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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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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BY 유수진 2000-04-17

- 해인!

요즘 졸업작품때문에 네게 영 신경을 못쓰는구나.
내 사진들이 너의 작품으로 어떻게 탄생했을지 당장 달려가 감상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은데....
요즘은 눈뜨면 바로 저녁이 되어버리고....
정말 바쁘다.
졸업작품에.... 논문에.....
잠시 짬을 내어 너를 그려봤다.
이상하지.
통 그릴수가 없는게.....
너의 큰 눈망울....
하얀 얼굴....
꾹 다문 작은 입술.....
영상은 떠오르는데 도저히 도화지위에 옮길수 없었어.
보고싶다. 아주 많이.....
졸업작품과 논문 마무리 하는데로 우리 할머니와 아버지께 널 데리고 갈 생각이다.
이제 부딪치자!
졸업후엔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거야.
물론, 해인이와 함께.....
너의 화니나무의 화니상자를 열고 세상에 기회를 주자.
멋진 작품 감상할 기회를.....
나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운 너의 분신들을......

진재...

'벌컥!'

진재오빠의 편지를 읽고 있는데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뭐하는거야!"

난 노크도 없이 내방문을 요란하게 열어제낀 경진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너 진짜 이상한 기집애야.
요즘은 도둑고양이 짓 때려쳤나보지! 진재오빠 할머니 와 계신데도 도둑고양이 아지트에 얼씬도 안하고있고....."

난 놀란 표정으로 눈은 계속 경진을 노려보며, 진재오빠의 편지를 책상서랍에 넣었다.

떨림이 느껴지는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려 2층 거실 입구 그자리로 갔다.

경진은 곧바로 내 뒤를 쫓아와서는 멀찌감치 떨어진곳에서 영탐에 동행했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신경이 쓰였지만, 난 진재오빠의 할머니를 보는게 더 시급했다.
몸을 최대한 빼 할머니를 봤다.

진재오빠의 할머니는.....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컷트머리에 몸집이 있으신 조금은 남성스러운 느낌으로, 활동적인 디자인의 검은색 쌔미정장을 하고 계셨다.

"어떤 인연으로 어떻게 얽혀서 우리 진재를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마지막 남은 성한 손자 온전한 육신의 배우자 만나길 바라는 이 늙은이 소박한 소원때문에 이렇게 불쑥 방문하게 됐습니다.
진재 그놈이....
어려서 지 엄마 여의고, 형 다리 그렇게 되는통에 형 다리노릇까지 다 한 놈인데.....
아! 이제 좀 그 수발에서 벗어나나 했더니, 글쎄 사귀는 아가씨가 두다리가 없다는.... 흠.
....죄송합니다.
제가 좀 흥분을 해서.....

남은 인생을 또 넘 다리노릇을 하며 보내야한다니....
그놈 인생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몇년을 사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유림 화백 따님을 사귄다는 전화를 받고 진재한테 확인을 하려고 하다가, 전화하신분이 집 위치하고, 전화번호까지 상세하게 알려줘서, 우선 찾아왔습니다.

이 늙은이 마지막 소원입니다.
제발 없던것으로 치시고, 단념좀 시켜주세요."

마음의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진재오빠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난, 너무 놀라 두려움에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증오의 눈빛으로 경진을 돌아봤다.

경빈의 방문에 팔장을 낀체 비스듬히 기대서 있는 그녀.

경진의 침실 벽에 걸려있던 사진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입가엔 일그러진 미소를 희미하게 띄운체.....

"어르신.....
우리애는 이제 갓 스므살입니다.
결혼따위 생각하고 있지도 않구요.
어르신 생각하시는 그런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테니 안심하고 돌아가세요."

덤덤하고 낮은, 또박또박한 엄마의 목소리가 진재오빠 할머니의 크고 걸걸한 투박한 소리와 완전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네....?
그럼, 혹시......
이 늙은이가 주책을 부린건지....
전화말만 믿고 허둥지둥 왔는데.....
혹시....
그런건가요?"

