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서울로 오는 걸 반대하셨다.
새미아빠가 혼자 남아서 홀아비처럼 사는 걸 용납 할 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집을 정리하고,친정근처에 조그마한 방을
하나 얻었다.
새미아빠는 현장 숙소에 머물기로 했다. 함바가 있어서 밥 걱정
도 덜 수 있고,시설이 편리하기 때문에 굳이 집이 필요없다고
했다. 미안해하는 나에게,우리들의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그 정도는 양해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뭔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진 않지만 나와의 사이에 간격을 느낀다고 고백처럼 말
했다.
남편이 꽤 무딘 사람인줄만 알았던 나는,그도 예민한 구석이 있
다는 걸 알았다.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
다.
한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 자만인지-
남편과 살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별로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
고 불행하다고도 생각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깨달았다.
전에는 그런 물음조차 필요 없었던 날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날들이 행복이었었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랑을 알게 된 후에 돌아보니 우리가 결코 불행한 부부는
아니었다.그리고 이제 남은 생은 남편과 새미 그리고 가슴 한
켠 접어 둘 사랑으로 나는 행복하게 될 꺼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만나러 갔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그의 병원 근처로 가서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에 전화를 걸었다.
"네,정준숩니다."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나는 너무나 가슴이 메어
왔다. 언제든지 이렇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그 동안에 나는
환청으로 매일 밤마다 듣고 있었다.
"저,새미 엄마에요."
"어딥니까?"
그는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물어왔다.
"병원 근처예요"
"내가 나가죠. 길 건너에서 기다리세요."
차가 다가오고 그의 모습이 보이자,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것조차 어쩌면 감정의 사치는 아닐
까. 한 번은 만나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런 만남이
정말 싫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그는 내가 옆자리에 오르자 그렇게 물었다.
"왜요?"
"많이 상했군요. 어디 아파요?"
"아니요,아프지 않아요...선생님은요?"
"아팠지요.당신보다 더..."
시내를 가로 질러 한적한 길위로 접어 들자 적당한 곳에 차를 세
운 그는 말이 없었다.
"점심 안 드셨잖아요?"
"당신이,떠난 다는 건 알고 있었소."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새미아빠한테 들으셨어요?"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여전히 앞을 본 채로 그는 말했다. 목소리가 떨려왔다.
"전 이대로 견딜 수 없어요. 언제나 가까이 있는 데 그러다 우
린 둘 다 결국 망하게 될 꺼예요."
"망한다구?"
그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말했다.
"네,망하고 말꺼예요."
순간 그는 차에서 뛰듯이 내려 나를 끌어냈다. 길가 숲속으로
손목을 잡은 채 거칠게 끌고 갔다.
"왜 이러세요?"
나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해서 물었다.
나무 앞에 나를 밀어 세운 그는 바짝 내게 다가와 물었다.
"당신,만약 내가 망하고 싶다면 어쩔건데? 내가 당신 말처럼 가
지고 있는 모든 걸 버리고 당신과 같이 도망이라도 가고 싶다면
어쩔 건데?"
그의 눈에 어리는 분노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란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럴 수 없어요. 나도요."
그는 내 눈동자를 바라다 봤다.
짧게 한숨쉬며 그는 말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당신 집 앞에 가기도 했었소.당신이 가족
과 잠들기 위해서 마지막 불을 꺼 버릴 때 까지,그렇게 지켜 보
다 돌아오기도 했었소.
당신이... 알아 둬야 할 게 있소. 내가 가진 걸 다 포기 할 수
없어서 당신을 보내는 게 아니요. 당신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의 따스함, 그걸 지켜주고 싶어서 보내는 거요.
난 아마도 당신에게 영원히 그런 따스한 불빛을 선물 할 수 없다
는 걸 알기 때문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가슴 저 밑바닥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슬픔,진심을 다해
나를 걱정해주고 있는 그의 사랑이 새삼 서러워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어깨를 들먹이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나
를 안아주었다. 다시는 그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나
는 서러워했지만,그러나 우리의 결정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
었다.
"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소."
그는 반지 하나를 내게 건네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작은 링이었다.
"당신이 떠난 다는 걸 알고 장만해 두었던 거요. 아무 장식도
없는 그저 링일 뿐이지만,당신의 결혼반지 옆에 끼여 주면 좋겠
소. 그저 당신의 손 위에서 라도 난 언제나 기억되고 싶소."
"그럴께요."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링하나의 의미를 누구도 알 수 없으리
라.
그가 얼마나 고심하고 골랐을지,나는 아무것도 준비한게 없음
이 안타까웠다.
"전 아무것도 남겨 드릴께 없네요."
"당신이 어디서건 건강하고, 남은 날들을 행복하게 살아준다면,
그게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이요."
난 그가 준 반지를 손에 끼였다.
"내게 이런 사랑을 알 게 해준 당신에게 나도 마지막으로 드릴
께 있어요."
나는 수줍어 하며 그에게 입맞추었다.
며칠 뒤 나보다 먼저 슈퍼 집 부부는 이사를 했다. 슈퍼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조그만 트럭
에 몇 가지 안 되는 살림을 싣고 떠나 던 날 아침, 어느 새 배
가 불룩해진 슈퍼 집 여자에게 나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말해줬
다. 그녀는 따뜻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남편과 다시
고단한 삶을 향해 떠났다.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새미의 손을 잡고 떠나 던 날,조금씩 비
가 내렸다.
비행기안에서 멀리 작게 보이는 제주를 내려다 봤다.
언제나 내게,그리움과 사랑으로 남을 섬이었다.
먼 훗날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에게 말하리라고
다짐했다.
-당신을 이 다음 생의 한가운데 어디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
면,그 땐 당신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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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의 사랑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제겐 참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짧은 제 제주방언 실력 때문에 대신 번역(?)을 도와주신 제주에 계신 문영호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숙제(?)를 대신 맡아서 해준 사랑하는 저의 남편에게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