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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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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BY 낙서쟁이 2001-01-11


이야기 [스물 아홉]... 이제는....

세상의 일들이 모두 순조롭다가도 세희 앞에 와서는 엉키고 꼬이는
현실이 세희를 무너지게 만든다.

언제나 한번만 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
막으로.. 이제는 정말 끝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 끔찍한 시간들을 이
어오며 여기까지 왔다.

늘 습관처럼 해오던 사과였지만. 그래도 이번엔 자존심 강한 남편
이 부모님 앞에서 사과하고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을 해서 혹시 하는
마음과 함께 믿어 보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집으로 돌아온 첫날.

승빈에 대해서 묻는 남편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세희는 몸
과 마음이 다시 멍들어 가고 있었다. 오늘 다시 병원에 실려간다 해
도 승빈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포자기라 하던가? 전에는 청테이프 안에서 들리지 않는 비명이라
도 질렀었다. 팔과 손으로 때리는 곳을 막고 감싸며 방어적인 본능이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러운 쓴웃음이 지어진다.

통증보다는 승빈이 떠올랐다. 맞으면서도 말하지 않고, 더 중요하게
가슴에 담고 있는 비밀이 있다는 자신이 부자가 된 듯 했다.

지금처럼 남편이 휘두르는 폭력에 쓰러져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날. 처음으로 살기 위해.. '살아야 겠다.'는
마음으로 도망쳤을 때. 달려가 만나 사람이 승빈이였다.

상처를 치료해 주고, 눈물을 닦아준 사람, 처음으로 속내를 들어 낼
때 아픔까지 말없이 들어준 사람.

세희가 더 없이 힘들고 지쳤을 때 전화 한 통화에 기꺼이 달려와
초라한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사람.

세희의 아픔을 가장 많이 알고, 가장 많이 안타까워하며 가슴 아파
해 주는 사람.

세희에게 잃어버린 웃음과 희망을 새롭게 가르쳐준 사람. 용기를
심어준 사람.

그 사람 보다 더 따뜻하고 자상한 그의 부모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 남편대신 매일 몇
차례씩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걱정해주며 위로를 해준 사람.

병원에 있을 때나 친정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보고 싶고, 궁금했
던 사람.

그 사람이 보내준 99송이의 장미 바구니 선물에 눈물이 날만큼 고
맙고, 보고 싶었던 사람.

그 사람 승빈에 대해선 남편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걷어차면 채이는 대로, 세희는 그렇게 나무토
막처럼 놓여져 있었다. 예전과 다른 반응에 남편도 제풀에 꺾였는지
한참을 분에 못 이기는 눈빛으로 쏘아보다 나가버렸다.

세희는 아침까지 눈을 뜬 채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출근 준비를
하려고 방문을 연 남편이 오히려 흠칫 놀라는 듯 했지만 아무런 기색
을 표하지 않고 출근했다.

현관문 소리가 들린 후에야 세희는 입에서 테이프를 떼어 내었다.
이제는 울음도 말라버린 듯 했다. 몸을 추슬러 일어나 보려고 했을
때 왼쪽 팔에 통증이 심했다.

깁스를 한 팔을 안고 길을 걸었다. 외투의 왼쪽 소매가 겨울 바람
에 흔들리며 팔랑거렸다. 평범이 아니라는 것. 무엇인가 남들과 다른
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까지 불편한 것인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
신의 빈 소매에 쏠렸다가 자동적으로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이 세희를
처다 보는 듯 해서. 마냥 길을 걸을 수만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지?'

"손님이 또 오시나요?"
"네."

승빈이 알려준 cafe는 한산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을 지켜보았다. 많은 사람들. 모두 다른 사람들. 저마다의 색깔을 가
꾸어 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많은 아이들. 살아온 많은 시간들이 주름 속
에 파묻힌 노인들. 꿈과 희망이 가득할 젊은이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장년들. 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릴듯하게 환한 웃음을 웃으며 자나가는
어떤 주부들.

'아.... 저들의 삶은 어떤 것이기에. 저렇게 환한 웃음이 보일까?'

세희는 핑 도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그래도 어느새 석고를 두른
팔에 눈물이 떨어졌다. 카운터에서 청승맞게 울고 앉아 있다는 생각
을 할까봐 심호흡을 한번 내 쉴 때 어깨에 손을 얹어주며 승빈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오래간만이네요."

그 흔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승빈은 할 수가 없었다.

승빈이 cafe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온 세희는 밝고 환한 모습이 아닌
초라함이였다. 내려앉은 어깨에 깁스를 한 팔까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보인 눈물에 승빈은 화가 치밀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나 되
었다고... 짐승 같은 사람 같으니라고...'

"꽃다발 감사합니다."
"식사 안 하셨죠? 배고픈데, 우리 맛있는 거 먹죠?"

눈으로 보이는 상황으로 보아 보든 것을 짐작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는 승빈이 고마웠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위안이 되어 주는
승빈의 존재가 고마웠다.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승빈의 노력과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세희가
포장된 작은 상자를 승빈쪽으로 밀어 놓았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승
빈은 당황했지만 거절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늘 신세 지기만 했어요."
"그런 말하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병원에 돌아와 풀어본 상자에는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초침이
채칵채칵 작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선생님에게 주어진 시간이 늘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제가 받은 가장 따뜻한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강 세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