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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게 권태기란걸까, 그토록 열심이었던 책방일이 더 이상 즐거움이 되지 못하자 결국 그녀는 오전에 가게를 봐줄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동안에 짬짬히 가게를 맡기는 일만으론 그녀의 지친 마음을 쉬게 하는데 부족함을 느꼈다. 학교를 졸업하고 6년동안 책방을 꾸려 오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대학에 간 친구들이 공부나 연애에 매달려 충분히 청춘을 즐기는 일들에 간혹 마음이 흔들릴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녀가 좋아하는 책들과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녀의 마음을 잡아 놓을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진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대로 계속 하다간 책방까지도 어떻게 할것같아 잠시만이라도 떠나 있는 시간을 내보기로 한 결정이었다.
오전에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 아침겸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마실수 있는 여유를 부리며 이렇게 집안에서 뒹구는것도 커다란 기쁨임을 느끼며 앞으로 그녀가 더 즐길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우선 운전 면허를 따고 아마 이것도 그녀가 전에 따두었던 독서지도사 자격증-예전에 책방에서 아이들의 그룹지도를 해볼양으로 따두었었다.-만큼이나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화끈한 성격과 달리 차에 대한 순발력이 제로인데다 겁이 많은 그녀로서는 면허를 딴다고 해도 직접 운전을 하고다닐지는 의문이었지만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정으로 점심때 나가서 운전학원 등록을 마치기로 결심했다
토요일 오후 친구 선희의 사진 동호회에서 여는 전시회에 가기위해 그녀는 가게의 마지막 정리까지 아르바이트에게 부탁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첫날 꽃바구니를 보내긴 했지만 어젯밤 전화를 걸어 서운하다고 투덜거리는 친구를 달래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시간을 냈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니면 좀처럼 시내에 나올 기회가 없어서였는지 아뭏튼 전철이며 길거리며 사람들로 가득했다
인사동 뒷골목 조그만 전시장에 들어서자 선희의 반가워하는 얼굴을 보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동호회 회원들 소개를 받으며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웃다가 자연스럽게 그들중 한 남자가 설명해주는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을때였다.
누군가를 반가이 맞이하는 선희의 목소리에 그녀는 또 다른 친구가 왔나하고 돌아보다 무엇인가 머리를 내리치는 충격으로 멍하니 입구만 바라보고 서있었다.
[ 재이 왔네? ]
듣기 거북한 코맹맹이 소리로 자신의 앞에서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는 윤지 얼굴을 보고서야 그녀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 어?... 응... 왔어? ]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고 있을 때 곁으로 다가온 현수를 보자 그녀는 분노로 끓어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 ... 오빠 왔어? ] 자신의 귀에도 몹시 부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나오자 굴욕감을 느꼈다.
[ 잘 있었어? ]
그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이고는 어색하게 돌아서서 사진을 설명해주던 남자에게 말을 건네자 두사람도 사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미 사진도, 옆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힐끔거리며 두사람에게 시선을 보내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당장에 나서서 담판을 져야 하겠지만 여전히 현수 앞에서만은 의지대로 되지 않는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선희에게 미안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을 때우고 돌아가려 했으나 그녀는 늦게 도착한 친구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자 답답한 마음에 화장실에 가서 찬물에 적신 휴지를 후끈거리는 목덜미에 갖다 댔다.
휴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으로 흘러내리자 입고 있던 하늘색 셔츠에 얼룩이 생겼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자 거기엔 아이처럼 질투심에 씩씩거리는 못난 얼굴이 있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심호흡을 했다.
돌아가서 예전의 윤 재이처럼 씩씩하게 인사하고 나서 우아하게 자리를 떠나는거다.
그녀의 그런 결심은 그녀가 없는동안 친구들이 현수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저녁약속을 받아내 흥분된 분위기에 무너져 버렸다.
빠져나오려던 그녀의 몸짓은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현수는 그녀와 친구들을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식사와 술이 나오고 모두들 현수와의 두 번째 만남을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무르익게 하고 있었다. 그속에서 가장 어색한 두사람은 둘만의 시간을 빼앗겨 새침한 모습을 하고 있는 윤지와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현수의 태도 때문에 화가나 식사보다는 술을 더 마시고 있는 그녀였다.
그는 정말 그녀의 고백을 친구 동생의 하찮은 투정쯤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기분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화제가 어느샌가 그녀 오빠의 친구들 얘기로 바뀌자 시선이 그동안 별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던 재이에게로 모아졌다.
[ 우리 재이, 진짜 술 잘마시네... 재원이가 그냥 놔두는지 모르겠다 ]
아무렇지 않게 우리 재이라고 하는 말투에 아직도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분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 오빠가 나한테 맨날 보여준게 그것뿐인데 뭐라 그러겠어? ]
그녀의 뾰루퉁한 말투에도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 근데 재이 오빠 친구들 중에 멋있는 분들이 많은거 같은데 왜 재이는 우리를 가만 놔두나 몰라. ]
누군가가 내뱉은 한마디에 모두들 그녀를 향해 애원과 협박조의 말로 떠들어대자 술기운이 올랐는지 귓속이 윙윙거렸다.
[ 없어!... 하나도 없어... 다들 바람둥이에 인간성두 나쁘고 ...멋있는 사람 하나도 없어! ]
재이의 외침에 한순간 자리가 조용해졌다.
다시 분위기를 바꾸려고 누군가 시도를 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수가 없어
일어나 거칠게 자신의 백을 집어들었다.
[ 갈래...]
붙잡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나온 그녀는 누군가 따라 나올까봐 냅다 달렸다.
