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열 여섯]...조금 더 가까이
띠리리리~ 띠리리리~
승빈은 슬슬 짜증이 났다. 벌써 말없이 끊어지는 장난 전화가 네번
째 울리고 있다. 핸드폰을 꺼 놓을까 하다 그냥 두었더니 계속 울리고
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누군데 전화를 걸어 말을 안 하는 겁니까?"
"저......."
승빈은 후회했다. 방금 전 언성을 높여 짜증석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자신이 무안했다. 그녀인데... 무슨 문제가 있어 전화를 걸었을
텐데.. 거기에 대고 짜증을 낸 것이다.
"아! 네..."
"강세희예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 있나요? 어디 아프신가요?"
말을 해 놓고 승빈은 또 후회를 했다. 그녀를 언제나 매맞는 환자로
취급했다는 느낌을 준 것 같았다.
"아니에요. 아프지 않아요."
"네. 다행입니다. 이것도 직업병인가 봅니다. 모든 사람을 환자로
보니.."
"저...... 시간 있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마치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의외로 쉽고 빠른 대답에 승빈이
스스로에게 당황하는 반면, 세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술친구가 필요해요....."
"지금 어디시죠?"
강한 자력을 지닌 자석에게 이유 없이 끌려가듯이 승빈은 본인도 모르
게 그렇게 세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집 근처 아파트 상가에 있는 작은 술집 이였다. 낮에는 차를
파는 곳 같았다. 그녀는 술 한잔하려 해도 집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마시고 있었는지 승빈이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다 되
어 가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그녀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는 생각에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는 걱정으로 더 빨리 오고자 조급
했었다.
어두운 공간 구석진 자리에 역시 혼자 앉아 있는 그녀의 하얀 얼굴
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승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느꼈다.
"안녕하세요?"
"네. 이렇게 나오시라 해서 죄송해요. 그런데.. 친구가 필요했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불러주어 고맙습니다. 후후.."
"밖에 아직도 비가 오나요?"
"네.. 조금.. 그런데..... 이런 시간에.....? 무슨 일 있으신 가요?"
"일이요? 있긴 있죠. 남편이 출장을 갔어요. 해방된 느낌이에요. 도
저히 그냥 그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자유를 얻은 기분 이였어요.
[자유] 아세요? 자유...."
"...."
"그런데 막상 갈곳이 없었어요. 어떤 영화에 그런 장면이 있더군
요. 오랜 시간 아주 오랜 시간 죄수 생활을 하던 사람이 형기를 마치
고 출감했는데. 너무나 변해 버린 환경에 갈곳도 없고, 그렇다고 적응
도 안되자 자살을 하는 장면이요. 제가 바로 그 사람처럼 이 밖갓 세
상에 적응이 안돼요. 막상 어디로 딱히 갈곳도 없고요. 그런 입장. 이
해 가세요? 우습죠? 후후..."
"저 같은 남자들도 그런 경우 있습니다. 그런데 일찍 집에서 나오
셨으면 저를 더 일찍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전화를 걸어도 될까? 하는 생각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올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을 또 한차례, 부담을 드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또 하고요. 저기... 저기 저 카운터 옆에 전화기를 바라보고 걸까 말까
를 생각하고. 전화기를 들어 돌리다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신호음이
나자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후후.. 그런데 막상 받으시니까 또 말문이
나오지 않았어요.. 받으셨었죠? 말없이 끊어진 전화.."
"후후.. 네. 아까 마지막에도 말씀을 안 했으면 아마 전화를 꺼놨을
겁니다."
"그러실 까 겁이 났어요. 그리고 말없이 끊긴 전화에 화가 나셨을
거 같아서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전화 잘 하셨어요. 마침 비도 오고 저도 한잔 생
각나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말이 많죠? 취했나 봐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승빈은 세희가 간간이 고개를 들어 살포시 웃기도 하고, 입가에 거
품을 묻히며 맥주를 마시고, 오물오물 작은 입술을 움직여 안주를 먹
기도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이 여자. 강 세희.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얼
마나 지쳐 있는지 승빈은 읽을 수 있었다. 세희에게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라는 생각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어려울 때,
힘들 때... 오늘과 같이 주저하지 말고 언제든지 자신에게 연락해도
된다는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 행복하세요?"
"행복이요? 글쎄요. 행복이라는 게 느끼기 나름이겠죠. 세희씨는요?" "저도 가끔은 행복해요.... 아이들을 바라 볼 때."
"네.. 아이들의 커 가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행복을 주
기도하죠. 더군다나 세희씨 아이들은 예쁘고 귀여웁기 까지 하니.."
"후후... 예쁘긴요... 선생님은 자제분이 어떻게 되세요?"
"아들녀석만 둘입니다. 저도 지민이 처럼 예쁜 딸이 하나 있었으면
하곤 합니다. 사내녀석들이라 노는 것도 거칠기만 하거든요."
"네... 대신 훗날을 생각하면 든든 하시잖아요."
"후후.. 글쎄요 두고 봐야 아는 거겠죠. 든든할지 애물단지일지."
"후후.."
엷은 미소 뒤에 그녀 특유의 슬픈 미소가 엿보였다.
"전 아이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요."
"왜? 그러시죠? 세희씨 같으면 좋은 엄마, 훌륭한 엄마 같은데..."
"그렇지 못해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잖아요. 난 내 아이들이 밝고,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
에서 활짝 웃으며 자랄 수 있길 바라죠.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로 살
고 있어요."
"...."
세희는 허공을 응시하며 눈에 차 오른 눈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노
력하고 있었다. 오늘은 울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에게 더 이상 불쌍한 여자로 보이
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싶었다. 평화롭고 싶었다. 남편에게
서 벗어나, 매맞는 동물이 아닌 살아 숨쉬는.. 깨어 있는 여자이고
싶었다.
눈물샘에서 넘쳐 눈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수위가 되었는지 아픈 눈
물이 세희의 손등을 적시고 있었다.
"저.... 세희씨 힘들고 지칠 때 제가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을까요?"
조용히 손수건을 세희에게 내밀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함께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죄송한걸요."
"그렇게 생각지 마세요. 언제든지 저를 활용하세요. 정말 가능하다
면 도움이 되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아.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댁까지 돌아 가실 길이 먼건 아닌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조금씩 마셔버린 술이 취했는지 세희가 일어서며 휘청거렸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세희는 흐트러지는 자신을 바로잡았다. 어두워진 거리엔 여전히 비
가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발걸음이 주저되었다. 아이
들 때문에 맘이 쓰였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길거리에 주저앉아
비와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여도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취기 때문인가? 세희의 정신적 지주인 아이
들 마저 세희의 흔들림을 붙잡지 못했다. 자유롭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