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 뭐하겠나 싶다가도 아니지...
더 나이들어 기억이 가물거리거나 크게 아프기라도 한다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다가는지 누가 알까?
내가 가고 난 다음 뭐 그리 중요하겠냐만 그래도 남겨두고 싶다.
쓸모없는 종이뭉치가 될지 불쏘시개가 될지
아내를 그리고 엄마를 그리워할 아이들의 추억이 될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55년 전 내가 태어난 집 주소와 동네
내가 다닌 초등학교,중학교, 고등학교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 이름과 성격
내가 자랄 때의 가정형편 그리고 분위기
자라면서 피부로 느꼈던 건조하고 버석거렸던 가난의 추억
남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엄마가 된 기분
담담하게
그리고 가감없이 담백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아이들이나 남편이 중요하게 생각 안하더라도 나의 기록이니까
내 살아 온 삶이고 살아 내야 할 삶이니까
순간순간 느꼈던 기쁨과 좌절까지
내 기억이 요만이라도 할 때 적어두고 싶어졌다.
먼 훗날에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 지금의 나를 뒤돌아 보는 기회도 되겠고
더 먼 훗날에 이 엄마가 가고 없더라도
엄마의 꿈이나 엄마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기록이면 족하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한다.
내 개인의 단순한 기록들이니 이래야하고 저래야 할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나한테도 꽃피는 봄날의 환희가 있었고
나한테도 여름 날의 열정이 태양처럼 뜨거웠던 적도 있었고
나한테도 무르익어 눈부셨던 가을 날의 충만함도 있었고
나한테도 조용히 안으로 성숙되어 가던 겨울 날의 침묵이 있었음을.
어느 날 내 이름 석자를 잃고 누구 엄마로 누구 아내로 산 30년
이제는 내가 나를 불러주고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싶다.
누구보다도 가슴앓이가 격했고 치열한 삶을 살아 낸 나의 20대
세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숱하게 많았던 시행착오와 서툰 엄마노릇
아내로 맞벌이주부로 멋부릴 사이 없이 흘러 가 버린 나의 30대와 40대
이제는 젊다는 표현보다 무르익어가는 중년의 풍만한 멋이 흐르는 50대
아이들도 다 자라 둥지를 떠났고 이제는 둘만 남았다.
잔손길이 덜하니 나한테로 돌려야겠다.
내가 자란 이야기
내가 꿈꾸었던 삶
이루거나 그렇지 못했던 내 꿈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느껴야했고 아팠던 이야기들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꺼집어내고 다독거리고 달래야겠다.
참 많이도 힘들었던 나한테 위로도 해 주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필해서 낸다는 흔하고 거창한 자서전이 아니라
그저 나한테 쓰는 내 이야기 그런 자서전을 쓸까 한다.
대학노트 한권쯤이거나 더 적거나
조금씩 생각 날 때 마다 한두줄도 좋고 신나면 몇장도 좋고
내가 가고 없을 때 아이들이 엄마를 느낄수 있게
유난히 정이 많은 아이들이니 읽고 울지도 모르니 슬프지 않게.ㅎㅎㅎ
누가 더 오래 살지 모르지만 내가 먼저 간다고 가정을 하고
남편과 아이들한테 남길 유언장도 적어야겠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행복한 아내로 살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할까?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여우같은 아내가 아니어서 미안하다고 할까?
양말짝 뒤집어 벗는다고 볼 때 마다 잔소리를 해서 미안하고 할까?
그 좋아하는 곱창요리를 냄새난다고 안해 줘서 미안하다고 할까?
비밀장부나 비상금을 꼬불쳐둔게 없으니 금전문제는 없겠고
그저 30년 동안 지지고 볶으며 대체로 잘 살았으니 고맙고
밖에 여자친구 안 만들고 현대판 장애인으로 살아주니 그것도 고맙다고 할까?
나 죽고나면 꼭 재혼은 하라고 해야겠다.
가끔 나 없이 혼자 있는 날은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니 남편 혼자서는 못 살 것 같다.
덩치 크고 힘센 여자랑 살아봤으니 재혼은 코스모스같이 한들한들한 여자랑 하라고 할까?
음...큰딸한테는 뭐라고 하지?
맏이의 부담은 주지 말고 두 동생들 잘 다독거리며 아빠 자주 찾아 가 보라고?
애들한테 물려 줄 재산이 별로 없으니 미안하겠다.
착한 삼남매가 나한테로 와 줘서 고마웠다고 사랑하게 해 줘서 감사했노라고 해야겠다.
세상은 살아보면 볼수록 아름다운거라면 믿을까?
엄마가 살아보니 그렇더라고 해 주고 싶다.
따뜻한 가슴만 있다면 세상은 언제라도 행복하다고
뜨거운 사랑만 있다면 세상은 언제나 내편이더라고.
누구를 오래오래 미워하기보다는 그를 용서하는마음이 있을 때
용서받는 그보다 내가 먼저 행복하노라고.
누가 먼저 손을 내 밀어주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위해 손 내밀 때
세상은....밤하늘의 별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는 나만의 보석이 되어 준다는 것.
낮의 일과를 마치고 조용한 밤 시간에
차근차근 조금씩 적어나가야겠다.
일기와는 다른 형식이 되겠지.
아니면 어떤 날은 일기처럼 쓰여질지도 모르겠지만.
컴퓨터가 아닌 노트에 내 손으로 직접.
삐뚤빼뚤하더라도 내 흔적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