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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 끝없는 전화벨소리에 눈을 뜬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들자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도대체, 어젠 어디 갔다온거야? ]
동윤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어젯밤의 일까지 화풀이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모야? 맨날. 스토커같이 ]
[ 몇시에 들어온거야? ]
[ 늦게 들어왔어... ]
[ 오늘 저녁에 책방으로 갈게 ] 그의 목소리가 처음과 달리 가라앉아 있었다.
[ 됐어. 오지마... 제발 나좀 내버려둬,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으면 가서 오빠 작품들 중에서 하나 고르면 되잖아. ...인기도 많대며? ]
그녀가 화가 나서 성형외과 의사인 그를 비꼬아 말하자 잠시 그의 숨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 ...이따가 갈께 ]
전화가 끊어지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적응하기 힘들었다.
동윤오빠의 갑작스런 공격도 부담스럽고 어젯밤 자신의 행동도 부끄러웠다.
늘 현수의 앞에선 초조하고 제대로 표현조차 못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나온 느닷없는 용기가 이제는 악몽같이 느껴졌다.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자 그녀는 이제 짜증을 지나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졌다.
워낙에 밝은 성격이라 고민하는 일에 익숙지 않은 그녀였기에 자신을 괴롭히는 요즘의 일들이 힘들고 혼자서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이 너무나 외롭게 느껴져 우울해졌다.
오후가 가까워오고 학생들이 하나둘씩 밀려들어 바빠지기 시작하는데도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게 힘겹게 느껴져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 언니? ... 나, 미안한데 가게 좀 봐줘요. ...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나올수 없는 날이라서 ]
[ 알았어요 . 근데, 아가씨 요즘 바쁘네요? 나한텐 말도 못 꺼내게 하면서... 선본거 잘돼가는거 아녜요? ]
[ 그런거 아니예요 .... 그리구 동윤이 오빠 전화번호 있으면 가르쳐 주실래요? ]
그녀의 언니가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변명하기도 귀찮아져 언니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받아 적은후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버튼을 눌렀다.
간호사와 통화한후 조금 기다렸다 동윤의 '여보세요' 하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 나야, ...재이 ]
[ 웬일이야 ? ] 재이의 목소리가 뜻밖인 듯 그의 목소리는 당황했지만 밝았다.
[ 이따가 여기에 올거 없어. 내가 나갈게 ]
[ 그럴래? 그럼 우리 저녁 먹을까? 내가 데릴러 갈게 ]
[ 아니야. 저녁보다 전에 만났던데로 내가 나갈게. 거기가 편하겠어 ]
그가 들뜬 기분으로 다시한번 설명해주는 위치를 건성으로 들으며 약간 미안한감이 들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누구든 더 이상 상처가 커지기 전에 빨리 끝낼 수밖에 없다는게 그녀의 결정이었다.
퇴근을 한시간 정도 남겨두고 현수는 과테말라 지사에 보낼 서류를 다시한번 훝어본후 호출 버튼을 눌렀다.
[ 네, 이사님 ]
[ 들어와요 ]
`네' 하는 대답에 이어 곧 사무실 문이 열리며 단정한 차림의 비서가 들어왔다.
[ 이 서류좀 팩스로 보내주고 바로 퇴근해요. 난 신경쓰지 말고... ]
젊은 이사의 뒷말이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 비서는 미리 퇴근 인사까지 해버리고는 문을 나왔다.
여자들이 한번쯤 상상해보는 그런 외모에 그를 뒷받침하는 배경, 처음 이사실에 발령받았을 때 부풀었던 기대는 한달쯤 지나면서 사라져 버렸다.
사랑 때문에 모든걸 다 포기했었다는 그런 순수함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차갑고 이지적인
그의 이미지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갔다.
자신의 이사실 발령을 두고 사원들간의 불신과 질투로 인해 그의 사생활에 대한 소문들이 이어졌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않고 민첩한 일처리로 사원들의 불신을 일축시켰다.
그저 사장인 큰형의 백으로 이름뿐인 이사자리에 앉은 부잣집 망나니일뿐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타고난 감각과 추진력으로 점점 어려워지고있던 회사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 그에게 놀라움과 존경심을 보낼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냉기에 사람들은 사적인 일로는 그에게 근접할 생각을 못했다.
한가지 예외는 있는 모양었지만, 밖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니는지 거의 날마다 걸려오는 전화의 여자들은 목소리를 구분하기 힘들정도였다.
회전의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현수는 눈을 감았다.
좀전에 걸려온 재이의 친구 윤지 전화로 인해 갈등하는 자신에게 조소를 보냈다.
이제 여자는 그에게 감정이 아닌 그저 육체적인 이끌림일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예전의 그라면 경멸을 보냈을 그런 여자들의 접근들이 자신의 지친 몸을 달래주는데 놀라운 역할을 한다는게 조금 고맙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재이의 난데없는 고백이 자신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봐왔던 - 부모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아 때로는 버릇없고 거친 말투의 어린 소녀- 그가 기억하고 있던 얼굴이었다.
