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딩동~."
영감이 잽싸게 대문 키를 누른다.
"아니~. 누구냐고 좀 물어보고 열어 주라니깐요."
벌써 여러 번째 하는 잔소리다. 아니. 그건 그렇고 그럴 땐 번개 같으네. 이젠 다 나은 겨? 아무튼 이젠 걱정을 덜었는가 싶어서 반갑다. 영감의 움직임이 반가워서, 미쳐 현관을 내다볼 채도 못한다.
"우리가 왔어요~."
오이~ㅇ?! 막내딸 아이의 목소리가 아닌가.
"아니. 미리 연락도 없이."
그러나 나도 오늘쯤은 막내딸내외가 오지 않을까 하고 장을 봐 놓기는 했지.
"ㅎㅎㅎ. 미리 연락하면 엄마가 바빠지실 것 같아서요."
사위가 들으면 뭘 그리 잘 해줬냐고 면박을 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우리 집을 찾는 손님 중에 가장 어려운 사람이 사위다. 자고로, 사위는 백년손님이라지 않든가. 그가 내 막내사위가 된 지 10년째지만 어렵기는 여전하다.
그러나 곧 나는 사위의 두 손에 무겁게 들린 것들에 눈이 가자 웃지 않을 수가 없었지.
'00복국'
아하~ㅇ! 오늘은 복국을 들고 왔구먼. 그 유명하다는 압구정동의 복집을 들러서 왔다는 소릴세. 영감이 지난 번에 잘 먹던 기억을 했나 보다. 딸아이는 에미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내 집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4인분의 먹거리를 들고 온다. 주객이 전도 된 격이어서 처음에는 미안하고 송구스럽더니, 이젠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니 것도 버릇이 됐구먼.
포장을 유별나게 잘해서, 데우지 않아도 아직 복국이 따끈하기까지 하지 않던가. 반찬 종류까지도 섬세하다. 김치, 멸치볶음. 해초, 양념고추장에 젓갈 등, 그만하면 꼴 적은 우리 집반찬 서너가지만 꺼내 놓으면 한끼 식사가 족하다. 수저만 얹으면 훌륭한 한 끼 식단이다. 이제는 영감도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고 말없이 나와 앉는다. 참 좋은 세상이다. 아니, 참 편한 세상이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과일로 후식을 마치자, 막내딸아이가 커다란 쇼팡빽을 연다.
모양도 예쁜 가방이 우루루 쏟아진다.
"짜~ㄴ! 엄마는 어느 게 제일 맘에 드세요?"
"이거 다 우리 줄 거야? 음. 이거 맘에 든다. 근데 왠 가방이야?"
"여보. 내가 잘 골랐지? 엄마가 이거 맘에 드신대잖아요. 이건 아래층 아가 거. 이건 새언니 것."
"아니 니네 로또 맞았니? 여행경비도 솔찮았을 텐데 식구들 선물까지 골고루도 챙겼네."
딸 내외는 보름간의 '미주횡단 여행'을 마치고, 빠진 강의를 바쁘게 땜질을 하고 오늘 내 집에 온 게다.
막내딸 내외는 딩크족(DINK)이다. 결혼 10주년을 기념하여, 보름 휴가를 얻어서 미국횡단을 다녀 온 것이다. 요번에는 거금도 마다않고 애완견 치와와까지 데리고 다녀왔다ㅎ~. 7년의 년상년하 커플이지만, 부부가 어쩌면 그렇게 맘이 잘 맞는지.... 부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결혼 10년째지만, 그들이 다투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올시다 하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잘 맞추어 사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사위가 덩치가 좋고 내 딸아이가 몸집이 외소한 편이어서, 말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년상년하커플로 보지 않는다. 천생연분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점심을 먹고나자 딸의 설거지를 돕던 사위가 묻는다
."어머니. 컴퓨터 손 볼 데 없습니까?" 그는 컴 박사다. 우리 집에 오면 의례히 내 컴퓨터를 점검한다. 사진 올리기를 그 동안은 잘 했는데, 한참을 손을 뗬더니 작업하는 걸 잊어버렸다. 사진을 올리고 옮기는 것을 알려주고는, 안방의 TV도 점검을 한다. 이제는 딱히 내가 원하지 않아도 먼저 일어나서 바쁘게 움직인다. 내친 김에 에어컨도 손질을 해서 커버를 씌운다. 아구구~. 착한 내 막내사위! 사돈들은 어쩜 아들을 이리도 잘 키우셨을꼬. 키우시기는 사돈이 잘 키우셨으나 덕은 내가 보는구먼.
그 동안 나는 장을 봐다 놓은 것들을 손질해서 저녁을 준비한다. 영감이 좋아하는 바지락을 곁들인 대구 매운탕, 오징어 무침, 훈제오리고기를 손질하자 막내딸이 쪼르르 다가온다. 참 오랜만에 보는 익순한 풍경이다.
"옴마. 나 한 입만."
막내딸이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머리를 들여민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모양새다. 이 아이가 어릴 적이 생각난다. 주방에서 제 입맛에 끌리는 냄새가 나면, 막내딸은 불이낳게 주방엘 드나든다.
"엄마. 엄마."
나는 이 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요구를 알아챈다. 돌아보면 제 손위의 오빠가 언제나 멀지감치에서 딴전을 피우고 있는 바로 그 찰라다. 언제 적 이야기인가. 다시 그 시간이 한 번만 더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더 젊어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30년만 어려졌으면 좋겠다. 한창 공부 중일 때라면 좋겠다는 말씀이야. 나는 더 좋은 환경을 만들고 경험한 대로, 좀 더 나은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는데.... 그래서 아이들을 좀 더 큰 인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막내딸의 차가 집을 떠난지 한 시간쯤 지나자 문자가 온다.
"옴마. 우리 집에 잘 도착했어요~^^"
폴짝 폴짝 뛰는 리모콘이 소리를 치는 듯 뒤따른다.
"엄마~! 안녕히 주무세여~. 사랑해여~."
나도 잘 자라는 귀여운 리모티콘을 하나 날린다.
"엄마도 사랑해~! 우리 사위도~."
시계는 자정이 다가오지만, 내게는 아주 짧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