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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물은 먹어도 되잖우? 물이야, 밥 아니라구우. 엄마.....아부지이!"
이젠 들이미는 물잔을 밀어칠 기력도, 의욕도 쇠잔해진 듯 형자는 경희가 입술까지 대준 물잔을 그냥 그렇게 대고만 있으라 한 채, 입술을 달짝해 보지도 않았다. 아버지 두식은 간경화때문에 10년넘게 끊었던 담배를 벌써 두갑째 끌러놓는 참이다.
경숙은 경희손에서 거칠게 물잔을 뺏어 바닥에 내려놓으며 털퍼덕 자신도 무너지듯 앉아 버렸다. 향불연기 너머로 아른거리는 동생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는 동생의 얼굴이, 시선을 줄 때마다 그렇게 또 한번 아프게 다가들었다.
"흐이구.....흐이구......"
저 깊은 창자 속에서부터 끄집어 올리느라 힘이 들 수 밖에 없는 듯, 언제나 엄마 형자의 울음보는 신음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흐이구.....흐이구....., 성국아....성국아....."
그리고는 으레 또 하루도 얼굴 안보면 잠을 설쳐야 할 정도였으면서도 반년 넘도록 불러보지 못했던 아들의 이름을 부르기 마련이다.
"그래.....그래 갈려고.....이 어미 얼굴 안본다 했냐.....이 자식아.....이 자식아......"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통곡을 거듭하던 형자의 목소리는 이제 거친 쇳소리가 되어 그 애절한 울음으로 토해내던 대사들도 어느덧 기운잃은 중얼거림으로 변해있었다.
"경주하고 경아.....왜 안...오냐, 아직...."
벽에 하염없이 등을 기대고 앉아 웅크리고 있던 두식이 늘어진 담뱃재를 털 생각도 않고, 경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떻게 벌써와요..... 아침이랑 밤이랑 거꾸로예요, 거기랑 여기는.
비행기 표도 구해야 하구.....또 경아는...."
"그러게...딸자식은 아무 소용없다는 거다....그러게...."
경희는 울컥 말을 이으려 솟구치듯 힘이 들어가는 어깨를 이내 떨궈버렸다. 지금은 아주 좋은 말만, 아주 따뜻한 말만 골라서 해도 그 어떤 위안이 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다는 것쯤 경숙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 소용없는 딸자식.....
귀한 아들을 위해, 동생을 위해 자기 인생 무조건 내버릴 순 없다고 훌쩍 떠난 언니와 아래로 그 귀한 아들 물어온 복덩어리라 다른 자매들과는 달리 귀염을 많이 받고 자란 막내. 워낙 공부를 잘한터라 결국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경아가 왜 그리도 공부에 매달렸는지 다른 자매들은 알지 못했다.
경아는 자신이 받은 부모의 은혜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아들이 너무 귀하다보니, 아들 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곁다리로 어쩌다 적선받듯 받게 된 사랑이었다며 머리가 크고 나서 쓴 일기장에, 속은 인생이니거짓 사랑이니 하며 꽤 구슬픈 구절들을 늘어놓은 것을 경숙은 본 적이 있었다. 경아는 그 거짓사랑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당당한 독립을 원한 것이었다.
유학떠나고 한 1년간은 꼬박꼬박 한국에서 생활비가 갔지만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일을 시작했으니 돈은 안보내도 된다고 소식 보내온 이후로는 한참을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러다 덜컥 얼굴만 우리랑 비슷하다는 중국계 미국남자랑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온 게 또 1년 쯤 전이고 또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 감감 무소식이 언니, 경주는 벌써 15년째다. 언뜻 잘살고 있다는 요지를 담은 짧은 편지나 이사할 때마다 바뀐 연락처를 경숙앞으로 전해오며 핏줄의 고리만은 끊지 않으려 했을 뿐,언니 경주는 한번도 한국에 들른 일이 없었다. 돈이 많은 부모였지만 아들에게 누가 될까, 아들이 주눅들까봐 공부를 잘했으면서도 대학을 못 간 언니의 한은 투정같은 경아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것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언니, 경아, 성국....부모곁을 떠나고 소식을 주지 않는 자식들이 벌써 셋인 셈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밀쳐놓았던 큰언니야 그렇다 쳐도 경숙의 눈에도 차별받게 사랑받는다 싶던 경아와 성국마저.경숙은 새삼 또 한번 성국의 사진으로 눈길을 보낸다.
"오긴....온대냐?"
두식은 늘어진 담뱃재를 기어이 그대로 바닥에 떨구며 한숨인 듯 넋두리인 듯 말?다.
