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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명모집, 사흘, 심심한 사과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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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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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BY 유수진 2000-07-30

"보호자가 꼭 있어야할 상황입니다."

"제가 제 보호자에요!"

의사의 대표 모델같은 인상의 검은 뿔테안경을 한 산부인과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있다.

아무레도, 무슨 이상이 생긴듯했다.

"무슨일인데 자꾸 보호자를 찾으시죠?
이상진 선생님을 불러주세요.
제 주치의니까요.
정 말씀 안하시면 그분께 여쭤볼거에요."

그는 앞에 놓인 내 차트에 지루하리만치 뭔가 끄적거리고만 있다.

"답답해요!"

내 고함소리에 나도 깜짝 놀랐다.

담담하고 또박또박한 의사의 낮은 음성이 내 기어들어가는 사과의 말을 묻어버렸다.

"아무레도 정상인보다는 혈구가 자궁으로 몰리는게 당연합니다.
신장기능의 감소로 심장, 근육, 신경계의 기능이상이 초래되고, 몸이 산성화가 되면 특히 심장과, 신경계에 장애가 생깁니다.
자연분만을 할 경우 엄청난 부담으로 쇼크사할 수도 있고, 제왕절개를 한다해도..."

"잠깐만요!
어려운말 하지 마시고, 쉽게 말씀하세요.
심장이 문제라는건가요?"

"지금, 이해인씨는 급성 신부전증입니다.
신장기능이 10% 이하로 떨어질경우 희망이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임신상태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신부전증이요?"

"네, 신부전증..."

"아기보다 이해인씨의 치료가 우선이라는겁니다."

"저요?"

"아기는......
포기하셔야할거 같은데요."

"신부전증.....
죽는병인가요?"

"그럴수도 있죠. 지금 이해인씨 몸상태로 임신을 계속 진행한다면요.....
그건, 아주 큰 모험입니다."

"..................."

"임신 4개월 말기로 낙태를 하기에도 매우 까다롭습니다.
더 진행되기전에 낙태수술을 먼저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혈액투석, 복막투석, 신장이식수술 여부를 결정해야하구요.
더이상 지체할수가 없습니다.
닷새후 수술 스케쥴을 잡아놓겠습니다.
그안에 보호자에게 계속 연락을 취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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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르르, 프르르, 프르르...프르...."

"정말 훌륭한 말이다!"

눈부신 갈기를 번쩍거리며 물흐르듯 부드럽고 반듯한 주둥이를 내가슴에 푹 파묻는 흑마.
달빛이 흐르는 어스름한 호수 언저리에서 그렇게 흑마를 품은 나의 평화스런 모습이 수면속에 녹아내렸다.

잔잔한 호수와 맞닿은 나의 태평스런 심연.......
나는 언제까지나 그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
정신의 반은 이미 하얀 병실을 떠돌고 있었지만, 점점 희미해져가는 그 평화스런 풍경을 붙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완전히 아득해질즈음 난 "안녕..." 을 중얼거리며 아쉽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쿵!'

순간,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천정을 마주한채 몸이 얼어붙었다.

내 복부에서........

'덜덜' 떨리는 손을 가만히 배위에 얹어보았다.

착각...이었나?

'쿵쿵.....쿵쿵....쿵쿵쿵....쿵'

"흡!"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뭔가가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꿀럭 꿀럭...'

이럴수가......

내 뱃속에서
그 저주의 씨앗이......

경악속에서 얼어붙어있던 난 다시 잠잠해진 내 복부를 살며시 움켜잡고 몸을 옆으로 뉘였다.

'꿀럭, 꿀럭, 꿀럭, 꿀럭.......꿀럭'

부산하게 움직이는 뱃속의 생명체!




"무슨 검사죠?"

"수술전 하는 검사들이요....
펜티 벗으세요!"

의무적인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익숙하게 잘린 하체를 다 드러내 놓은체로 침대에 누웠다.

잠시후,
산부인과의가 곁에 앉더니, 초음파기계를 내 배위에 놓고 조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건성으로 봐왔던 모니터에 눈을 부릅뜨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선생님......"

"네?"

