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를 내려놓고 영신은 둘렀던 앞치마를 끌러놓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화장대 서랍에서 시장 갈 때 드는 손가방을 꺼내 들고 다시 거실로 나온 영신은 미처 치우지 못했던 유리조각을 조심스레 걷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액자 속에 들어 있던 사진을 손가방에 집어넣었다.
어느새 빗줄기는 제법 굵어져 영신이 받쳐든 우산 위에서 토닥토닥 소리를 냈다. 차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상가가 시작된다. 비디오 대여점, 만화가게, 세탁소, 조그만 슈퍼, 야채가게, 생선가게, 제과점, 정육점.....있는 건 다 있다. 작지만 큰 세계다.
영신이 달리 짬내어 치장하고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멀리 나가지 않는 것도 이 세계에 모든 게 다 들어있어서다. 성국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르던 세상이었지만 이제 영신은 이곳, 이 작은 ‘나라’에서 자라고 이곳에서 사랑하고 이곳에서 행복하려 한다.
상가 중간 쯤 있는 정육점을 막 지나려 할 때였다. 정육점 주인 여자가 문을 열고 아는 체를 했다.
“어, 오늘은 두 번째네. 비도 오시는데.....”
대답대신 영신은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이고 옅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무슨 날인가 봐....”
고기 살일이 없는 날도 한 번도 영신을 그냥 지나치게 한 적 없는 아주머니다. 성국이 쇠고기보다는 돼지고기를 좋아해 일주일에 한 번정도, 돼지고기 불고기감으로 한근씩 끊어가긴 했지만 정육점 여자는 으레 자주 오는 손님과 주인사이에 오갈 수 있는 몇마디 인사로 만족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예.....어머니 생신이라서요......”
“어머니?”
정육점 여자는 못내 놀라는 기색을 흘리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무슨 어머니.....시어머니? 친정엄마?”
영신은 한걸음 영신에게로 다가드는 통에 가게 처마를 빠져나온 여자의 머리에 우산을 나눠주었다.
“가만....시어머니고 친정어머니고 모두 서울 안 사신다 그러지 않았나?”
“예...대전사세요, 친정어머니.....”
“그럼, 새댁 친정엄마가 대전에서 올라오시는 거야? 생신상 드시러?”
“예....”
“이 비오시는데 힘드시것다, 오시려면.”
“그이가 모시러 갔어요. 그래서....”
“히야, 새댁 친정엄마 생신 한번 거하게 치르시네. 사위가 모시러가고, 딸이 아침 저녁으로
시장보러 나오고.”
부러운 듯 희한한 듯 정육점 여자는 입을 삐쭉, 고개를 갸우뚱해가며 쉽게 그 호기심을 놓을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영신은 그만 마음이 바빠졌다. 이젠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막 정육점 안으로 들어가는 손님을 보고서도 그 여자는 영신에게 하던 목소리와는 자못 색이 다른 소리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손님’ 까지 하며 영신을 놓아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아들은.....없나부지? 딸네 집에까지 와서 생신치러야 하시는 걸 보면....”
“예....저 혼자예요.”
“그으래애? 무남독녀 외동딸이네, 그럼. 생신상 차려 드려야지, 그렇게 되면. 암.”
먼저 들어간 손님과 동행인 듯한 또 한사람의 여자가 저만치서 달려와 ‘아직 안 샀어?’ 하며 정육점 문을 밀고 들어가는 걸 보고 그제서야 정육점 여자는 영신을 놓아주는 게 못내 아쉬운지 시선은 계속 문밖을 놓지않고 엉덩이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양반한테 우리집 꽃등심 한번 드셔보시라 그래. 돼지고기에 비할라구.”
한번도 놓치지 않고 되풀이하는 말을 결국은 쏟아놓고 정육점 아주머니는 문을 닫았다. 영신은 문이 완전히 닫기는 걸 보고 발걸음을 떼었다.
-이 작은 세상에도 참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영신은 길 건너 다른 상가 정육점보다 영신에게 고기 인심도 후한 마산댁(정육점 옆 야채가게 아주머니는 그렇게 불렀다)이 호들갑스럽긴 해도 그리 싫진 않았다. 생각해보면 정육점에 들를 때마다 언제나 그곳엔 주인이며 손님이며 섞여 한 조각씩 먹을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순대, 떡볶이, 찐 고구마, 백설기, 김치 부침개.....
