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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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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BY 진짜달팽이 2000-07-11

어젯밤 일이 지금도 꿈만 같다. 아름이라고 했던가. 그 타원형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를 알아본 아줌마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119구급대에 실려가는 것을 보고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두려웠다. 언니, 하고 불러 세우려할 때 내가 뒤 한번

돌아봐 주었으면 그리 되지는 않았을 텐데......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에 차마

그녀의 엄마에게 할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고민한 끝에 다시 그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마치 범죄 현장을 꼭 한번 찾아가 확인해 보려고 하는 범인의 심리처럼.

아파트 앞 차도에 뻗어 누운 타원형을 표시해 놓은 락카칠이 타원형의 청잠바처럼

빳빳하고 선명하다. 타원형의 가게를 보니 문이 닫혀 있다. 섬?한 느낌이 든다.

한참동안 타원형이 누워있는 차도와 슈퍼마켓을 번갈아 보다가 그 옆의 사진관 간판에서

눈길을 멈췄다. 17분 완성. 이력서에 붙일 사진도 떨어졌고 타원형의 동정도 궁금하기도

해서 들어가 보았다. 사진을 찍고 접수를 위해 진열대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바로 앞 벽면에 걸려있는 가족사진 하나가 내 눈의 바쁜 움직임을 잡아세운다.

타원형의 엄마는 못알아보겠지만 타원형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처럼

살도 찌지 않았고 화장도 하지 않은 채 교복을 입고 말갛게 웃고 있었다. 사진만큼은

누가 보아도 단란한 가족이다. 그녀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남동생, 그리고 오열하던

어머니에게도 가슴의 멍자욱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 저 사진 아름이네 가족사진 아니예요?"

주인이 흠칫 놀라 아름이를 아느냐고 되묻는다.

"네, 그냥 좀......."

"어유, 그 년 저거 찍구 얼마 있다 집을 뛰쳐나갔는데 어젯밤에 2년만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요 앞에서 차에 치어 즉사 했어요. 아름이 엄마가 하두 저 사진 떼지 말라고 부탁을 하길래

이 년 넘게 놔뒀는데, 인제 떼야죠. 아, 죽은 년 사진 걸어놔 뭐해."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에 자꾸 두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주인 아저씨의 말을 겨우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곤 휘청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사진관을 나왔다.

도로에 누워있는 타원형이 내게 속삭이는 듯 했다.

언닌 알고 있었죠? 별박이는 줄이 끊어진 연이라는 걸......

한 시간 여를 타원형과 있었던 어젯밤을 꿈처럼 되새기며 동네를 배회하다가 사진을

찾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사진관 벽에 붙어 투명하게 웃던 타원형은 사라졌다.

사진을 찾아 나오다가 그녀가 붙어있던 자리를 돌아보는 순간 내 눈의 뜨거운 것이

시야를 흐린다. 아, 가족이란...... 고향이란....... 나른한 오후, 유원지 안의 솜사탕이

부르는 달콤한 유혹, 한 입 물고 스며드는 끈적거리는 실망감, 재빠른 망각 뒤에

또 다시 스물거리는 녹록한 유혹?

사진관을 뒤로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후두둑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봄비다.

New kids on the block이 내 앞에서 노래를 한다 해도 이제 더 이상 열광하지도 않고

그들을 위해 초개와 같이 내 목숨을 버리지도 않을뿐더러,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스물 일곱의 조로한 내가 비를 맞고 있다. 오늘 고향에서 맞는 이 비가 말복 날

지하 공사장보다 더 뜨겁고, 준공 떨어진 날 마시는 호프 한 잔보다 더 시원하다.

처음 맞아보는 비다.

평행선이 끝내 만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소실점보다 더 모순적인 나와

이제 별박이로 날아간 타원형, 그리고 그녀와 제삿날이 같은 아버지의 아픔을

언젠가 소설로 꼭 한번 써보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가 생겨난다. 개미처럼.

그 거대한 개미 군단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내 정수리 위에 묻은 한 방울의 꿀을 향해

진군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