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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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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유수진 2000-03-16



늦은밤.
정원의 운치있는 등 불빛에 '화니'의 모습이 더욱 고혹적으로 보인다.

'화니'는 뒤뜰 은행나무에게 지어준 이름으로, 화니의 밑둥에는 경빈이와 나만이 아는 보물이 묻혀있는 곳이다.

보물은 다름아닌, 엄마의 작품전 테마들을 그려낸 나의 작품들로, 화니의 상자속 높이가 이제 제법 된다.

'자궁'

이번 엄마의 개인전 테마주제다.
나의 작품 3점도 경빈의 감상이 끝난후 미술관대신 화니의 상자속에 소중하게보관된다.

난 내 보물1호인 화니상자를 한참 들여다 봤다.

"누나!"
경빈의 소리에 놓았던 정신을 수습하고 난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경빈아, 만약......
만약, 내가 이 그림들을 세상에 내 놓을 수 없을때는 니가 내 대신 이 그림들 볕으로 끌어내줘."

경빈은 눈이 동그래지며, 예의 그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밝게 말한다.

"누나, 그러지마, 무서-
이 그림들 같이 햇빛 보여주기로 했잖아.
꼭 영화 주인공처럼... 왜그래, 그렇게해도 하나도 안이뻐."

"후후.... 그래 그냥.....
만일, 만일 말야, 만일 그렇게 되면...."

난 잠시 생각하다가 경빈에게 눈을 흘기며 다시 말했다.
"넌 벌써 니 짝 한테 빠져서, 이 누나 괄시 하니?"

"하하하...
그래ㅡ, 솔직히 내 짝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이뻐!"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의 갈 곳이 어드메뇨. 이이이~ 이이이~ 이~~~
야! 울 집이냐? 울 집이냐고~ "

"이 자식이~
이 해빈! 정신차려. "

정원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오빠의 우렁찬 노래소리에 우린 놀라서 서로 마주보다 초인종 소리에 경빈이,

"누나! 여기 있어, 내 얼른 문 열어주고 다시올께! "
라며, 뒤뜰을 지나, 정원쪽으로 뛰어간다.

난 화니상자 위를 덮었던 돌맹이들을 제자리에 놓고 부랴 부랴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정원쪽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줌마가 뛰어나가는 모습 뒤로 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어이구~
우리 어린왕자,
뭐했쪄? 뭐하고 놀았쪄?"

"형....."

"아이구마, 해빈학상 엉망으로 취했는가벼"
"이 해빈! 왠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안녕하십니까, 해빈이 군 동기 김 진재라고 합니다.
26사단 동기들과 만나 한잔 했습니다.
하하... 짜식이.... 얼마 안 마셨는데 이렇게 취했네요. 죄송합니다....."

엄만 약간의 원망 섞인 목소리로
"아유~ 우리 해빈이 술 잘 못하는데요."
하시며 아줌마와 경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가는 해빈오빠를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현관문으로 그들이 사라질즈음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건성으로 말한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드시고...."
"아.... 아닙니다. 다음에 또 뵙죠. 뭐.
그럼 안녕히 계십시요" 하고는 황급히 대문밖으로 나간다.

엄마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한번 문을 확인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급하게 들어가신다.

엄마가 들어간것을 재차 확인하고 휠체어를 대문쪽으로 돌렸다.

해빈오빠가 부축을 받으며 지나간 자리를 천천히 더듬어 갔다.
오빤 무슨 술을 저렇게 많이 마신걸까?
해빈오빠의 술취한 모습을 처음 본 난 약간 충격을 받았다.
고민이라도 있는걸까?
혹시 나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헛기침 소리가 났다.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휠체어바퀴를 헛돌리다 하마터면 휠체어에서 떨어질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대문쪽을 쳐다보는데.....

한 남자가 보조문 세로 창살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난 기겁을 하고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얼른 한 손으로 틀어 막았다.

도망가려는 나를 그는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저기요!"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어깨에 목을 한껏 움츠려 넣고 천천히 몸을 틀었다.

"해빈이 가방 전해주는걸 깜빡했는데...
잠깐 문좀 열어 줄래요?"

그제서야, 그 남자가 아까 해빈오빠를 부축하고 왔던 김 진재라는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너무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행동조차 취할 수가 없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저쪽세상에 대한 두려움, 호기심 이런 여러가지 감정들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게다가, 10년 넘게 잡아보지 못했던 딱딱한 느낌의 쇠고리며, 마치 감옥의 쇠창살처럼 위로 뻗은 무시무시한 쇠문을 열면 온갖 사악한 것들이 삽시간에 나를 집어삼킬것같은......

순간!!

눈이 멀어버릴것같은 강한 빛이 온몸을 삼켜버릴듯 나를 빨아들였다.

빵!빵!

경진의 자동차 크락션 소리!

난 있는 힘껏 휠체어를 밀며 나를 삼켰던 그 빛속에서 도망쳤다.



화니에게로 왔을때, 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내 어깨를 꼭 감싸안았다.

