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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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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3. 오가와 여사와 마주앉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엇갈린 삶의 이야기-


BY 이안 2011-11-01

자동차 문을 열고 차가 서있는 쪽을 바라본다. 눈이 어둠을 뚫고 사람의 흔적을 찾아

더듬거린다. 차 꽁무니 뒤로 걸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잡힌다. 헌데 세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아닌가 하고 보는데 언니의 모습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언니?”

 

나는 차 밖으로 나가면서 언니라고 다시 한 번 부른다. 언니 맞다.

 

셋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라고 내가 의아해서 묻는다.

 

그러기로 했는데 한 사람에게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시어머니가 병원에 입원을 하셨단다. 게다가 친정어머니조차

건강이 좋지 않단다. 그래서 오지 못했단다.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다.

 

언니가 나를 뒤따라오는 일본인 여자에게 동생이라고 소개를 한다. 그 여자가 얼른

자신의 이름을 내게 말한다. 아 예? 하면서 나도 내 이름자를 말한다.

그녀가 두서너 번 내 이름을 서툴게 반복한다. 난 그 여자의 이름을 한번 듣고는

말았는데. 내 굳어진 성격을 역시 비껴갈 수가 없다.

 

오가와. 오가와 여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거 같다. 60을 넘긴 나이라니 그냥 이름만

말하기는 좀 그렇다. 나만큼 작은 키다. 말랐다는 생각도 통통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적당한 몸집을 가졌다.

 

집으로 오는 길에 두 사람은 연신 일본어로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난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애써 들으려고 귀를 세우지도 않는다. 난 운전기사다.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운전에만 열중한다.

 

집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두 여잔 내 화초들로 간다. 간간히 감탄하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언니의 설명하는 소리도 들린다. 난 주인장 티를 내느라 부엌으로 몸을

돌린다. 냉장고에서 10월 초에 내가 직접 만들어 놓은 포도 주스를 컵에 따라

건네준다.

 

오가와 여사는 내게 화초 가꾸는 게 취미냐고 묻는다. 난 그냥 즐긴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녀가 화초들이 넘 예쁘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은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한데도 왠지 진심이 묻어있다. 내게 그녀의 말소리는 그렇게 다가왔다.

 

난 화분 하나를 선물로 준다. 내 화초들에 보이는 그 정도의 관심이라면 화초도

잘 키울 거 같다. 그녀는 역시 요란 떨지 않으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물을 어느 정도 주어야 하느냐는 말이 언니를 통해서 건너온다. 난 키울 곳이

어디냐고 묻고 집안이라기에 1주일에 한 번 정도 주면 될 거라고 말해준다.

그녀가 1주일에 한 번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난 질문이 세심한 데 놀란다.

나라면 좋다는 표현만 요란하게 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묻지도 않고 가져왔을

텐데 말이다. 중요한 건 받았다는 내 들뜬 기분이고, 정작 식물의 입장은 살피지

못하는 게 나다. 그런 나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민족성의 차이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짙다.

 

저녁을 먹고 왔다기에 언니가 사가지고 온 과일만 깎아서 내놓고 우리는 거실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혼자 사는데 집이 커요?”라고 서툴게 말한다.

 

. 좀 커요.”

 

나도 내 집이 크다고 생각한다. 안방과 작은방의 필요성을 나도 느끼지 못한다.

거기다 안방을 뺀 나머지는 모두 확장이 된 형태다. 그러니 더 넓을 수밖에 없다.

혼자 살기에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넓다. 그런데도 이 집을 계약할 때 난 잠깐도

망설이지 않았다. 26개월 전, 운동을 다녀오다 한 번 들린 것이 인연이 된 집이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집 앞이 확 트인 게 좋았다. 안방과 거실,

서재에서 모두 공원이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공원이 끝나는 곳부터 논과 밭이

이어지다가 산이 울타리를 쳐주고 있는 전망도 맘에 들었다. 난 누가 그 집을

 채가기라도 할까봐 구두계약을 단단히 하고 다음날 다시 가서 계약을 마쳤다. 운이

좋았다. 내가 살고 싶었던 단독주택의 장점을 가진 아파트였으니 안전까지 보장이

된 셈이었다.

 

청소하기 힘들지 않아요?”

 

서툴지만 의사전달에는 문제가 없다. 힘들다고 말하고 그래서 가끔 한 번씩 청소를

한다고 말한다. 그랬더니 그녀도 자기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1주일에 2번 정도

한다고. 부럽다는 말도 남긴다. 그러면서 일본에서는 집들이 아주 작다고 덧붙인다.