"와요. 온댔어요. 동생인데.....어떻게 안와봐요?"
울먹이던 경희가 급기야는 짜증을 섞어 뱉어놓았다.
경숙은 슬쩍 경희의 팔을 자신의 팔꿈치로 찔렀다. 경희는 물잔을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경아는....못 올거예요. 아기가....오늘 낼 한대요.....그 몸으로 어떻게 와요?"
"그 년!"
넋나간듯 멍하게 신음소리처럼 울고만 있던 형자가 느닷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떨었다.
두식도 초점없던 눈을 들어 형자를 올려다보았다.
경숙이 따라 일어날 겨를도 없이 형자는 마루아래 흩어진 신발을 화다닥 줏어 모아 발에 꿰고 있었다.
"엄마....어디가, 어딜 가려구우?"
경숙이 부리나케 맨발로 달려나가 형자를 말렸다.
"그년...그년 잡아다....요절을 내야....요절을 내야 돼. 암."
"그 몸으로 지금 어딜 간다구 이래!"
"비켜! 이 년아. 그 여시같은 녀언. 우리 아들 잡아먹은 그 여시같은 년하고 그 에미를.....내 손으로 요절을 내야..."
"엄마, 지금 그 쪽도 의식이 없는 환자야, 환자. 이러지 마, 엄마아!"
거의 하루동안 물 한잔도 입에 대지 않은 형자였지만 경숙은 형자가 밀치는 힘에 그대로 한걸음은 뒤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막 들어서던 경희가 둥그래진 눈으로 형자를 또 막아섰다.
"엄마, 왜 이래. 진정해요. 또 혈압 올라가잖아아!"
"비키라니깐, 왜 이래. 이년들이....성국이를 그냥 이대로 보내순 없다. 안되지, 암. 안되고 말고.내 이년들을 잡아다 성국이 가는 길에...."
"고만두지 못해애! "
경희마저 중심을 잃고 밀쳐 넘어지는 가 싶었는데 두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형자는 멈칫하고 서서 두식을 올려다보았다.
"고만하라구....고만! 고만!"
발을 쾅쾅 구르며 역정을 내는 두식은 온 몸을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당신은....그럼.....성국일 이대로 보내자구...?"
형자는 주름져 일그러지는 얼굴에 굵은 눈물을 떨구며 울먹였다.
두식은 마루에서 내려와 형자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이 여편네야....이 한심한 할망구야....성국이가....성국이가 그걸 바라것어....?"
형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뻔히 두식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눈물은 하염없이 솟구쳐대고 있었다.
그 눈을 그대로 또 기운없이 성국의 사진으로 옮겨놓는가 싶더니 형자는 두식의 팔에 무너지듯 매달렸다.
"그래도.....어떻게....어떻게....그냥 두라구우.....내 속이 이렇게 타들어가는데 어떻게....!성국아아....성국아아아!"
"엄마....엄마...."
경희도 그런 형자에게 다가들며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경숙은 형자를 다시 마루로 올라가 앉혔다. 형자는 앉은 자리에서 무릎으로 기어 성국의 사진을 손에 잡아 들었다. 사진을 어루만지다가 가슴에 꼭 품었다.
"가지 마라....가지 마라, 아가.....그냥 이렇게 엄마 품에서 살아라....아가...내 아가...."
앞뒤로 몸을 희미하게 흔들어대며 형자는 자장가를 부르듯 같은 말을 계속 읊조리기 시작했다.
흡사 정신나간 사람처럼, 흡사 성국이 가는 길을 따라 갈 사람처럼 형자의 모습은 향불옆에서 같이 어슴프레 멀어져 보였다.
경희는 형자를 뒤에서 안은 채 같이 흐느끼고 두식은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작은 사장님, 정아.... 할머니 오셨어요."
밖에서 문상객들을 살펴주러 같이 와 있던 미스 임이 들어와 경숙에게 알렸다.경숙은 무너지는 가슴을 추스리고 신을 찾아 신었다.
"엄마....시어머니 오셨다네요...."
형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경숙은 눈물을 훔치며 영안실 밖으로 나갔다. 시어머니는 언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영안실 바깥 복도를 서성거리는 사이에서 경숙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야 했다.
문득 저만치 창문옆으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떨어지는 저녁햇살이 불그레 내들이치는 창문가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서서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우는 듯 섰는 그 여자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경숙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때처럼 손가락 하나에도 넘어져 버릴 듯 하늘거리며 서 있는 여자는 분명 그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