한 대화가 끝나갈 무렵 미순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어, 왔어. 이리로 와요."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반가운 친구를 만난 양 미순을 맞은 상덕은 우희에게 미순를 소개시
켰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편과 말투까지 똑같은 미순을 바라보며 우희가 웃었다.
"두 분 금술이 좋으신가봐요. 말투까지 똑같으시네요."
"그런가요?"
행복한 듯 웃는 미순을 바라보는 상덕의 애정 어린 눈길을 유심히 바라보던 우희가 미순에
게 질문을 던졌다.
"같은 업종에서 함께 일 하시다 보면 장단점이 있으실 텐데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신가요?"
"한가지 작품을 놓고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을 때 가장 최선의 길로 합의점을 찿아 내는 작
업이 가장 힘들구요, 응, 좋은 점은 늘 함께 있어서 서로를 잘 안다는 것과 공통의 화제가
많아서 둘이 나눌 수 있는 대화거리가 많다는 거예요."
"작품에 관한 아이디어는 주로 어느 분이?"
"네, 작품에 관한 아이디어는 주로 제가 내지만 그 아이디어를 빛나게 수정하는 일은 주로
아내의 생각과 감각이죠."
"늘 사모님의 의견을 수렴하시는 편인가요?"
"네, 대화를 하다보면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꼬집어 주는 일이 많거든요. 게다가 저
는 제일에만 몰두하지만 아내는 직원들과 매장의 손님들 상대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졌거든요. 그래서 제가 일에만 몰두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죠."
"개인적이든, 업무상이든, 두분 다툴 일이 별로 없어 보이시는데 맞나요?"
상덕을 수줍은 듯 바라보며 미순이 상덕 에게 묻는다.
"어떠세요?"
미순의 질문에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상덕이 대답한다.
"안사람이 입속의 혀처럼 제 마음을 잘 읽고 있기 때문에 다툴 일이 별로 없지요."
세 사람이 유쾌하게 웃는다.
"사모님은 사장님을 만나셔서 가장 좋은 점이 뭔가요?"
"영원한 내편, 법까지 인정해 준 나만의 사람이, 든든한 후원자로 뒤에서 울타리가 되어 준
다는 점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두분 정말 행복해 보이시는군요. 앞으로도 두분 사이 변함없이 행복하시기를 바랄께요."
작별 인사를 청하고 사무실을 나선 우희는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매고 천천히 도로 위를 걸
었다. 바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지나치며 천천히 택시 정류장으로 온 우희는 마침 자신
의 앞에서는 개인택시에 올라탔다. 오늘 만난 두 사람은 남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일는지 몰라도 우희 에겐 가식적이고 속물처럼 보였다. 아내를 믿고 사랑하는 남편, 남편
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수 잇는 아내. 함께 일하면서 공유하게 될 성취욕과 많은 대화 둘
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서로간의 신뢰와 사랑. 도데체 그런 것들이 있기나 하단 말인가. 그런
데 그들은 마치 그들이 그런 것들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착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아내의 말이 우희의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영원한, 내편, 나만의 사람?"
세상에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사랑을 위장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만
이 가득한 인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여자가 사랑이라 믿고 있을 남편에 대한 거만할 정
도의 믿음과 신뢰가, 아무 것도 아님을 자신은 보여 줄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이제 남편으로
부터 받게될 배신의 고통과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즐기며 또 한번의 사
랑이라는 모래성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게될 기회를 만들게 될 것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내
편이나 나만의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걸, 그 여자도 곧 알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