난 여기가 시골이라 수도권에 비해서 집값이 싸다고 말한다. 만약 대도시처럼

그렇게 비쌌다면 언감생심 맘이나 먹을 수 있었을까? 아마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좋다.’라는 말만 하다가 아쉬움을 떨치며 돌아서야 했겠지. 하늘이 나에게

준 행운이었다. 이 좋은 아파트가 그 당시 미분양 상태였다는 게 내겐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오가와 여사는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로 방향을 바꾼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서 나서 20년을 살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라는 말을 피하려고 했는지

그녀는 전쟁전이라는 말로 돌려서 표현했다. 속이 좀 쓰려오는 게 느껴졌다.

편하지 않은 이야기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비틀린 마음이 꿈틀댄다. 난 입을 다물고

듣는다. 이야기 상대는 언니가 있으니 그래도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헌데도 그녀는

나를 생각해서인지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가며 말한다.

그래서 나도 간간히 그녀의 이야기에 끼어든다.

 

그녀의 어머니는 돌아가신지 10년이 지났다고 했다. 안동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잠깐

살다가 광주로 가서 나머지 시간을 살았다는 그녀의 어머니는 생전에 한국을 많이

그리워했다고도 했다. 간혹 아리랑이라는 노래도 불렀다고 했다. 한국인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있다고 했다.

 

그런 엄마의 흔적을 찾아서 3년 전에 관광 차 한국에 왔다고 했다. 엄마가 처녀 적

근무했다는 광주에 있는 조선은행에도 가봤다고 했다. 리모델링을 여러 번 하고,

상호도 바뀌었지만 건물은 여전히 그대로 있더라고 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는 말도 했다. 자기도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단다.

 

그 얘기를 듣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만 만주에서 태어나서 20여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엄마도 살아생전에 어릴 적 살았던 만주 이야기를 간간히 했었다.

외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으셨던 엄마가 유일하게 그리움을 담고

이야기하는 곳은 엄마가 나고 자란 만주였다. 그곳이 내나라 땅이 아니라는 것은

엄마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어릴 적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친구들이라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곳이 만주였을 뿐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이었던 거 같다. 엄마와 함께 둘러앉은 자리에서 동생이

딸네미 둘을 어학연수 차 한 달간 중국에 보냈다는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당신의 건강은 생각지도 않으시고 나도 데려가지라는 말을 즉각

쏟아내셨다. 그리움이 절절한 표정이셨다. 요즘 와서야 그 그리움의 깊이가 내

안에서 아득하게 느낀다. 그녀도 그랬던 모양이다.

 

공무원이었던 그녀는 3년전 관광 차 잠시 나왔던 그때 나머지 삶을 한국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서 곧바로 퇴직을 했다고 했다.

3년 정도 더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그만두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단다. 자신의 어머니와 이모까지 돌봐야 했던 그녀를 아버지는

고생했다며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셨단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엄마가 한국인

친구와 주고받은 한글 편지도 자신에게 주었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엄마

생각이 난다는 말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왜냐구 물었다.

 

우린 엄마의 고향이 중국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러냐고 묻는다.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은 여전히 쓰리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여자의 운명이 닮았으면서도 서로 다르다. 그녀의 어머니는

강자의 입장에서 이곳에 머물다 갔다면, 내 어머닌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큰 외할아버지 때문에 외할아버지도 식솔을 모두 거느리고 만주 산골로 깊숙이

들어가 살아야 했다고 했다. 설마 떠나면서 그렇게 긴 시간을 그곳에서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셨겠지. 전답을 그대로 두고 떠나셨다니 말이다.

 

내 엄만 그곳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스무 해를 보내셨다.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이

두려워 외할머닌 열일곱 나이의 엄마를 아버지와 서둘러 맺어주셨다고 했다.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그때 아버진 떠돌이셨다.

4대 독자였던 아버진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전쟁터에 끌려갈 수는

없으셨단다. 산속 깊이 들어가면 끌려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람들의 말만 믿고

무작정 산속 깊이 들어갔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엄마가 살고 있는 동네에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다고도 하셨다.

 

가슴이 멍멍했다. 맞장구를 칠 수도, 그렇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여자의 삶이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자식들을

한자리에 앉혀놓은 것도 묘했다. 그들이 살아낸 삶도 그랬다. 연령대도 거의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