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834

바람 부는 동안


BY hl1lth 2001-03-30

파주의 낮으막한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의 묘소에서 봉순 은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너무나 그리워서 주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도 봉순 을 아
끼고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이건만 봉순은 아버지에게 곰살 맞거나 따듯하게 대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크고 깊은 사랑을 돌아가신 후에도 몇 년이나 흐른 뒤에야 절
절히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자신의 무딤에 봉순은 늘 가슴이 아팠다.

언제나 베풀어주시는 사랑만을 먹고살았으면서도 그 사랑에 투정하고 옹졸하게 굴었던 자신
이 그렇게도 한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봉순인 술만 드시면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짓 굴게
굴었던 아버지를 야속하게만 여겼지 그 내면에 감춰진 외로움을 안아드리지 못했던 것이었
다. 어느 날인가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우시던 아버지의 쓸쓸한 등 한 자락을
꼭 안아드리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아버지의 따듯한 사랑이 그리워 울고 있는 것이었
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일 것이다. 이제 사십이
넘어서야 그 사랑을 뼈저리게 감사하고 그리워하며 울고 있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봉순 에겐 아버지의 사랑만큼 크다 할 수는 없지만 그에 못지 않은 사랑을 쏱아 준다고 믿
었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벌써 오래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봉순 인 그 사랑을 잊지 못하고
늘 가슴 아파했다. 지금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지난 일을 후회하듯이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지난 일들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그때 내가 잡았어야 했어. 그때 내가 그 사람을 잡았어야 했는데...

울고 있는 봉순 이의 어깨의 가냘픈 흔들림을 아까부터 지켜보던 한 사람이, 기척도 없이
봉순의 뒤로 다가가 봉순의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눈물이 흐른 채 뒤돌아보니 거기엔 뜻밖
에도 철우 가 서 있었다. 뜻밖의 철우의 등장으로 당황하는 봉순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잔
듸가 곱게 덮여있는 무덤에 절을 한 철우는, 봉순과 나란히 무덤 앞에 앉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봉순 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오고 싶어서. . .
근데 너야말로 여긴 왜왔어? 명절이나 벌초 때도 아닌데. . ."
"나, 나는 가끔 이곳에 아버지 뵈러 오곤 해, 그냥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마음
편안하거든. 근데 정말 뜻밖이야 네가 여기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어쨌든 우리 아버질 기
억하고 찿아 주는 사람이 있다니 . . . 정말 고마워."

"아저씨가 옛날에 우리들한테 참 잘 해 주셨쟎아, 특히 너한테는 유별나게 자상한 분이셨구.
나한테, 너를 잘 부탁한다고 하시며 많이 사랑해 주라고 하셨던 거 생각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내가 너무 죄스러워서 많이 괴로웠어. . . 여러가지로 아저씨께 마음 속에 묻어 둔 이
야기도 하고, 옛날 너한테 못 할 짓 한 거 사죄 드리러 왔어.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거든, 근데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내가 운이 좋은 놈 인가봐."
봉순은 철우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었구나, 아버지가. . .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때 너를 잃은 건 내 인생 최고의 실수였어. 상황을 좋지 않게 만든 것도 나 인줄 알아,
그러면서도 용서하지 않고 날 떠난 널 나 역시 용서할 수가 없었어. 허지만 이제 좀 알 것
같아, 그때 네가 얼마나 날 사랑했고 사랑이 컸던 만큼 배신감 또한 그에 못지 않았으리란
걸. 그 땐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날 용서해 줘."

"새삼스럽게 무슨 이야기야. 다 지난 이야긴데. . . 그리고 그런 게 지금 무슨 소용이 있니.
다 잊어 그냥 다 잊으라구. . . 그리고 지금 네 사람한테 잘해. . . 그것이 널 어렵게 떠났던
날, 또다시 배반하지 않는 일이야."
봉순 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을까봐 필요이상으로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니?"
"아니, 나 역시 그때 널 잡지 못했던 걸 가끔 후회하기는 해도 지금 와서 뭘 어쩌겠니. 서로
인연이 아니였던게 아닌가 싶어. 사람이라서 실수도하고, 용서 못할 것처럼 독해지기도 하
고, 다 그런 거지 뭐, 그냥 잊어. 나도 잊었어."
뭔가 애기하려는 철우를 무시한 채, 봉순 이 천천히 철우 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미순이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니?  미순의 자수로 미순이 범인이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미
순인 절대 아니야. 그애가 무슨 일로 경찰서까지 가서 자신이 한 일이라고 말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그 앤 아니야. 날 믿어도 좋아. 다시 수사해 줘."

