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시 서울로.
출혈은 곧 멈추었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해 졌다. 일단
안심은 되었지만 수상한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몸
의 변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신애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나
는 정말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
었다.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언제나 떠도는 삶,,
언제까지 이런 삶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서울로 올라가서 이모
의 집도 정리해야 했고, 두렵지만 더 늦기 전에 병원에도 가 봐
야 했다. 그리고 그를 만나러 가야 했다. 이제는 그의 앞에서
어쩐지 떳떳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일부러 혁진을
이용해 나 자신이 그에게서 떼어내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아내를 만나고 다시는 돌아 갈 수 없다는 걸 깨닫자 내 속
에 또 다른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학대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혁진에게 조차 나는 정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
은 거였다.
"언니, 어제 혁진씨 왔다갔어?"
"응?"
"나은이가 그러던데?"
나은이를 보내고 돌아 와 보니 신애가 기다리고 있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의혹으로 빛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응 왔다 갔지. 너 오기 기다린다고 하던데...너무 늦어서 그냥
갔어."
"어제 왜 얘기 안했어?"
"통화 한 줄 알았지 난.."
"밤늦게까지 통화가 안되었어. 전화기 꺼 놓았더라구 오늘도 안
받아, 어떻게 된 거지?"
"글세, 걱정하고 있던데,,,바쁜가보지.."
"엄마한테 같이 빌러 가자니까 그렇게 못 하겠다고 하더라구,
나 참, 기막혀. 그럴 수가 있어?"
"그런 자리, 힘들지, 니가 이해하렴."
"언니 지금 누구 편 드는거야? 나는 쉬운 줄 알아? 엄마가 나
좋은 데 시집가서 사는 거 보겠다고 그렇게 바라셨었는데 나는
마음이 편하냐고! 정말 죽고 싶어 나도. 그런데 같이 끝까지 설
득해 보자고 한 게 언제인데 벌써 마음이 변해서,,,이럴 수가 없
어."
"신애야,,,"
무릎을 싸안은 채 신애는 흐느꼈다. 나는 정말 죄 많은 인간이
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며 나는 신애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할
지 난감해 하고 있었다. 혁진의 변심은 아마도 나 때문인 것일
까..그러나 신애야, 걱정하지마 그는 돌아 올꺼야....나는 그렇
게 말해주고 싶었다.
"언니, 나는 정말 죽고 싶어. 이럴 수가 없어. 아이만 아니라
면,,나도,,헤어지고 싶어.."
"아이? 아이라고?"
나는 놀라서 나도 모르게 신애의 어깨를 움켜 쥐었다.
"아이를 가졌니? 정말? 너, 너 미쳤구나, 아니, 혁진씨도 알고
있니?"
"아니, 아직 말 안했어. 나를 선택하는 데 아이가 끼어들게 하
고 싶지는 않아."
"신애야 말해야돼. 너와 같이 벌린 일이잖아, 왜 너 혼자 다 짊
어지려고 하니? 나를 봐! 나를 보라구! 어떠니? 보기 좋아? 아
이 아빠가 될 사람도 책임이 있는 거야 알려야 해. 제발 신애야
혼자 결정하려고 하면 안돼."
"언니,,그래서,,아이가 생겼다고 엄마에게 말하려고,,같이 가
서..그럼 엄마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몰라서..엄마에게는 미안하지
만 ,,정말 미안하지만,,그러려고 했는데...."
신애는 우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신애야 혁진씨한테 전화해. 그리고 말해. 아이가 생겼다고. 말
해야 돼. 나은이처럼 만들면 안돼."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언니,,너무 비참해...너무..화가 나...."
"아니, 너와 혁진씨는 서로 사랑하잖아, 서로의 사랑만 생각해.
엄마가 니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건 아니잖아. 니가 행복하다
면 그러면 된거야, 엄마도 이해하실꺼야."
나는 신애을 달래서 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돌리고도
수화기를 통해 혁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말을 못잇는 신애를 대신
해서 내가 말했다.
"영인씨.."
"신애 아기 가졌대요."
"네?"
"혁진씨 아기요. 이제 신애 엄마를 모시러 혁진씨가 가야 겠지
요."