그 어린아이조차도 다른 사람과는 달리 어렵게 자신을 대할땐 늘 그런 대우를 받는 자신의 한계에 처량한 기분이 들때도 있었다.
평범한 가족들이 넘치게 사랑을 주고받던 그 모습이 좋아 자주 찾아갔던 친구의 어린 동생이 이제는 어엿한 여자의 모습이 되어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슬픈 뒷모습으로 떠나 버리자 가슴 한구석에서 알싸한 감정이 피어 올랐다.
점점 알 수 없는 씁쓸한 기분이 되자 그는 이러고 있는 자신에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그저 친구에 대한 우정으로 느끼는 죄책감일뿐이다를 되뇌이며 웃옷을 걸치고 문을 나섰다.
동윤은 이번에 테이블이 아닌 바에 앉아 있었다.
재이가 다가가자 그가 미소 지었다.
[ 웬지 긴장이 돼서... 먼저 한잔 하고 있었어. 불편하면 자리 옮길까? ]
[ ...응 그러는게 좋겠어. 여기도 좋지만 ]
그와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게 부담스러워져 그녀의 생각을 말하자 그는 웃으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 어제는 재미있었어? ...아르바이트가 친구들 만나러 갔다고 하던데... ]
[ 응... ]
[ 재이야 ... 내가 너무 서둘러서 니가 너무 부담스러운거 같으면 ...이제 조심할게. ]
[ 오빠...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생각이 든거야? 전에 가끔씩 봤을때도 이러지 않았잖아 ]
그녀의 물음에 동윤이 소리죽여 웃었다
[ ...그땐 니가 준비가 안돼 있었지. 얘기했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멀리 도망가려 했을걸. ]
[ 난, 오빠가 이쁜 여자들한테 인제 질려서 나한테 이러나 생각했어. ]
[ 하하하, ...나한테 너만큼 이쁜 여자는 없어. ...그리구 오빠 직업 좀 그만 무시해줄래. 난 단순히 예쁘게 해주는 일만 하는게 아니라구. 다쳐서 예전 모습이 아니게 된걸 돌아오게 해주는 일도 한다구...]
[ 알아... 요즘에 내가 너무 예민해져서. 미안해 ]
그녀를 웃으며 바라보는 그의 눈을 바라보자 오면서 열심히 생각하고 있던 말들이 입가에서 맴돌기만 하자 그녀는 초조해졌다.
오빠 친구들 중에서 특히나 그녀에게 장난을 많이쳐서 많은 화풀이 대상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편안하고 좋은 오빠였기에 이런식의 관계가 되는게 몹시 괴로웠다.
[ 밥 안먹어도 되겠어? ...오빠 때문에 요즘 마른거 아냐? ]
[ 나...현수오빠한테 ...고백했어 ]
[...무슨 말이야? ]
[...나, 예전부터 현수오빠 좋아하는거 다들 알고 있었잖아...그래서 이번에 사랑한다고 말해버렸어. 안그러면... 오빠가 또 떠나버릴 것 같아서 ]
[ ...말도 안돼...너...어떻게...]
동윤이 충격을 받았는지 술잔을 든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자 그녀는 죄책감이 들었다.
[ 나 때문에 ...니가 너무 화가 나서 이러는거라면...내가 좀더 기다릴게. 현수는... 기가 막혀.
예전하고는 상황이 달라... 재원이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꺼야 ]
[ 알아, 우리 오빠 충격이 크겠지. 근데 문제는... 오빠가 아냐. ]
[ 현수가 널 받아 들인대? ...그랬다간 그자식... 죽여버릴꺼야 ]
[ 오빠! 너무 미워하지마...현수오빠 나한테 아직...아무말도, 어쩜 날 아예 안볼지도 몰라.
...그냥 이렇게 고백만 하고 끝나 버릴지도 모르지 ]
[ 그럼 됐네. 니 머릿속에서 현수 생각만 지워 버리면 되는거 아냐? 그건 내가 할수 있어.
...오늘 일은 안들은걸로 하자 ]
그가 이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겨버리자 그녀는 슬슬 화가 났다.
[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야!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오빠랑 잘되길 바래. 그런 거 나 못해 ]
[ 왜 못해? 넌 아직도 사랑에 대해서 꿈을 꾸나 본데 현실은 달라. 철좀 들라구... 세상은 니 고집대로만 사는게 아니야. 이럴땐 재원이가 원망스럽다. 떼쓴다고 항상 다 들어 주기나 하고....하지만 난 포기못해...널 오래전부터 사랑해왔다구 ]
이제 그의 말투는 거의 애원조로 변해있었다.
[ 그래...난 원래 고집이 세지...그리고 도전을 좋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사랑받기 위해 노력할꺼야. 날 사랑하는 사람한테 아무감정없이 안주하기보단 ...난 그길을 택할래 ]
[ 너...못됐다... 가라...지금은 널 못 데려다 주겠어 ]
그가 단숨에 술잔을 입안에 털어넣으며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가슴이 아파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