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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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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BY 별아이 2000-08-25

2. 뜻밖에 만남

*
얼마 전부터 나는 여러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특강을 다니고 있어. 한 때의 방랑벽으로 떠났던 배낭여행의 무모함이 사이버 세계라는 물을 만나 한창 신나 있을 무렵, 나도 모르는 사이 공표된 작가라는 약간은 어색한 호칭이 꿈만 같았었지. 극도로 소심한 성격의 나이지만 정작 남들에게만은 완벽한 내가 되길 희구했고, 그런 탓에 매일매일을 강의 내용 준비하기도 바빠 헉헉대기가 태반이었어. 정작 중요하게 여겨야 될 전공과목들은 뒤로 한채 말이야. 이를테면 내 능력과는 별개로 어처구니 없는 나의 무용담들이 색달라 사람들이 듣고 싶어 안달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한동안 나도 적적했고, 혼자가 썩 익숙치도 않은터라 단지 내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을지라도 그건 날 분명 기쁘게 했어.
이제는 제법 식사 준비도 해가며 나의 새로운 일과에 적응도 하면서 단촐한 생활을 하고 있어. 게다가 막 끓인 진한 커피 향내에 순간순간 취할 지도 알게 되었고, 때때로 먼 산 바라보며 지난 날을 그리곤 하는데......
“딩동딩동."
어느틈엔가 시끄러운 벨소리가 온 집안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 ‘또 다른 집이겠지’하는 나의 어지러운 독백을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울어대는 그 소리는 아마도 나와는 분명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일테지.
“딩동딩동딩동”
언제부턴가 초인종의 존재를 깡그리 잃어버린 내게 생소한 그 소리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어. 먼 여행길을 찾아 떠나 있던 나의 의식은 더욱 다급해진 벨소리와 그보다 더 시끌벅적하니 돌연 출연한 그녀의 외침으로 인해 산산히 부서져 갔어. 생글거리는 낯설은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랄 겨를도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 응답을 하려고 급히 그곳으로 뛰어 갔을 때에는 이미 내 의지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민아! 지민아!"
그리곤 좀 전하곤 판이하게 달라진 가라앉은 목소리. 하지만 별수롭게도 난 그 목소리에 더 힘이 가해졌다는 걸 느꼈어.
“누나가 지금 너무 배가 고파. 빨랑 문 열어줘. 너 자꾸 누나 기다리게 하면 알지?”
누나라니? 그녀는 분명 집을 잘못 안게 분명해. 그리곤 난 그런 사실을 재빨리 일깨워 주고, 이 상황에서 탈피하고자 했어.
“지민아! 누나가 우리 지민이 너무 보고 싶어서 밤마다 니 꿈만 꿨어. 어! 근데 못 본 사이에 더 홀쭉해졌네. 설마 너 다이어트 시작한 건 아니겠지? 엄마 알면 난리난다구. 넌 지금 이대로가 제일 멋있단 말이야. 어쨌든 이 누나가 무진장 배가 고파 아사 직전이거든. 헤헤, 혹시 남는 밥 있으면......"
그러면서 밑도끝도 없이 무작정 나에게 달려드는 거야. 난 한순간이나마 당황했지만 느닷없는 이 상황이 너무도 재밌어졌어. 다짜고짜 날 안더니만 그도 모자라 쉴새없이 쫑알대는 낯선 여자 아이, 금새 그녀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 견디지 못하겠는 나, 그런 그녀가 너무나 귀여웠거든.
“엄마 땜에 하마터면 첫 날부터 지각할 뻔하지 않았겠니? 지민이랑 잘 지내라. 싸우지 말아라. 그래도 네가 누나니까 동생 잘 보살펴야 한다 등등등...... 너무 많아서 기억조차 못할 지경이야. 엄마는 뭐 내가 어린앤가? 얼마나 잔소리를 늘어 놓으시던지. 정말 이렇게 널 만난게 꿈만 같다니까.”
예쁘장하게 벗어 놓은 구두가 너무도 앙증 맞아 난 거기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어. 그런데 그제서야 그녀가 반응을 보이더군.
“엄마야.”
낯선 남자라니......남자라곤 아버지와 동생 밖에 모를 것 같은 그녀가 날 봤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어? 게다가 난 부시시하고 면도도 하지 않았었는데, 두 눈에 그렁이는 눈물을 보니 마치 내가 치한이 된듯한 느낌마저 들더군.
“누나! 거기서 뭐하고 있어?”
갑자기 들려 오는 비명 소리에 놀랐는지 그녀보다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허겁지겁 며칠 전에 본듯한 남자 아이가 2층에서 내려 왔어. 난 잊고 있었던 거야. 혼자가 된후 내방 하나 간수하기 버거웠고, 그런 까닭에 보름 전부터 2층을 통째로 전세 주었다는 사실을 말야. 그제서야 난 이 상황이 짐작이 갔어. 분명 1층과 2층은 별개고(그렇다고 특별히 문이 달린 건 아니지만 우리들이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는 걸 싫어했어. 아니 싫다고 했다기 보다는 존중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성 싶다.) 초인종도 분명 따로 따로일테지만 이 곳을 처음와 본 그녀라면 분명 헷갈렸을테지. 나란히 있는 그녀와 나의 집 초인종을...... 난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재밌어서 견디지 못하겠는 거야.
“쿡쿡......”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실례라는 건 알지만 별수 없잖아. 두 손을 가리고 웃는 수밖에, 하지만 정작 소리내어 웃었던 건 내가 아니었어. 난 나인줄로만 착각했는데 말이야.
“송지민! 너 그 꼴이 뭐니? 앞치마에 고무 장갑까지,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너답지 않아 정말(?) 너 내일 모레 장가가도 되겠다.”
그녀는 벌써 나의 존재를 잊어 버렸나봐. 언제 그랬냐는듯 씩씩해진 걸 보면......
“누나, 우리집은......”
난색을 표하며 지민이라는 그 아이는 사태 수습을 열심히도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벌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내가 더 황당했다구.
“훗훗훗, 미안합니다. 제가 집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에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난생처음 보게되는 녀석의 귀여운 모습에 연신 즐거운 비명 소리를 쳐대는 그녀였고, 난 정말 안중에도 없었다니까.
“너 정말 이게 뭐니? 체신 없이......”
“난 엄마한테 연락받구 아린이가 정말 배고플까봐.”
“됐다구. 나 빨리 지민이가 한 밥 먹고 싶어.”
점점 사그라져가는 그들의 목소리 너머로 낮게 깔리는 나의 푸념섞인 목소리.
난 정말 그 목소리가 죽도록 싫단 말야.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겨우 버렸던, 잊혀졌던 그 묘한 슬픔을 뱉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불행히도 날 다시 에워싸기 시작한 거야.
“빌어먹을, 저렁게 행복한 표정을 짓다니.”
연신 싱글벙글인 그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현관문에 화풀이를 해댔지만 밤새해도 나의 분은 삭이지가 않을성 싶었어. 그만큼 그들의,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녀의 출현은 남달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