"영인씨,,,영인씨 나는,,,"
"그럼 신애 달래 놓고 있을 게요. 몹시 지쳐있고, 힘들어하고 있
어요. 와서 달래 주세요. 혁진씨 밖에 그럴 사람 없다는 거 아시
죠?"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는 혁진보다 먼저 수화기를 내
려 놓았다.
"언니, 혁진씨, 마음이 변한 게 틀림없어."
"무슨 소리야?"
"다른 여자가 생긴 거 같아."
"신애야,,,"
"틀림없어. 그러지 않았었는데, 나에게도 얼마나 애틋하게 대해
줬었는데, 그 눈빛을 보면 나는 알아. 어딘가 다른 곳을 헤메는
눈빛이었어. 언니 나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기 싫어. 헤어진다면
언니처럼 아이 혼자 낳아서 기르게 되진 않을 꺼야. 언니, 우리
엄마가 아시면 어떻게 될까? 엄마 돌아 가실지도 몰라. 엄마한
테 가기 전에, 혁진씨와 먼저 얘기해야 겠어."
그러나 신애보다도 먼저, 나는 혁진을 만났다. 점심시간이 다 지
나기 전이었다.그는 숨가쁘게 달려온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커피잔을 마주 놓고 나는 혁진과 신애의 언니 이기도 했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나눈 여인이기도 했다.
"혁진씨, 나를 봐요."
"영인씨..."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었죠...사랑이란 건 언제나 책임이 따르
는 거예요. 아시죠?"
"영인씨를 책임질 수 있어요."
"아니요, 그렇다면 혁진씨는 내가 아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
예요. 잘 생각해 봐요.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요. 사람들은 언제
나 새로운 끌림을 갖게 되면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
요. 혁진씨가 나를 생각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가엾음, 또는 안
타까움 일 꺼 예요. 너무 힘들게 혼자 사는 여자, 그 여자를 보
호해 주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요..아니요, 잠깐만요, 제 말을 끝
까지 들어주세요. 혁진씨의 그런 마음, 그리고 지난 밤, 저는 사
실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혁진씨 등에 업혀 병원에 실려 갔을
때, 기억에는 없지만 아주 편한 침대에 파묻혀 누운 것처럼 편안
한 꿈을 꾸었었어요. 지난밤에 도요. 그걸로 충분해요. 이제 됐
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혁진씨가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랑은 내
가 아니예요. 신애와 아기지요. 제발, 나은이같은 아이를 다시
만들지 말아요. 신애와 혁진씨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예요.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지요. 나를 잊어요. 잊지 못하면 신애
가 절대로 알 수 없도록 꼭꼭 숨겨둬요.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날
거예요. 서울로 돌아가서 할 일이 남아 있어요. 제발, 내가 잘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영인씨, 그렇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게 있어요. 나는 동정으로
당신을 바라본 게 아닙니다.네 그래요. 당신을 만날 수록 안타까
움, 안스러움, 그런 게 있었지요. 하지만 당신을 처음 본 날,
그 날부터 였어요, 당신을 사랑한 것은요.당신을 처음 본 날에
도 내가 당신을 가엾어 했다고 우길 수는 없겠지요? 당신 차의
번호판을 외워뒀다가 찾으려고 노력했었어요. 왜냐고요? 모르겠
어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신애 때문에, 나는
정말 충실하려고 노력했었지만, 그러나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
쩔 수 없는 것도 있었어요. 그게 바로 사랑이었어요."
"그래서, 신애를 버리고 나를 선택한다면, 내가 당신을 받아 들
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아직도 풀어 내야할 사랑이 여
기 내 심장 한 구석에 남아 있어요. 당신에게 안겨 있었어도 나
는 나은이 아빠를 생각하고 있었어요...이제 아시겠지요? 우리
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거예요. 때로는 잘못
된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기도 하지요. 우리는 사람이
잖아요.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 예요. 사람이라구요.
얼마든지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요. 그래야 해요. 그렇게 하겠다
고 약속 했었잖아요..그럼 지켜 줘요..."
더는 아무 말이 없는 그를 남겨 두고 나는 다시 나의 남은 삶을
향해 떠났다. 어쩌면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 나를 부르는 지도 모
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이제 두려워 하
지 않기로 했다.
결국, 손을 든 신애 엄마가 돌아오고, 나는 짐을 쌌다. 신애의
결혼식에는 정말 화사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사랑
하는 나의 딸 나은이의 손목을 잡고 서울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