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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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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치수


BY 이루나 2021-04-11

외출하기 위해 현관을 나서며 신발장을 열었다. 문득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나는 1남 4녀 중 셋째 딸이었다.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연년생이고 둘째 언니와 내가 두 살 터울이니 제일 큰언니와 셋째인 내가 겨우 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가 셋이나 되는 우리 집은 늘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웠다.
 
 2대 독자인 아버지가 아들을 바랐는데 딸만 내리 셋이었으니 아마도 귀하다.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한 살 차이긴 해도 덩치가 비슷해서 옷이나 신발을 사면 똑같은 치수에 똑같은 모양을 사서 쌍둥이처럼 입혔었다. 큰언니가 4학년이고 둘째 언니가 3학년일 때 엄마는 언니들에게 505란 실로 편물 점에서 털 스웨터를 맞춰 입혔는데 가슴께에 빨간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장미꽃 이파리가 내 것보다 네 것이 하나 더 있다고 다투었고 내 신발과 네 신발이 바뀌었다고 재잘대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두 언니가 입던 똑같은 옷은 모두 내 차지가 되고 내려 입혀지다 보니 새 옷은 거의 입어보질 못했다. 그런데 신발만은 다 헤져서 내려 신길 수가 없으니 다행히도 신발만은 온전히 새것으로 얻어 신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딸들을 앉혀놓고 당신의 손으로 신발 치수를 재서 사다 주셨는데 엄지와 검지를 펴서는 내 발바닥을 재시고 다시 엄지와 약지로 언니들 발을 재시면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야는 7문 반 쟈는 8문"하고 거든다. 아버지가 그건 너무 커 이게 더 정확해 이 사람아 하며 핀잔을 주면 어머니가 입을 비죽이며 ”커야 오래신지“ 라며 실랑이를 벌이곤 하셨다. 
 
 어머니가 사 오시면 질질 끌고 다닐 정도로 큰 것을 사 와서 마침맞을 만하면 이미 다 떨어져서 신을 수가 없었고 아버지가 사 오시면 금세 잘 맞았다. 모양은 단순하였고 감색에 밋밋한 운동화였는데 큰언니와 둘째 언니는 똑같은 치수에 똑같이 생긴 신발을 어떻게 자기 것을 구별하는지 신기했었다. 새 신발을 얻어 신을 일은 아주 드물어서 주로 명절이나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해서 겨우 일 년에 한두 번이 될까 말까 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새 신을 신고 처음 며칠은 뛰어다니지 말라 당부했었다. 나는 새 신이 아까워서 나가질 못하고 방안에서 신다가 품에 안고 잔적도 있었다. 
 
 어느 해인가 추석 무렵 또래들이 신은 색동 고무신이 너무 신고 싶어서 아버지를 졸랐다. 겨우 얻어낸 기차표 코고무신을 신고 뒷산에 올라 놀다가 맨발에 땀이 차면서 산에서 내려오다가 발이 미끄러지더니 고무신이 거짓말처럼 쭉 찢어져 버렸다. 불과 며칠 만에 찢어져 버린 고무신을 들고 한 발은 신고 한 발은 맨발인 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내 꼴을 보시고 어이없어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매번 신발을 사러 가실 땐 엄지와 검지를 펴서 가늠하다가 엄지와 약지로, 더 자라서는 중지로 재다가 더는 재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주 먼 길을 가셨다. 내 발을 당신의 손으로 잴 수가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 가버린 아버지의 기억이 신발장을 열자 실뭉치처럼 줄줄이 딸려 나왔다. 아버지의 부재와 그 빈틈이 늘 허기처럼 마음을 맴돌았지만 애써 기억하지 않았었는데 오늘 느닷없이 떠올랐다. 
 
 오래전 가버리신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어릴 적 그때처럼 발바닥을 뒤집어 보이며 "아버지 발바닥 치수 재어 주세요" 하면 뭐라고 하실까? 이제는 네발이 너무 커서 한 뼘으로 안 된다며 웃으실게다. 그러면 아버지 손을 꼭 잡고 ”아버지 이젠 돈 많은 내가 사 드릴게요. 바닥에 찰고무가 잔뜩 붙어 있어서 잘 닳지도 않고 오래오래 신을 수 있는 튼튼하고 질긴 신발을 사 드릴 테니 발 좀 내밀어 보셔요. 어이구 딱 한 뼘 반이네“ 하면 유식한 척하기 좋아하는 울 아부지가 콩 밤을 한대 먹이시며 "이것아 무식하게스리 한 뼘 반이 뭐야 265지" 하며 웃으실 테다.
 
 하늘이 명랑하고 햇볕이 따사로운 봄날 질긴 신발을 신고 꽃놀이 가면 아무리 걸어도 신발이 닳을까? 걱정되진 않겠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면 자박자박 밟으면서 재잘재잘 떠들면 아버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시겠지! 이젠 당신의 손으로는 잴 수 없이 커버린 내 발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신발을 하나 집어 들었다. 어릴 적 신던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튼튼하고 좋은 신발이었다. 오늘은 이 신발을 신고 꽃이 만발한 곳을 찾아 봄놀이나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