"네!
잘못 아셨어요!"

"아................
아이구........
이거..... 죄송해서.....
어쩐지.....
진재녀석말을 들어보고 왔어야 하는건데....
이거, 죄송해서 어쩌지요.....
아휴~ 늙으면, 느는게 쓸데없는 노파심뿐이라....."

"제가 지금 나가는 길이라서요.
이만........"

"아!....
예! 예!
알겠습니다.
그냥 이렇게 불쑥 찾아온 제 잘못이지요.
그럼......
만나뵈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서유림 화백님......."

난 아래층의 혼란이 수습될때까지 경진을 잡아먹을듯 노려보고 있었다.

경진도 아래층에서 아줌마가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리자, 그제서야 내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잘린 허벅지위에 놓인 꽉 움켜쥔 주먹이 부들 부들 떨렸다.

"너, 잘하면 또, 나 친다고 달려들겠다."

가까스로 내뱉은 내 음성이 떨림으로 굴곡이 느껴졌다.

"너....!........."

"................."

"진재오빠 할머님께 전화한거지!"

"푸-!............"

빈정거리듯 '피식' 웃는 그녀의 얼굴을 갈겨버리고 싶었다.

"악마같은년....
이런다고 니가 진재오빠와.....
.............................
너같이 더러운년이 진재오빠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하현수와의 그 더러운짓거리들을 즐겼던 너따위가....."

'흠칫'놀란 경진의 눈빛이 내 눈빛과 같아졌다.

그녀는 내앞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다가 멈춰서더니, 나를돌아보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명심해!
내가 가질수 없다면, 넌 더더욱 가질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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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밤을 하얗게 보내고, 충혈된 눈으로 내방 창문으로 따사롭게 내리쬐는 겨울햇살의 포근한 아침을 맞았다.

밤을 새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서서히, 주일아침을 알리는 부산한 인기척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밤새, 잠잠하게 나와 어둠을 나눠가졌을 거대한 쇳덩이들의 요란한 소리.

'부릉 부릉 부릉 부르르르르르르르르르ㅡ르..............'

가족들을 위해 몸을 데우고 있는 그들은 나보다 나은 존재같았다.
그들을 위해 뭔가 도움을 주는 그 쇳덩이들이.....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걸리적거리기만 하는데.....

우울의 늪에 빠져 내 육신이 밑으로 밑으로 푸욱 꺼져들어갔다.
'스르르'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들면서, 칠흙같이 새까만 암흑덩어리가 나를 '낼름' 삼켜버렸다.

얼마를 까맣게 잤을까......

소란한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나 죽는꼴 보려구 그래요.
해빈아! 경빈아! 뭐해!"

집안 구석구석 울려퍼지는 엄마의 고성에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4시를 향하고 있는 초침.

잠시, 새벽4시경인지 대낮인지 혼란스러워 창밖을 봤다.
훤- 했다.
가족들은 벌써 미사를 맞치고 왔을 시간이다.

갑자기 밀려오는 허기.

짜증이 났다.
어김없이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내 짐스런 몸뚱아리가..

문득, 엄마가 왜 저러는지 궁금해서 휠체어에 무거운 몸을 털퍼덕 앉히고, 바퀴에 손을 얹었다.

"어머니!
해인이만 보고 갈께요.
해인이한테 할말이 있습니다.
잠깐이면 돼요.
10분만, 아니, 5분만......"

진재오빠!

정원쪽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난 후다닥 내달려 창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정원 중간쯤에서 온몸으로 막아선듯한 포즈의 엄마와 만류하는듯 서있는 해빈오빠, 경빈이.
그앞에 마치 죄인인양 서있는 진재오빠.

'드르륵' 열린 내방 창문소리에 모두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타까움이 가득담긴 진재오빠의 눈빛.

'진재오빠.........'


"들어가지 못해!"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난 '움찔' 놀라 그를 다시한번 쳐다봤다.

"해인아........"