얼핏 듣기론 주인여자가 사들인 게 아니라 어디 어디서 문을 연 개업기념으로 누구누구 입이 심심해서 가게 비워놓고 부리나케 집에까지 가서 장만해 온 걸로,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들이었던 거 보면 상가에서 인기좋은, 그 인기가 손색없게 인심넉넉한 아주머니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틈에 영신은 상가끄트머리에 다다라 있었다. 상가 그 끄트머리에는 간판 맨 끝 글자인 ‘자’자가 어쩌다가 그랬는지 원래의 검정색을 잃어버려 멀리서 보면 ‘선물상’이라고만 알아채게끔 되어있는 선물의 집이 하나 있었다. 영신에게 여유돈만 있다면, 새침떼기처럼 보이는 젊은 주인 아가씨와 좀 더 안면을 익히게 된다면 꼭 그 끝 ‘자’자는 영신이 다시 까맣게 칠해주고 싶을 정도로 예쁜 물건이 많아, 들를 때마다 예쁜 마음이 되버릴 것만 같은 집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바로 입구에 우산을 꽂으라고 준비해놓은 듯한, 불그런 그 흔한 양동이에 분홍색 큼지막한 리본을 둘러놓았다. 마침 있던 손님의 무슨 선물을 포장하느라 여념없는 주인 아가씨는 입으로만 ‘어서오세요’했다.
영신은 안쪽 제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크고 작고, 신기하고 귀엽고, 멋있고 아름다운 액자들이 제각각의 키높이로 진열되어 있었다. 영신은 손가방에서 사진을 꺼내 먼저 맞을 만한 크기를 눈여겨 보았다. 원래 넣어두었던 액자가 정사각형이라 양 옆을 꽤 많이 쳐내었기 때문에 우선 맞는 크기가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정말 운좋게도 앞머리 일미리만 잘라내도 ‘머리잘랐구나’할만큼 눈썰미 좋은 성국도 눈치채지 못하게 깨진 것과 똑같은 액자가 하나 남아 있었다. 퇴근하다 돌아오는 길에 영신을 기쁘게 해 줄 무언가를 찾던 성국의 눈에 이 ‘선물상자’가, 이 액자가 눈에 띄었었나 보다. 다행이었다.
영신은 액자를 들고 주인여자에게 다가갔다. 막 아까 그 손님을 보내고 남은 포장지를 정리하고 있던 주인여자는 영신의 손에 들린 액자를 보더니 계산대 아래를 뒤적였다.
“아니예요. 선물할 거 아니니까 포장은 안해도 되겠네요.”
주인여자는 ‘아, 녜’하고는 잘 안 보여주던 미소를 지어보였다. 영신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안녕히 계세요’에다가 ‘많이 파세요’까지 덧붙여 인사를 보냈다.
조금 더 굵어진 빗줄기는 집으로 향하는 영신의 발길을 더욱 바쁘게 했다. 가방안에 잘 넣고서도 혹여라도 사진이 젖을까 영신을 가방을 가슴에 보듬어 안고 종종걸음질을 쳤다.
“야채식빵 나왔어요.”
빵집 남자였다. 이미 지나친 영신을 고개를 내밀고 서서 불러세웠다. 영신은 뒤돌아보다가 앗차싶었다. 버터바른 야채식빵과 우유넣은 커피로 차린 아침상을 가장 반기는 성국이었다.
어떤 때는 시간늦어 6시쯤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야채식빵이 나오면 일부러 슬라이스 안된 통식빵으로 사와서 앉은 자리에서 그걸 뜯어먹으며 저녁을 해결하기도 할만큼 성국은 야채식빵을 밝혔다. 아침에 빵가게에 들렀을 때는 이미 그 빵집 최고 인기품목이기도 한 듯한 야채식빵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헛걸음을 하고서도 엄마 생신상을 차리느라 분주한 하루속에서 영신은 야채식빵을 다시 사야한다는 다짐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 다시 올게요.”
다시 돌아서려는데 빵집 남자는 아예 문밖으로 나오는 기색이었다.
“어, 왜요? 오실 줄 알고 고로께 하나 넣어서 포장 딱 해 놨는데.....”
뒤돌아보지 않아도, ‘어, 왜요?’ 이상한 일도 다 있네 하면서도 빵집 남자 표정은 얼굴 가득 웃음이라는 것을 영신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웃는다, 그 남자는.
영신은 쭈뼛거리며 뒤돌아서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700원이 모자라요.....”
빵집 남자는 역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 더 큰 웃음을 보태고야 말았다.
“하이고, 7000원 모자라도 돼요. 어여 들어오세요.”
빵집 남자는 빗속으로 영신을 데리러 왔다. 그리고는 영신을 빵집으로 들이밀며 그 안에다 대고 크게 소리쳤다.
“김아! 외상드려라.”
어딜 가려던 길이었는지 빵집 남자는 ‘그럼’하고 고개를 약간 숙여보이며 또 웃고는 우산을 받쳐들고 가게밖으로 나갔다. ‘김’이라는 아가씨는 빵집 남자의 말대로 식빵 하나만 넣었다고 보기에는 좀 두둑한 봉지를 내주며 말했다.
“아저씨가 빵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아가씨....., 아니, 참 아주머니시던가?
아무튼 손님꺼 제일 먼저 챙겨놓으셨어요. 우리 야채식빵 최우수 고객이시라구.“
영신은 조금 얼굴이 달아올라 ‘내일 꼭 갖다드릴께요’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이제는 우산을 받쳐도 바지가 젖어들 만큼 빗줄기는 거세져 있었다.
영신은 손가방을 가슴에 꼭 껴안고 발길을 재촉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