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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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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난바보다누구보다 2000-09-07

인생에서 첫사랑은 단 한번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첫사랑은 한 번 밖에는 오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처음 하는 사랑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가장 애틋하고 순수하고 맑은 사랑. 절절하고 슬픈 사랑.
그래서 살면서 단 한번밖에 오지 않는 사랑.
그렇기에 내 첫사랑은 서른 하나에 시작되었다.
단 한번의 마주침 혹은 스침, 그것을 인연이라 불러도 좋다면. 그와의 인연은 내 나이 서른 하나, 한 가정의 주부가 되어있던 서른 하나 그 해 여름에 시작되었다.

똑같은 날이 반복되던 그런 날이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을 그런 날들.
한없이 지루하고 한없이 따분한 그런 낮잠 같은 날들.
어린이집으로 주해를 데리러 갔었다.
주해야, 어머니 오셨어, 해바라기반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 하고 달려오는 주해가 보였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다른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그. 엄마, 쟤가 내가 말한 성준이야, 주해는 그가 잡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안녕하세요, 주해 어머니 되시는 모양이죠? 나는 네, 주해에게 성준이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인사치레를 했다. 그 때까지도 나는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내 인생 최대의 사랑이 단 한번뿐일 첫사랑이 다가오리란 걸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젊어 보였고 그랬기에 일찍 결혼하신 모양이에요, 주해를 데리고 어린이집을 나오며 한마디했다. 아니요, 성준이 삼촌이에요, 그는 사람좋은 웃음을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타세요, 제가 집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나는 마다해야 했다. 거기서 괜찮아요, 걸어가면 금방인걸요,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그곳을 빠져 나와야했다. 그랬다면 나는 오후 무렵 집에서 빨래나 개키는 여느 주부들처럼 살 수 있었을 것을. 내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더워 죽겠어, 엄마, 성준이 삼촌 차 타고 가자, 주해가 졸랐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마워요,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주해가 성준이를 따라 뒤에 타는 바람에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 아닌 다른 남자 옆자리에 앉아 보는 것이었다. 그 얘길 했더니 그는 저도 굉장히 오랜만에 여자 태워보네요, 했다. 결혼 하셨어요? 내가 물었고 그렇게 보여요? 그는 커브 길을 돌며 물었다. 아니요. 그는 총각처럼 보였다. 할 뻔했었어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 아파트 몇 동이에요? 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려는데 삼촌, 우리 팥빙수 사 줘, 성준이가 말했고 덩달아 주해도 엄마, 나도 팥빙수 먹고 싶어, 했다. 우리는 새로 생긴 깨끗한 피자 집으로 들어 가 팥빙수 두 개와 피자 한 판을 시켰다. 애들이 팥빙수를 먹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엔 주해와 성준이 얘기였는데 나중엔 별 얘기를 다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주부이긴 했지만 그래도 주해를 낳기 전 까진 회사를 다녔었고 명문대까지 나왔던 나는 그와 별 문제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혼이라는 거, 남자는 몰라도 여자에겐 별루인 거 같아요. 전 제 딸 낳으면 절대 결혼 안시킬 거에요. 얘기 끝에 그가 그런 얘기를 했다. 아, 그 때 나는 뭔가로 머리 한 쪽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했을 수도 있을 그 말. 결혼은 여자에게 별루인 것 같다는 그 말. 나는 그 날 이후로 사흘동안 그에 대한 꿈만 꾸었다.

주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갈 때마다 난 그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흘 동안 마주칠 수가 없었다. 요즘 성준이 어린이 집 안 나와? 주해의 머리를 땋아주며 내가 물었을 때 아니, 맨날 나와, 주해는 말했다. 삼촌이 데리러 와?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을 때 삼촌 말고 어떤 여자가 데리러 와, 주해는 그렇게 말했다. 여자? 누구? 내가 가방을 매어주며 물으니 몰라, 나도, 주해는 현관으로 나가며 말했다. 나는 주해에게 신발을 신겨주며 내가 별 질문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열 한시. 딱 그 시간이면 내가 할 일이 없는 시간이다. 남편을 직장에 보내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방을 정리하고 난 그 시간. 열 한시.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거기 주해네 집이죠?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나는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사실 그 목소리를 금방 알아버렸다. 거기, 하는 순간, 아니 전화벨이 울리던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전화를 건 사람이 그라는 것을, 성준이 삼촌이 아닌, 내 첫사랑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버렸다.
저, 성준이 삼촌입니다. 기억하세요?
누구라구요?
여기 나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말고. 그 짙은 눈썹과 건장한 체격, 그리고 우수에 찬 눈빛. 그를 만난 이후로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는 그의 모습.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는듯 말했다. 그를 긴장시키고 싶었다.
성준이 삼촌이요, 기억 안 나세요?
아, 네.
나는 그제야 기억이 난 듯 웬일이세요? 하고 물었다.
혹시, 시간 있으세요?
열 한시. 이 시간은 나에게 낮잠을 자거나 이웃집 준호 엄마에게 놀러가 수다를 떠는 시간이다. 그도 아니면 쇼핑을 가거나. 시간은 내게 언제나 있다. 하루가 스물 네시간인 것이 나는 언제나 못마땅했다. 너무도 길게 여겨지기에.
잠깐 점심이나 할 까 해서요. 할 얘기도 있고 해서.
그를 만날 이유가 내겐 없다. 하지만 그를 만나지 말아야할 이유는 더 없다.
무슨 얘기요?
나는 수화기를 든 오른손을 꽉 쥐며 묻는다. 그가 어떤 얘기를 하든 나는 그와 점심 약속을 할 것이었다.
성준이 얘기로 상의 드릴 게 있어서요.
나는 그것이 거짓말임을 안다. 그도 내가 그 말을 믿지 않음을 알 터였다.
네.
이따가 열두 시에 사거리 레스토랑에서 뵐 수 있을까요?
조심스런 그의 물음에 나는 더 이상 끌지 않기로 한다.
그러죠.
그의 전화가 끊기고 수화기를 통해 뚜뚜뚜 신호음이 들릴 때까지 나는 그대로 있었다.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 열 한시 십오분. 나는 지금 낮잠을 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