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서른]... 흰눈 그리고 바람.
승빈은 잠시 환자가 없는 틈을 타 원장실로 옮겨 않았다. 출입구라
고는 환자들이 들 오고 나가는 문과 간호사들이 왔다 갔다 하는 문
밖에 없는 꽉 막힌 진료실에 앉아 있다가, 작은 창을 통해 하늘이 보
이고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 가로수들이 보이는 세상이 있어 편안
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은 두터워져 있는데, 앙상하게 겨울나
무가 되어 있는 은사시나무가 몇 일전에 살포시 내린 첫눈 때문인지
더 추워 보였다. 해마다 그렇듯이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첫눈은 그야
말로 시늉처럼 바람 따라 잠깐 흩날리다 멈추었었다.
승빈이 세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눈이 옵니다.] 라고 말해주었을
때,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던 세희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전화를
해 놓고, 아니.. 말을 해 놓고 나니 정말로 눈발이 가늘어지며 곧 사
라졌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보이지도 않았을 눈 이였다.
담배연기를 빼기 위해 작은 창문을 열었다. 뽀얀 담배연기가 빠져
나가며 훅! 하고 찬바람이 밀고 들어 왔다.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듯 했다. 한 낮에 짙은 회색빛 하늘이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함께 구
름 위에서 무엇인가 만들고 있는지 곧 많은 눈이 내릴 듯한 날씨였
다.
행인들은 잔뜩 움츠려 있었다. 바람이 스칠 만한 곳은 모두 가리워
져 있는데 겨울 바람을 향해 열려있는 유일한 얼굴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잔뜩 숙여져 있었다.
사람들을 더욱 외소하게 만드는 겨울. 없는 자에게 더욱 큰 어려움
을 주는 겨울. 맞잡은 손에서 더욱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되는 겨울.
혼자서 서글픈 가을을 지나 막연히 누군가 기다려지는 겨울. 그 기다
림이 지칠 무렵 애틋함까지 실리게 되는 겨울이다.
원장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눈길을 잡던 전화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전화기 안에 있는 세희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늘 안부가 궁금한 여
자. 잘 있는지. 힘들지는 않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식사는 잘 하는
지. 아이들은 잘 있는지.... 모든 것이 궁금해지는 여자.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잘 지네시죠?"
"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어요. 오늘은 정말로 많은 눈이 내릴 것 같
은데요? 지난번은 첫눈 치곤 너무 약소했죠?"
"후후.. 그래도 올 겨울의 첫눈이잖아요."
"그래요. 시시하긴 했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 해야죠."
"오늘 눈이 내리면 외출을 하세요. 거실 안에서 지켜보는 것만 하
시지 마시고요."
"저.... 선생님..."
"네?"
"눈이 많이 오면...... 여행을 갈까 해요....."
"아! 네. 여행 좋지요. 어디로 갈 예정인데요?"
"글세요. 아직은 잘....."
"네.. 어디든 좋은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눈길에 운전 조심하시
고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무슨. 다녀오셔서. 어디가 얼마나 좋았는지 이야기나 해
주십시오. 저도 나중에 시간 나면 다녀오게요.
진료를 위한 간호사의 노크에 전화를 끊어야 했다.
세희는 전화가 끊겨진 수화기를 한참동안 들고 있다가 내려놓으며
자동응답기 버튼을 눌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 가 앉았다.
작은방의 구석자리. 몇 날, 몇 일을 뜬눈으로 보내며 빈 위장을 술로
채워 꺼칠해진 세희의 모습을 이제는 모두 시들고 말라 버려 흉물스
러워진 승빈의 선물이 마주 앉아 있었다.
잘 챙겨주지 못하는 점도 미안하지만, 자신의 허물어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싫어서, 더 이상 아이들에게 가정에서 얻
어지는 나쁜 기억을 주지 않기 위해서 세희는 아이들을 친정에 보냈
다.
예전 같으면 자신이 데려다 주었을 텐데, 이번엔 어머니가 오셔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했다. 현관문을 나서며 엄마는 안 가냐는 표정
으로 몇 번씩 뒤를 돌아보는 아이들에게 몇 일 있다 데리러 간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그 몇 일이 보름을 넘기고 있다.