지금은 누구와도 아무 얘기도, 변명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분노와 슬픔과 허망함을 감출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왔다는걸 깨닫고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팔목을 꽉 잡은 손에 의해 돌려 세워지자 놀라 소리쳤다.
[ 뭐야? ...너 왜 이렇게 어린애같이 굴어? ...친구들한테 그게 뭐야? ]
그도 이제 화가 났는지 씩씩거렸다.
[ 나, 원래 그런애잖아...가...가서 오빠나 잘하란 말이야...가서 어울리지 않는 카사노바 흉내나 마저 내라구! ]
그녀는 그에게 잡힌 손을 풀며 들고 있던 백으로 그의 가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 내 맘 다... 알면서...알면서 ...아주 못됐어 ]
온몸에서 맥이 풀리자 그녀는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두사람을 힐끔거린다는것도 전혀 창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일어나! ... 가자 ...데려다 줄게 ]
그의 손을 뿌리쳤지만 어느새 손목은 그의 손안에 붙들려 따라붙기 힘든 빠른 걸음걸이로 인해 끌려가다시피해서 그의 차앞에 다다랐다.
차문을 열고 그녀를 밀어넣고는 거칠게 차문을 닫은 그가 돌아와 운전석에 앉고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 나, 힘들게 하지마라... 다신 이러지마...바보같은 짓이야. 재원이한테 원망 듣고 싶지 않다구 ]
[ 뭐가 바보같은 짓이야, 사랑이?... 그게 맘대로 되는 일이야?... 더 잘 알거면서... 그런 사랑 해봤으면서... ]
그의 분노에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을 본 순간 그녀는 실수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가 혹시라도 자신을 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는 두눈을 꼭 감았다.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더니 곧 시동이 걸리고 차가 출발하자 그녀는 바로 앉아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을 반성했다.
오는동안 내내 말이 없던 그가 그녀의 집앞에 다다르자 잔뜩 주눅이 들어 아무말도 않는 그녀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 ... 이제 어린애가 아니란건 인정할께...근데 난 아니야... 제발, 재이야 힘든길로 가지마...모든걸 잃는수가 있어 ]
그녀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채 그는 차문을 열어 어둠속에 그녀를 내려놓고 떠나갔다.
점심 시간에 어머니에게 불려 나갔다 들어온후 현수는 내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냈다.
방금 눈가에 물기를 머금고 문을 나가는 비서의 모습을 보자 자신에게 화가나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온후 어머니가 끊임없이 들이대는 여자들, 하나같이 요조숙녀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외모와 배경만 보고 자신을 내던지는 여자들, 한심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도 못하고 족쇄로만 다가오는 이 생활도 정리해야 될때가 된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 문득 상처받은 얼굴로 그에게 애원하는 표정으로 매달리던 재이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돌아온 일이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려하는 자신을 깨닫자 지금의 짜증을 더 부채질했다.
저녁에 동윤이 술이나 한잔 하자고 전화가 왔었는데 그곳에 가서 요즈음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얼굴이 안됐다는 손님들의 걱정에 그녀는 일일이 아무 일 없다는 인사를 하고 표정관리를 하다보니 일이 더 힘겨웠다.
예전 같으면 언니, 누나 하면서 따르는 아이들의 상담 노릇도 기꺼이 응했을테지만 요즘엔 그녀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뭔가 눈치를 살피며 아이들이 돌아가면 그때서야 후회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신차리자'를 하루종일 뇌 속에 입력시키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그녀는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 그녀는 이제 컴퓨터를 끄고 금고의 매상을 정리해 백에 챙겨넣은후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갈 준비를 했다.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 의자를 밀어넣고
조명 스위치를 내렸을 때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나자 그녀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 나야 ] 어둠속에서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다시 불을 킬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불이 꺼질때까지... ]
[ 오빠, 술 마셨어? ]
그녀는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 불을 키려 돌아서자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키지마! ...잠깐만 이대로 있자. ]
[...무슨일 있었어? ]
[음... 나한텐 항상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내가 감당할수 없는일들, 나를 괴롭히는 일들...나는 왜 그런 일들을 해야되는거지? 왜 사는거지? ...우리 재이처럼 사는게 즐거우면 좋을텐데 ]
‘ 나도 요즘은 하나도 즐겁지 않아 ’ 라는 말이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
지금 그의 모습은 너무도 상처받은 모습이어서 그가 그녀를 몰아내던 그때의 아픔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를 안아주지않으면 안될 것 같아 그녀는 그의 얼굴을 가슴에 꼭 끌어 안았다.
그녀의 두근 거리는 심장소리를 그가 들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그를 안고서 그의 상처 입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줄수 있다면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았다.
[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거야? 잘살아서 내가 마음껏 욕해도 상관없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이렇게 슬픈얼굴로 나타나서 날 괴롭히는거야? ]
[ ...미안해 ]
[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젠 안 놓칠거야....내 앞에선 그렇게 슬픈얼굴 하지 못하게 할꺼야 ]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그가 품에서 벗어나 조용히 웃었다.
[... 고마워, 넌 언제나 그렇게 씩씩해서 좋아. 후후...근데 재이야 오빠 좋아하지마. 난...아주 나쁜놈이거든.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지.나 때문에 사람들이 괴롭대 ]
[ ...사랑해. 오래전부터...난 절대 상처받지 않아. 오빠만 옆에 있어주면 ... 지금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조금씩 내가 오빠 옆에서 날 사랑하게 만들께 ]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애원하는 그녀의 눈빛을 그가 흐릿해진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자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가 움찔했지만 이내 그녀를 안고 자신을 갈망하는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의 입안에서 술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를 위로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만을 간절히 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