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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BY noma 2000-12-14

12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게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책방이 끝난후 언니집에서 자는 민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까지도 현수는 들어와있질 않았다.
그와 그렇게 싸우고 난후 그녀는 계속 민우방에서 잤다.
그가 그녀가 잠이 들었을 것 같은 시간에 일부러 맞춰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굳이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1월이 얼마 안남았을 즈음 책방이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단골로 잘알고 지내던 분이었는데 늘 그녀의 책방 분위기를 좋아했고 아이들이 웬만큼 커서 부업으로 하고 싶어했는데 그녀가 가게를 내 놓았다는 얘기를 듣고 좋아라 찾아오셨다.
겨울이라 가게가 안나갈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방학이라 아이들이 도와줄수 있을 때 가게를 인수받고 싶다는 말에 그녀는 서운함을 느낄 시간도 없이 일을 진행시켰다.
계약을 하고 일주일 정도를 가게 운영과 고객관리 문제를 새로운 주인에게 조언해주며 같이
꾸려 나가기로 했다.


그날 저녁 재이는 늦게까지 현수를 기다렸다.
현관 문을 따고 들어온 그는 쇼파위에 앉아 있는 재이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하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와 앉았다.
[ 책방이 나갔어... 한 일주일정도만 도와 주면... 나는 끝날꺼야 ]
그는 아무말이 없이 그녀를 지친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그가 굉장히 미안해하는걸 느낄수 있었다.
[ 책방을 넘겨주고 나면 ...잠깐 여행좀 다녀왔으면 좋겠어. 그동안 나를 돌아볼 시간을 한번도 가져 보질 못했던 것 같애... 늘 나하고 싶은데로만 하고 살아서 다른 사람 기분같은거 생각해보질 않았어. ... 나, 너무 이기적인 애였지? ]
[ 그런 생각은 하지마... 넌 너무 잘해왔어. 내가 너에게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른거 같아 미안하다. ]
[ 이제 그런 말은 싫어... 여행 갔다와서 우리 둘다 뭐가 잘못 됐는지 생각해보고 바로 잡을수 있으면 좋겠어... 민우한텐 미안하지만 잘 얘기하고 갈테니까 오빠도 잘좀 돌봐줘 ]


경주에서 4일을 묵고 바다가 보고 싶어진 재이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 부산으로 왔다.
경주를 택했던건 도시 전체가 문화 유적지라 이곳 저곳 옮겨다니는 번거로움없이 한곳에서 많은걸 볼수 있다는 편리도 있었지만 학창시절 수학여행으로 왔을 때 좋았던 느낌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고 싶었다.
벌써 수년이 흘러 많이 변했을꺼라 생각했는데 보존해야할 유산이라 그런지 그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전에 느꼈던 불국사의 고요함도 그대로였고 토함산을 올라가는 길도 여전히 길었다.
그녀는 예전 생각을 해서 걸어올라갔다가 결국 내려올때는 버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경주의 고요함과 서라벌의 향기가 그녀의 마음을 어느정도 안정되게 해주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수세기 전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유산 앞에서 그녀의 고민 쯤은 정말 하찮게 보였는지 몰랐다.
가벼운 마음으로 부산에 도착한 그녀는 해운대 근처 호텔에 짐을 풀고 현수에게 전화를 했다.
경주에 도착했을 때 한번 연락한후 장소를 옮기게 되면 연락하겠다는 약속 때문에 하게된 두 번째 전화였다.
간단하게 묵게된 호텔 이름과 곧 돌아갈거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불안과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여행을 떠나올 때 그가 걱정하던 일이 생각난다.
아마 그녀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지나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었다.
그의 얘기에 충격을 받고 상처입은건 사실이었지만 여기서 포기 할순 없다는 생각을 그에겐 얘기하지 않았다.
다시 학원이 끝난후 언니 집에 있다는 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이면 현수가 데릴러 오는 모양이었다.
삼촌과 숙모를- 민우는 처음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렇게 불러 그녀가 질투했던 적도 있었다.- 무척이나 좋아 하지만 그래도 재이가 보고 싶은지 어리광을 부렸다.
' 엄마, 언제 와? '라는 말에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민우를 정말 사랑했다. 처음엔 엄마를 쏙 빼닮은 아이가 부담스럽고 바라보는게 힘이 들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마음 한자리를 민우가 채워놓고 있었다.


민우를 씻겨 자기방으로 들여 보낸후 현수는 쇼파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집안이 온통 어두침침하고 적막뿐이었다.
어디선가 웃음을 가득 머금고 그의 앞에서 온갖 얘깃거리를 늘어놓던 그녀가 나타날것만 같아 그는 집안을 둘러보다 허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등뒤에서 목에 팔을 두르고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그리워지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녀가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할때 말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그는 얼마나 자신을 억제했는지 모른다.
아니 그전에 싸우고 난후 민우방에서 자는 그녀에게 내가 잘못했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그리곤 그녀를 품안에 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의 얄팍한 자존심은 용서를 구하며 상처입은 여자의 마음을 달래는
몸짓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를 떠나보낸후 버리지 못한 자존심의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그녀의 전화를 받으며 마음의 정리가 된듯한 목소리에서 이제 그를 떠나겠다는 말이 나올까봐 얼마나 조바심을 쳤는지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 아빠? ]
고개를 든 그는 문가에서 그를 부르며 올까말까 망설이는 민우를 손짓해 그의 옆으로 오게했다.
[ 아빠... 여기서 부산 멀어? ... 엄마, 아빠가 데리구 오면 안돼? ]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민우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 ...나땜에 엄마가 아빠한테 혼나는거 다 들었어... 내가 할머니네집에 가기 싫다고 한건데...
엄마가 얘기해서 아빠가 화내구... 이제 할머니네 갈테니까 엄마 데리구와 ]
그는 그동안의 얘기를 민우에게서 다 듣고 난 후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는가를 깨닫고 몸서리쳤다.
늘 자신을 불행하다고만 여기고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지려 하는건 바라보려고도 하지않은 이기심의 결과였다.
민우를 달래 방으로 들여보낸후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모든걸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알릴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