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틀후 -
영미를 만나고 돌아와서 난 이틀동안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그저 지나간 일기장들을 들추어 보거나 영미를 만나던 때부터의 일들을 하나씩 회상하는것이 내 머리가 하는 전부였다.
그녀의 갸날픈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어울리지 않던 보석반지며 그녀가 탔던 중형차에 나란히 앉았던 나이든 남자의 뒤통수가 영 잊혀지지 않았고 아직도 준하의 생일을 핸드폰 번호를 쓰고 있는 결혼한 영미에 대한 생각들이 온통 내 머리속을 뒤흔들어 둔것이다.
집안에 담배란 담배는 모조리 피워 버리고 나서야 난 머리를 흔들어 많은 생각들을 털고서 외출준비를 했다.
벌써 몇끼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담배와 물만 먹었더니 속도 쓰리고 머리도 어지럽다는것을 난 이제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집에서 무언가를 챙겨서 먹는다는것은 귀찮고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일이기에 난 서둘러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 계절에 차가운 냉수를 뒤집어 쓴 기분은 차라리 시원하게 느껴졌다.
머리속을 미지근하게 자리잡고 있는 많은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된 모습이 되어 주는듯도 했다.
차를 몰고 무작정 많은 차량들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틀간 많은것을 생각하고 잊고 있었지만 세상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핸즈프리를 이용해서 전화를 걸었다.
차안에 신호가는 소리가 대여섯번 울릴즈음에 효영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낮잠이라고 자고 있었는지 조금 늘어지는 목소리...
[효영아 나야... 유리...지금 바쁘니?]
[엉...유리구나...아니 바쁘진 않아...몸살끼 있어서 잠좀 자고 있었어...]
[지금 좀 나와라...내가 원효로 쪽으로 갈께...아마두 한 30분쯤 걸리면 될꺼야...
거기 밥집 어디가 괜찮지?]
[너 아직도 식전이니? 음...거기 용호정 이라는 한식집에 좋던데 그리루 와...30분이면 나도 나갈수 있을거야...밥값은 네가 내는거지?]
효영은 의례히 얌체짓이다.
[응 알았어...빨리 준비하고 와]
[그래...알았어]
용호정에 들어서니 시간은 예상보다 오래 걸려서 50여분이나 걸렸다.
아마두 효영은 날 보면 또 잔소리를 하것이다. 다른건 몰라도 효영은 약속시간 지키는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여자분 한분 와 계실텐데요... 정효영이라구요...] 들어서니 반기는 직원에게 말하니 한쪽 구석의 방문을 가르킨다.
[이쪽 방입니다. 오시죠]
안내를 받아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효영은 도끼눈으로 날 반긴다.
[차라리 시간을 집지 말던가...뭐니? 자는 사람 깨워서 불러내고는...]
하고 말하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얼굴이 왜그래? 어디 아펐어? 반쪽이네? ] 맞은편에 앉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시선을 떼지 못한다.
[아냐..생각할게 있어서 몇끼니 건넜더니 그런가 보다..]
눈치빠른 효영이가 놓칠리 없다.
[무슨 일인데? 준하씨 일이니?]
난 크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이건 준하의 일중에 한가지였다.
하지만 또 어쩌면 더이상은 준하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냐...우선 나 배부터 채우자...쓰러질거 같아...따끈하고 맛난거좀 먹자...]
난 몸을 옆으로 해서 등을 벽에 기대었다.
정말 쓰러질거 같이 갑자기 어지럼증이 심하게 왔다.
[그럼 도데체 뭐야? 왜이렇게 망가져 보이니? 알았어. 일단 음식 시키고 그담에 말해봐...]
효영은 전골정식을 시키고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난 또 담배를 습관처럼 꺼내물었고 효영은 어김없이 담배를 휙 채어갔다. [뭐니? 너 밥도 몇끼나 굶고서 계속 담배만 피운거야? 그러니 얼굴이랑 몸이 그모양이지... 무슨일인지는 모르지만 제발 이 담배좀 피우지 마...얼마나 해로운데...]
난 찌그러진 웃음을 웃어 보이고 담배갑을 다시 백속에 넣었다.
그래...효영인 담배를 싫어하지...
한상가득 음식이 차려지고 난 모래알이라도 가득 들은듯이 깔끄러운 입안으로 쉴새없이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었다.
음식들은 따뜻했고 내 거친 입안에 느껴질만큼 맛있는듯 했다.
효영인 자꾸 날 살피느라 먹는것 마저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효영은 내가 모든 음식을 다 먹기전엔 질문하지 않을꺼란걸 알고 있다.
그녀는 배려가 깊은 여자니까...
[영미에게 전화가 왔었어....]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매실차가 한잔씩 주어졌을때 난 효영에게 말했다.
[영미가 전화를 했더라구...행복하냐구...]
효영은 눈을 쟁반만하게 뜨고 있었고 아직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했는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미를 만났다.... 겉모습은 분명히 영미던데 눈빛은 예전에 영미가 아니더라...] 내 말은 독백처럼 방안에 울렸고 효영은 아직도 아무말 없었다.
[ 그리고 영미는 커다란 보석반지를 끼고 있더구나... 그 길고 갸날픈 손가락에 말이야...] 난 마치 암기한 성경구절이라도 외우듯이 효영에게 말하고 있었다.
[ 그리고 영미는 결혼했다고 말하더라...
그리고 남편이 기다린다고 가야 한다고 말하고는 나이든 남자가 탄 기사딸린 중형차를 타고 사라졌어...]
순식간에 말하고 나는 매실차를 한모금 입에 물었다. 입안 가득히 매실향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