열심히 무언가 체크하고 있는 의사는 챠트에서 눈도 떼지 않은체
건성으로 대답한다.

"저기.....
저게 뭐죠?"

"어디요?"

여전히 챠트만 보고있는 의사에게 좀더 큰소리로 환기시켰다.

"저기요!
저거......
왜 저렇게 머리가 크죠?
기형아인가요?"

의사는 챠트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나를 쳐다본다.
그리곤 초음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말했다.

"아기는 정상이에요.
아직까진 머리가 큰 불균형 상태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도 성숙하게 자라게되죠."

"저건요,
저건 팔인가요?"

".............
이해인씨?"

"선생님,
저거, 다리 맞죠? 그렇죠!
저거, 다리가 맞네요.
엉덩이선하고 허벅지.....
종아리.....발..."

"....................."

"저기,
반짝 반짝 거리는거...."

"심장입니다."

"심장......"

아기!
모든것이 다 정상이었다.
온전한 다리를 앙증맞게 구부린체,
반디불같은 심장을 반짝거리며, 내게 속삭이는듯했다.

'엄마......
그래도,
엄마를 사랑해요......'

"우욱!....."

터져나오는 슬픔덩어리......

"우우욱....
우욱.....
으흐흐흐흑....으윽....으흐흐흐흑....."

오열......

난 지금까지, 아기와 따뜻한 대화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난 지금까지, 아기에게 저주의 주문만 퍼부어댔었다.
난, 아기를 위해서 먹고 싶은것도 없었고,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난, 배를 함부로 움직이며 아기에게 복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아기는 모든게 정상이었다.
다리도 멀쩡했다.
내아기.....

나의 아기였다.

세상 유일하게 나를 의지하고,
내가 보호해주길 바라고 있는........
이 아기는 세상 오로지 나밖에 없는것이다.

내가 겪었던 그 죽음같은 고독을 껴안게 내버려둘순 없는것이다.
나를 거부했던 가족들의 모습으로 내아기를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떤건지.
그 느낌이 어떤건지 아는이상 ......
고독이 얼마나 칠흙같이 암담하고, 온통 죽음이라는것을 아는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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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해!
더이상 말하기 싫어!"

"엄마가 바라는거 아니었어요.
나 죽어나가는거.....
갑자기 왜 이러세요.
서유림 화백!
20년동안 숨겨왔던 불구의딸 병 방치해 숨지게 하다.
뭐 이런거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찍혀 엄마 명성에 치명적인 상처 남길까봐 그러시는거에요."

"이게 정말....."

엄만 팔을 번쩍 치켜든채 불같이 노려봤다.

"훗-!
뭘 망설여요? 때려요!
갑자기 사라졌던 동정심이라두 마구 마구 ??구치시나...."

엄만,
팔을 거두고,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며 소리쳤다.

"니 맘데로 해!
너한테 신경쓸 시간 없어."

"언제는 신경 썼어요!"

엄만, 나가던 걸음을 홱돌려 뛰듯이 걸어와서는 내 멱살을 사정없이 잡아챘다.

"캑....캑.....캐캑....."

"몸뚱이 그리되 병까지 얻었으면, 나죽었소하고 지낼일이지, 왜 이렇게 활개를 치고 다녀.너........"

"웃기지 말아요.
병신된게 내 잘못이에요."

"그래, 너 말 잘했다.
병신 만들어서 복수하고 있는거야. 지금."

" 잘 아시네.
내가 겪은거만큼,
내가 비참했던거 만큼,
다 산산조각 내버릴거야.
모조리!"

'철썩!'

"이 못된년,
이 나쁜년,
그래 이년아, 해볼테면 해봐.
니년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 되먹지 못한년....
넌, 그때 죽었어야해.
그때, 널 살리는게 아니었어.
니 몸뚱아리에 도사리고 있는 병덩어리 보면 모르겠어.
넌 천벌을 받은거야...."

"해인이...
놓으세요!"

엄마를 노려보던 내 시뻘건 증오의 눈빛이 어느덧 놀라움으로 변했다.

진재오빠.....
진재오빠가.......

찌르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던 어깨가 스르르 풀리는게 느껴진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