누군가 날 쫓아오는것같은 두려움에 왔던길을 쳐다보니 경빈이 뛰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시간이 멈췄다 다시 흐르는 것처럼.....



'휘이휘이휘이이이이잉~'

사나운 바람소리가 혹독하게 창문을 때리고 그 무서운 바람소리에 실려 저들의 신음소리가 악마의 울부짖음처럼 내 방 천지를 진동시킨다.

언제나 그랬다.

경빈인 수학여행, 해빈오빤 3박 4일 MT, 엄만 작품 준비로 이태리로 날아가셨고, 아빤 출장중이시고, 아줌마는 경진의 입김으로 딸내에 보내놓고, 이 큰집이 비는 그 때를 맞춰 경진은 하 현수를 끌어들여, 저 더러운 짓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화판을 끄집어 냈다.

스케치!

겨울에 어울리는 죽은 고목나무를 거칠게 그려 내려갔다.
썩은 가지중 가장 튼튼한 가지에 밧줄을 묶어 놓고 늑대와 비슷하게 생긴 짐승의 목을 감아 데롱 데롱 매달았다.

칠흙같은 어둠속에 죽어가는 짐승의 두 눈만이 게슴츠레 빛을 발한다.

난 이런밤이 오면 저들을 이렇게 죽였다.

수없이......

내 저주의 그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무사히 살아내고 있는 저들이 싫다.
죽이고 싶도록......

검은 물감을 거칠게 파레트에 찍어 넣었다.

"아아아아아아아~ "

경진의 신들린듯한 야릇한 비명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뒤이어,
현수의 둔탁한 비명소리도 흘러나왔다.

이제, 끝난것이다!

저 악마들의 울부짖음이.....

바람소리마저 그 기세가 꺾인듯하다.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단숨에 '검은죽음'에 색을 입히고,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만큼 피곤에 지쳐 암흑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꿈에....
그 죽은 짐승을 언뜻 본것같은데.....



"아이구마~
무시라.......
이기는 꼭 그려도 이런것만 그린데이....
미?는갑따."

아줌마의 기겁하는 소리에 나도 놀라 벌떡 일어났다.

"니는 우째, 미운짓만 골라하노....
이기 무신...... 그림을 그려도 꼭...."

난 아줌마를 노려보며 잠에서 덜깬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에요!
노크 할줄 몰라요!"

"어이구 어이구.....
밖에서 그래 불러도 대꾸도 안하드이만,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줌마를 노려보는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움찔' 하더니, 홱 돌아서며
"2층 식탁에 밥 차려놨다! 처묵어라....가스나가 눈알을 확....."
궁시렁 궁시렁 중얼거리고는 방문을 꽝 닫고 나가버린다.

난 그녀가 나간 방문을 한참 노려보다가 화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완성이 안된 상태.

새 붓을 들었다.
흘깃 시계를 보니, 12시가 훨씬 지나있었다.

문득, 그 악마들의 행적이 궁금했다.

그림을 완성시키고,
옷을 챙겨입고, 휠체어에 올랐다.
배가 너무 고파서, 현기증까지 났다.
문을 열고, 2층 식탁으로 가는데, 거실 배란다 유리문앞에 누군가 서 있는게 아닌가.

'끼익-'

내 휠체어 바퀴소리에 그 남자는 몸을 돌렸다.

난 놀란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보고 섰다.

그는 하 현수 였다.

그가 아직 안가고 이 집에 있다니.....

내 눈은 놀란 표정에서 이미 경멸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하 현수는 한쪽 눈을 찡끗 하더니 특유의 능글스런 음성으로 말한다.

"잘 잤니, 늦잠 꾸러기 아가씨!"

난 식탁으로 몸을 돌리고 가던길을 계속 갔다.

하 현수는 내게로 성큼 성큼 걸어오며
"내가 식탁의자에 앉혀줄까?" 하고는 양팔을 내게로 벌리는게 아닌가.

난 휠체어 바퀴를 힘껏 뒤로 밀었다.

하 현수는 약간 놀라며 멈칫하더니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나도 그 시선에 맞섰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서있다가 "피식"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해인..... 너무 그러지마.
나 볼때마다 그렇게 잡아먹을것처럼 쳐다봐서 좀 친해지자고 노력하는건데...
성의를 생각해야지.....
땅꼬마였을때는 잘도 따르더니 왜그래?"
그는 순식간에 내 코앞에 얼굴을 디밀고 속삭였다.

"경진이하고 잘때마다 니 방에 불켜져있는거 봤어.
너두 이제 다 컸는데 알건 다 알 나이고.....
이 집에서 어차피 니 편 없는거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또 알아?
나라도 니 편으로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너한테 도움 줄지....."

내 두 팔은 이미 그의 억센 손에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때, 다리라도 있으면, 이 자식을 사정없이 걷어 차버릴텐데...'

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비명소리는 그의 더러운 입술이 삼켜버리고....

온몸이 부들 부들 떨렸다.

그가

언제 내 팔을 놨는지도....

어느새 내 앞에서 사라졌는지도.....

그렇게 나는 정신이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