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 번째 해외 생활은 스페인에서였다. 모로코에서 입국한지 10개월 만에 다시 시작된 해외살이 였다. 스페인에 왔을때 가장 눈에 띄인 것은 이색적인 건물이라든가 길거리 광고판의 낮 뜨거운 사진, 또는 아무데서나 부둥켜 안고 있는 젊은이들이 아니라 황혼녘에 개를 끌고 산책 나온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가끔 부부가 함께 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혼자서 하릴없이 개를 데리고 왔다갔다 하는 모습들이 평화롭다기 보단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그 당시 30대였던 나는 그 이후로 늙어서는 절대로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다. 매일 아침 아이들 스쿨버스를 태우기 위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다정스런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를 향한 쪽으로 하얀 머리를 약간 기울인 체 무슨 이야길 하는지 시종 미소 띈 얼굴들이었다. 할아버지 키는 어림잡아 180cm정도, 할머니는 155cm 엄청난 언발란스 이지만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으세요 하고 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꿈꾸곤 했다. 3,40년 후 나와 내 남편의 모습이 저들과 같기를.
하지만 늙어서 나와 함께 해야 할 남편을 생각하면 속상했던 일이, 그리고 칭찬할 일 보단 나무랄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회사 일 속에 파묻혀 아내가 무슨 생각하며 사는지,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아이들 학교 생활은 어떠한지 관심을 가지긴 커녕 대화를 나눌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가끔 부부로 산다는 건 이런게 아닌데, 가족은 이런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때면 잠시 우울 해지곤 했다. 그래서 내가 침울에 빠지면 좀 달래주면 좋으련만 내 남편 그런 재주도 없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는데 집에선 좀 편하게 있자며 오히려 나를 나무랬다. 내 기분이 어두워 지면 온 집안의 웃음이 사라지니 괜히 내가 몹쓸 죄인 같아 얼른 기분을 다잡아야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남편을 미워할 수 만 없었던 건 아마도 연민 때문이 아닌가 싶다. 30대 초반, 연년생 아들 둘 키우느라 정신 없을때 어느 선배 언니가 말했다.
"야, 십 년만 더 살아 봐라. 그땐 사랑이 아니라 연민으로 산다. 괜히 밉고 속상하고 그래도 왠지 불쌍한 마음이 들고 그런다. 불타는 사랑이 아니라 연민으로 산다."
그랬다.
피곤에 절어 코를 골아대는 통에 잠깨어 일어나, 남편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고쳐 먹곤 했다.
나이 들어 아이들이 내 품을 떠났을때 결국 남는 건 남편 뿐이지 않는가? 나이들어 나와 함께 할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나보다 어쩜 나를 더 많이 알고 있을지 모르는 내 남편, 내 가장 좋은 친구가 될 내 남편. 미워하지 말자, 서운해 하지 말자, 남편이 나한테 관심이 50 이면 난 100을 가져주자, 남편보다 내가 더 많이 이해하자, 더 큰 사랑을 하자고.
매일 아침마다 만났던 노부부들, 그들의 인생 여정도 어찌 항상 아름 답기만 했을까. 햇빛 드는 날도, 폭풍우치는 날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아름답게 헤쳐 나왔고 인생의 황혼기에 마지막 향기를 함께 나누고 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이 공부를 위해 뿔뿔이 흩어지고 1년에 한 번 다 같이 모이기도 힘들게 된지 오래다. 남편과 둘이서 산지 10년 가까이 된다. 아직 그들 부부의 연배에 미치지 못하는 나이 이지만, 아직도 나는 그때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품고있다. 가끔은 밉기도 하지만, 아내 위할 줄 아는 마음이 조금 커진 남편과는 좀 더 친근해지고, 때론 친구처럼 편안하기도 하다.
이미 고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그들 노부부는, 어느 30대 동양 여자가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처럼 살기를 바랬다는 것을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누군가 우리 부부의 사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아름답게 늙어갈 수도 있구나, 나도 저렇게 남편과, 아내와 함께 늙어 가고 싶다라는 맘이 들었으면 좋겠다. 내 남편과 '함께' 그들처럼 아름답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