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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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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BY 유수진 2000-05-09

오랜 시간을
내 분신들의 영혼을 달래고 있었다.

문득,
기척이 없는 미영을 돌아다 봤다.

그림속의 초상화같은 모습으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감각의 눈빛.

엄마와는 또다른 느낌이다.

난 차갑게 말했다.

" 집 키는 이제 반납해!
다 끝났으니까..... "

대꾸없는 그녀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장농문을 열어, 옷가지들을 골랐다.

한참을 뒤적이고 있는데,

짜증이 났다.

3년여를 함께 지낸 미영과의 기본적인 의무감.

미영도 이랬겠지.
이런, 짜증나는 의무감으로 나를 가르쳤겠지.

끝나는 마당에 그녀의 느낌을 오롯이 전해 받다니....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잡초.
난, 누군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의무감보다는 더 큰걸 원했던게 사실이다.

그럴 여유가 그녀에게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 왜 그러고 서 있는거야.
이틀 못채웠다고 월급 까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돌아가! "


" 니가,
지금 꾸미고 있는 짓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중이야. "

난, '덜컹' 했다.
그녀가 들었구나!


" 그래서.....

그래서 어쩌겠다는거야.
엄마와 함께 그 끔찍한 소굴로 집어넣을 생각이라면,
마음데로 해!
니가 알았다고 해서 내 계획을 바꾸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

" 이 해인!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살 순 없는거니.
왜 그렇게 끝없이 반항이야! "

" 너..........
니가 뭘 안다고 그런소릴 해! "

" 아는거 하나 있지.
내 주인이었던 넌 결코 착한 천사는 아니었다는거. "

" 호!
이제야 좀 표현을 하네.
그동안 얼마나 참았겠어.
끝나는 마당이니, 다 퍼붓고 가!
들어줄테니까........ "



" 니가 세상을 알어? "

"....................."

" 니가 만만하게 보는 세상에 정면 도전을 해볼 모양인데....
그래.........
해봐!

사각의 조그만 새장에 갇혀있던 날개꺾인 새 한마리가 그 거칠고 황폐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결과는 뻔하지만.....
널 알지.
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까..... "

"세상에 정면 도전?
후후.......
넌 날 안다고 하지만........
그래........
지금 내 상황에 일일히 설명할 마음의 여유 따윈 없어.
니가 그래 왔듯.......

돌아가.......... "



" 난 만일.......
다리가 없는 네 처지를 나와 바꾸라면, 바꿀거야! "

난 분노로,
금새 그녀를 향해 튀어 내릴듯 잔뜩 긴장해서 소리쳤다.

" 나가!
빨리 나가! "

" 니가 세상을 알어?

세상은...........
아무런 언덕없이 내팽겨쳐진 회오리의 황량한 벌판에,
끝없이 일어나도, 넘어지는,
일어나려고해도 넘어뜨리는......

인간들 사회에 통용되는 쇠붙이를 충혈된 눈으로 쫓아다니며,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들고.....
육체 썩는 냄새로 가득한........
그곳이 세상이란 곳이야.

니가 아니? 그런걸......

어느날........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힘든 언니를 대신해, 오빠들 등록금을 내미는 동생이 수상해 뒤를 밟았을때, 학교로 들어가야할 애가 음식점 아르바이트를하고, 밤에는 술집에서 웃음을 팔고, 몸을 팔고....

인간들이 세상에 뿌려놓은 그 쇠붙이를 쫓아
선택된 자들의 테두리밖에서 서성대고 있는
가진것 없는 자들의 허탈한 신음소리들......

차라리 니가 있는 이 새장이 그리울때가 있어.

차라리 내 두다리를 절단해서라도 이 생활속에 찌든 무시무시한 통증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내 사랑하는 형제의 황폐해진 생각과, 더렵혀진 몸을 누가 보상해 줄수 있을까.....

몰아가는 이 인간들? 세상?

가난이 불편할 뿐이라고?

죽음보다 더 무서운게 '가난'이야.

차라리 다리 없는 불편이 내겐 더 그리워. "

".................. "

" 니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에 대해
한번쯤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해본적 있니?

니가 누리는 그 풍요를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갈구한다는거 잊지마!

간다! "

'쨍강!'

열쇠의 날카로운 쇳소리를 마지막으로
초록색 하프코트를 들고 방을 나가는 미영의 뒷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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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옷가지들 뿐이니? "

묵묵히 머리를 빗으며, 엄마가 들고 들어온 빨간색 트렁크에 시선을 던졌다.

" 더 필요한거 있으면, 나중에 갖다줄께.
성당 다녀와서 점심먹고 바로 출발할꺼니까,
준비하고 있어. "



정원에서 들려오는 부산한 소리에도 난 묵묵히 머리만 빗어댔다.

화니.........
해빈 오빠........
경빈이.............

지금,
내 시야를 가득 메운 그들............

그리고,
진재오빠............................................


들고 있던 브러쉬를 침대에 '휙' 던지고는 창밖으로 그들의 차가 완전히 사라진것을 확인한 후 시계를 봤다.

9시 40분.

엄마가 던져 놓고간 트렁크에 옷가지들을 쑤셔넣고, 진재오빠가 선물했던 붓셋트와 물감, 파레트, 그림도구 몇가지를 순식간에 챙겨 넣었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뭘 해야하지.......?

초조했다.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열린 트렁크 사이로 빼꼼히 삐져나온 파레트를 밀어넣었다.

멈칫!

그 파레트를 다시 '쑥-' 빼서는 활짝 펼쳤다.

'툭!'

진재 오빠가 제주도에서 찍었다는 섬 사진.

아마도 그때, 그림을 그리다가 금이간 파레트에 속상해하며,
무심코 사진을 파레트에 끼워넣어 보관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진재오빠 편지에 이 물감셋트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온전히 이 한장의 사진과 함께 남아있는 유일한 그의 흔적이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줍는데,
그의 환한 웃음소기가 들려왔다.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해인이 다운 천진한 생각이야. '

' 해인아......
내가 너와 결혼하려는 이유는 딱 한가지야.
니가 좋아! '

' 미래를 구상했어.
너와 함께 파리로 날아갈거라는...... '

' 해인아.................'

' 째액~~~~~짹짹짹짹- 짹. '

집안을 뒤흔드는 벨소리.

'쿵쿵쿵쿵.........'

몸 전체를 들었다 놨다하는 내 심장소리...........

온몸이 바들 바들 떨렸다.

또, 밀려드는 후회............

무서웠다.

시계를 쳐다봤다.

10시 30분.

심호흡을 크게 하고, 휠체어를 돌려, 경빈이방 입구로 나갔다.

인터폰의 무게가 천근, 만근 처럼 느껴졌다.

하현수.

확인을 시키려는듯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는, 화면가득 '씨익' 웃는 그의 모습에도 난 버튼을 누를수가 없었다.

이 버튼을 누르면...........................................

모든게 끝나는 것이다.


망설이고 있는 나를 하현수는 다급하게 불렀다.

" 야!
뭐하는거야?
안열어줄꺼야...... "

눈을 감았다.

' 화니 안녕!

해빈오빠

경빈이................안녕.

진재오빠....................사랑했어. '

'찌이잉-'

문은 열렸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