안타깝게 나를 부르는 그를 보면서, 난 천천히 물러나 내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진재학생!
자꾸 이러면 해인이한테도 좋지 않을거에요.
더이상의 방문은 삼가해주세요."

"엄마!"

"해빈이!
너도, 진재학생 만나려면 밖에서 만나. 알았지!"

난, 뒤로 물러선 휠체어에 깊숙히 몸을 묻은체, 담담해져가는 나를 온몸으로 느꼈다.
언제나, 극한 상황에서 담담해지는 나의 그 버릇.

'벌컥!'

'엄마가 참 빨리도 달려 오셨구나!"

체념한듯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창밖만 응시한체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데, 내 책상서랍을 거칠게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렸는데 경진이 집요한 눈빛으로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난 스프링처럼 튀어내려,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리 내!"

"어엇-"

'꽈당당탕탕탕탕탕탕.......'

진재오빠의 편지며 사진들을 양손에 가득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다리를 팔로 걸어 쓰러뜨렸다.
재빨리 그녀의 배위를 타고 올라가, 잘린 허벅지로 목을 조였다.

"허억-!"

다급한 경진의 짧은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주먹을 필사적으로 폈다.

'파파파파팍 파 팍-'

집요한, 내 힘에 의해 펴진 경진의 주먹에서 쏟아지는 편지며, 사진들......

그걸 움켜쥐는 순간, 목을 마치 칼로 찌르는듯한 무서운 통증이 '확' 느껴졌다.

"어억-!"

경진은 손으로 내목을 사정없이 밀어 부치며 악을 썼다.

"비켜!
이 병신아-"

난 목과 턱을 강하게 누르는 그녀의 억센 손힘에 숨이 턱턱막혔다.

"흡.... 흡..............."

숨이 가빠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난 뒤로 발랑 넘어졌다.

"꺽컥.... 꺽컥... 컥....캑-"

벌개진 얼굴로 마른 기침을 하고 있는데, 하얗게 질린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의 부들 부들 떨리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는거야."

"누나!...
괜찮아?"
하고 달려드는 경빈의 손을 난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건드리지 마!"

미치도록 화가 치밀었다.

방문앞에 엉거주춤 서있는 해빈오빠를 그기분 그대로 올려다 봤다.

'해빈오빠!

이런 모습으로 대면하게 되는구나.'

그 와중에도 난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엄만, 나와 해빈오빠를 번갈아 보시더니 말했다.

"해빈인 내려가거라."

".....................
엄마........"

"어서!
경빈이도 이리나와!"

나를 쳐다보던 해빈오빠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경빈이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짧은 순간 이런 모습의 나와의 첫대면을 뒤로한체, 천천히 자리를 떴다.

방문앞에서 슬픈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사라지는 경빈에게 불현듯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해인인.....
이번달안으로 경기도에 있는 '은총'요양소로 떠날 준비 해!"

아득히 꿈속에서 들리는듯한 엄마의 소리.

놀란입을 다물지 못한체, 쳐다보는 내게 엄만 예의 그 얼음짱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너도 너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과 지내면, 생활하기 훨씬 편할거야.
................
거기서, 친구들도 사귀고, 그러다보면, 또, 너와같은 입장의 좋은 사람도 만나게 되는거고.....
................
사람은 끼리 끼리 만나야 행복한 법이야."

"싫어요!"

단호한 내 거부에 엄만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다 그 눈빛만큼이나 차갑게 말했다.

"싫어도 할 수 없어!
넌 가야해!
...........................
그게, 널 위한 우리들의 마지막 배려니까........."

난..........

난, 불같은 분노로 온몸이 화끈거렸다.

벌게진 얼굴로, 눈에는 불화산을 담은체 엄마를 노려봤다.

나의 이런 버릇없는 눈초리에도 엄마는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한결같은 그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얼음같은........

난.......

외면했다.

경진이 일그러진 미소로 나를 비웃는 모습이 보였다.

진재오빠의 사진 뭉치들을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스르르' 빠지는것을 느꼈다.

'파바바박,파바박-..............'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