아이들마저 없는 집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니었다. 남편과 아내 그
리고 아이들이라는 구성원은 있었지만 기본적인 사랑은 처음부터 없
었고, 행복은 산산이 깨어진지 오래였던 집이다. 그나마 간신히 외관
상으로 가정처럼 보이게 지탱해 오던 아이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들 이였는데 이제는 그나마 없었다.
옆자리에 빈 병과 함께 놓여져 있는 술을 집어들어 한 모금 마시다
승빈에게 자신이 여행을 간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왜 여행을 간다고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런 계획이나 생각이 없었는데, 눈이 오면
외출을 해보라고 권하는 승빈에게 자신의 지금 모습이 보여지는 듯
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여행을 간다고 말 해버렸다.
그런데 여행이 이제는 꼭 가야 하는, 가고 싶은 여행이 되어 있었
다. 세희는 달력을 보았다. 오늘이 몇 일인지, 무슨 요일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세희는 정신을 차리고 제일먼저 술병들을 치웠다. 청소를 하고, 샤
워를 하면서 바다를 보기 위해 동해로 갈 마음을 먹었다.
부석부석해진 얼굴에 정성을 들여 화장까지 끝낸 세희는 전화기를
들고 망설였다.
"저... 집이에요."
몇 년 만인 듯 하다. 남편의 회사에 세희가 전화를 걸은 일이. 집에
서와는 달리 처음에 매우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남편이 뜻밖
의 전화에 당황하는 듯 했다.
"무슨 일이지?"
"동해.....를 갔으면 해요..... 오늘."
"동해? 오늘?"
"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더니 알았다면 퇴근길에 바로 출발하게 준비
를 해놓으라고 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승빈이 원장실 창문으로 보는 하늘에도, 세
희가 보는 동해의 검은 바다 위에도. 동쪽으로 가는 기나긴 시간동안
침묵으로 일관한 시간들. 숙소를 잡아 쉬겠다고 하는 남편과 달리, 혼
자 바다로 나와 매섭게 차가운 바람 앞에 앉은 세희는 오랜 시간 결
론을 내려놓은 자신의 생각과 싸워야 했다.
세희의 얼어 붙은 마음에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과 눈이 계속되고 있다.
4일간 오락가락 이어진 눈과 기온이 뚝 떨어진 날씨 탓에 도심의
출퇴근 교통은 엉망이었다. 출근은 일찍 움직여야 했고, 퇴근은 아예
여유를 두고 가야 했다. 그래도 승빈은 몇 일동안 집에서 전화를 받
지 않는 세희가 여행을 갔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도 기분이 가벼워지
는 듯 했다. 여행이 세희의 기분 전환에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
램이였다.
뜨거운 국물이 있는 점심을 먹고 돌아와 책상 위의 우편물들을 정
리했다. 매일 같이 날아오는 광고성 편지들 속에 보내는 이에 [강 세
희]라고 쓰여진 우편물이 있었다. 주소도 없이 소인이 속초시라는 소
인만 찍혀 있었다.
여행지에서 보내온 세희의 편지를 읽던 승빈이 정신없이 뛰어 나갔
다. 점심시간이 끝난 대기실에 환자들이 모여 있는데 간호사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뛰어 나갔다.
다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승빈은 도리질을 쳤다. 내내.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정신없이
몰아온 차가 세희의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승빈은 차를
멈추었다.
히뿌연 하늘에 가득 함박눈이 내리며 저 멀리 11층에 검은 조등이 겨
울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차를 몰아 주차장에 세워놓고 엘
리베이터를 향했다.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세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쯧쯧... 1107호 아이들이 불쌍해서 어째요?"
"그러게, 지난번 눈 많이 온 날 부부만 여행 갔다가 영동고속도로
에서 차가 굴렀다며?"
"네.... 쯧쯧... 아이들만 남았으니.. 불쌍해서 어째요?
승빈의 걸음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얼어 붙었다. 스치듯 들려오는 대
화에 도리질 치고 싶었다. 방금까지 옆에서 쯧쯧 거리던 여자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몸을 올려 놓았고, 승빈만을 남겨 놓았다.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아도 되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가버렸다.
빗물처럼 왔다가 눈꽃처럼 가버린 여자. 누이처럼 또 한동안 승빈
의 가슴을 아프게 할 여자.
'바보 같은 사람...... 바보 같은 사람..........'
ps : 마지막회에서 만나겠습니다... [낙서쟁이]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