"나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 다시 처음부터 하고 있어. 봉순아, 너 김 상덕씨와는
어땠니?"
"뭐가?"
"응, 미순 이와 친한 만큼 너도 그 사람을 잘 알 것 같아서,"
"물론 잘 알지. 거의 강산이 두 번 바뀔 정도로 오래 알고 지난 사이니까. 그 사람, 참 자기
와이프 복은 타고난 사람이었어. 어쩌면 미순인 그럴수 있었을까? 사랑 하나면 뭐든게 된다
고 믿는 젊은 사람들, 대부분 어려운 현실 속에선 방황하고 후회하고 원망하기 마련인데 미
순인 늘 처음 같았거든. 내가 옆에서 보기에 답답할 정도로 말이야.

김 상덕 그 사람은 한마디로 무능한 사람이었어. 내 입장에선 미순이 남편이라는 사실 외에
는 볼 게 없는 사람이었거든.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뭔가에 늘 몰두하고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위선이야. 자신의 무능함을 자신이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허락
치 않아서 그저 나는 열심히 살지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라고 자신도, 남도 믿게끔 열심
히 일에 매달렸을 뿐이지. 일의 결과가 없다는 건 뭔가 잘 못 된 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걸 바로 잡지 못하고 계속 유지한다는 건 고집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무능해서라고 난
생각해. 겉으로 보기에 동대문에서 장사도 하고 나름대로 작품도 발표하고 하니까 남들은
잘 나가는 줄 알고 있었겠지만 가게 운영에서 버는 돈보다는 까먹는 돈이 더 많았고, 그걸
충당하기 위해 미순이가 무척 고생했어.

돈 되는 일이라면 모든 하면서도 힘들단 내색 않고 생활을 거의 꾸려 나갔으니까.
어쩌면 십수년을 살면서 자기 와이프에게 안정된 가정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제대로 배려
해 준 일이 없는 그 남자가, 그처럼 대접받고 살 수 있었던 건지. . . 난 미순 이가 바보인줄
알았어. 남자의 몫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생활을 맡아 하면서 몹시도 고단하고 힘들
어서 짜증이 날법도 하련만, 늘 한결같이 그 남잘 사랑하다니 이해하기 힘들었지. 물론, 남
자가 힘들땐 여자가 도울 수도 있겠지. 허지만 돕는 것과 전적으로 맡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으로 남자가 만드는 건 좀 다른게 아닐까?

어쨌든 그 앤 정말 헤아리기 힘든 큰사랑을 지니고 살았어. 돈이 없어도 빈곤한 티가 나지
않게 늘 맑고, 힘들어도 어디서 그런 정열과 힘이 솟아나는지 늘 웃고 다니고. . .
아이들에겐 얼마나 엄하면서도 자상한 엄마였는지. . . 그것뿐인 줄 아니?  자기도 코가 석
자면서 시댁에 뭔일이 있으면 열일 제치고 마음 쓰는 것 보면. . 어떨 땐 보고 있는 내가 화
가 나더라니까. 그래도 김 상덕씨는 미순에게 염치없는 인간이었다는 걸, 자기 자신만 모르
고 사는 것 같았어. 아니, 어쩌면 인정하면 자신이 더욱 구차해 질까봐 모르는 척 했을 뿐일
지도 모르지만. 어떨 땐 미순이가 믿고 있는 그 남자의 사랑이라는 것이 진실일까 의아했었
어.

내가 아는 상식으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 여자가 그런 고생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게 될 것 같지가 않았거든. 어쨌든 그 남자. 진짜 미순이를 사랑 한 건지, 그냥 이용한 건
지, 그 건 그 남자 자신만이 알겠지. 그래도 그 남자의 무능을 미순이 덮어주고 카바해 준
덕분에 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 아니, 나쁠 이유가 없었겠지. 김 상덕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여자였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스러웠던건, 상덕씬 무능했지만  미순에
게는 참 자상하게 굴었어. 옆에서 보는 난, 그래도 양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군. . . 이라
고 생각 했을 뿐이지만 미순인 그걸 사랑이라 여기며 살았었구. 허지만 일년 반전부터 그
여자를 알고 난 후의 김 상덕, 그 사람은 무섭게 변하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