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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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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쓰리쿠션


BY 봉자 2009-12-30

쓰리쿠션할머니가 봉자가게에 등장할 때는 작은 가게 안이 요란합니다.

\"아, 내가 온줄 알면 얼른 뛰어나와 문을 열어줘야지!!\"

할머니는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할머니, 봉자가 무슨 부채도사도 아니고 언제 오실 줄 알고.....ㅎㅎ\" 너스레를 떨어도 들은 척도 않고

\" 문이 너무 뻑뻑해, 그러니까 내가 힘들잖아\"

\" 아 예...\" 깨갱~

사실 올해 두 번 정도 담배 도둑이 드는 바람에 출입구 샤시문 연결 상태가 영 안 좋긴 합니다.

문이 좀 뻑뻑하긴 해도 할머니 외엔 그닥 힘들어하는 사람이 없길래 이냥저냥 사용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급작스런 고함치레로 들어서는 할머니 앞에서는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봉자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손님, 상대는 팔순 노인이기 때문이지요.

 

봉자네 가게 3년 단골이지만 아직도 할머니의 등장은 약간의 긴장감을 줍니다.

\" 아, 글쎄 우리집 에미가 다리를 다쳤어. 어떡하다 그랬냐고 물었더니

뚱~해가지구 \'그냥 좀 다쳤어요\'....그러잖아?\"

\" 근데, 좀 다친게 기부스를 하고 있어?.....시어미가 물으면

이만저만해서 다쳤다고 조산조산 말을 해줘야지 늙은 내가 뭘 알겠어?\"

헐거운 틀니 사이로 할머니의 발음이 슝슝 새어 나옵니다. 

- \"발음 부정확\"

- \"어순은 내맘대로\"

- \"주어 찾아 삼만리\"

느닷없는 할머니의 말을 온 신경을 모아 정리해보면 같이 살고있는 며느리 얘기가 되겠지요.

 

며느리 때문에 화가 난듯 보이지만 표정은 그닥 변화가 없는 게 어느 정도 이골이 난 모양입니다.

할머니 말만 놓고보면, 당신 며느리는 할머니에게 별로 친절한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할머니 또한 봉자네 가게에서 하는 언행을 보아

엉뚱한 대답으로 며느리를 난처하게 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할머니는 대개 당신 식구들간의 정서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을 푸념삼아 꺼내놓습니다.

싹수가 없다는 손자들 얘기,  며느리보다 아들 하는 짓이 더 밉다며

집안 어른으로서 체면도 위신도 없이 불만을 쏟아냅니다.

웃는 얼굴로 듣고 있지만 봉자는 함부로 맞장단을 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듣는 중에 할 일이 떠오르거나, 밑도끝도 없는 할머니 말이 지루해지면

\"할머니, 오늘은 뭐 사가시게요?\" 고 적당히 주의를 환기시켜야 합니다.

 

할머니가 봉자네 가게에서 사는 것은 단순합니다.

간식용 소시지와 과자 두어 개

바로 당신의 요깃거리입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몇 개의 간식거리를 고르고 거스름돈까지 다 치룬 상태에서

슬그머니 좁은 가게 안을 한 두 바퀴 더 돌아봅니다.

 

\" 전에 내가 사 먹었던 요만한(검지 손가락  두 마디 가리키며)

과자가 부드럽고 맛있두만 어디 없나....?\"

요만한 과자가 어디 한 두 종류여야 말을 하지요.

 

제과 3사가 진열해놓은 과자만해도 백수십종에 달합니다.

더구나 할머니의 기억은 종잡을 수 없이 희미하고, 두루뭉술한 설명에

할머니가 원하는 고갱이를 찾기란 일간지 숨은그림 찾기보다 더 힘이 들겠지요. 

 

그런데 할머니는 눈치가 구단입니다.

\"아참, 여기 아냐...딴 가게서 샀구나.\"

봉자의 지친 기색을 알아차렸는 지 금방 마무리를 짓습니다.

이렇게 마무리가 빠를 땐 고맙기도합니다만 한편으론 살짝 섭섭하기도 합니다.

할머니 입에서 \'딴 가게\'란 말을 뱉었기 때문이지요.

 

봉자네 가게를 기점으로 해서 좌우로

백여미터 모퉁이를 돌면  봉자네 가게와 엇비슷한 마트가 각각 두 군데나 더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파트 단지를 중간에 두고

앞 쪽과 뒤쪽 입구에 하나씩 있고, 길 건너 중간 쯤에 봉자네가게가 있지요.

 

이틀 걸러 할머니는 이 세군데 가게를 마실겸 들립니다. 할머니의 세 가게 섭렵은

지역 구도상 쓰리쿠션이 됩니다. 쓰리쿠션, 큐대에 맞은 공이 당구대 세군데를 치듯

할머니는 다른 가게에 들러 물건을 샀다고 봉자네에서 눈치 따위는 보지도 않습니다.

근처 슈퍼에서 사온 물건을 버젓이 계산대 위에 올려 놓고

\" 이 가게엔 이런 거 없잖아!\" 고 당당하게 다른 먹거리를 고르곤 합니다.

\'왜 없어요. 할머니나 봉자가 못 찾아서 그렇지...\'

 

장사 시샘은 하늘도 못 말린다고 했나요...

 

추위가 시작되자 목도리로 머리 온통 감싸고

무심하게 봉자네 가게 앞을 지나치는 할머니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위로 올라가면 ㅇㅇ 마트, 아래로 내려가면 ㅁㅁ 마트로 가는 것일 겁니다.

 

\'저 할머니 우리 가겔 통 안와. 두서없이 주절대는 것 같지만 

이 가게 저 가게 값을 재보고, 맘이 차야 쏙쏙 골라 가는 여시 할매야.\'

딴에는 잘 해준 마음이 서운했던지 작정하고 흉이 보아집니다.

봉자 고향말이 튀어나올만큼 야속하고 미워집니다.

 

그런데 팔순의 이 할머니, 봉자 속을 읽은 걸까요?

이후로 봉자 가게는 물론이고 앞을 지나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 할머니가 궁금해 떠올릴 때면 우선 섭섭한 맘이 싸락눈처럼 쌓여갔습니다.

\'쓰리쿠션 할매, 나타나기만 해봐, 국물도 없어.\'

 

허나, 섭섭한 맘도 잊을만하니 할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봉자에게 알아서 문 열어주지 않는다고 고함을 치면서 말입니다.

아, 그런데

좀 전만해도 출입문을 트집잡아 투덜거리던 할머니가

\" 오랜만이지? 나 안 보고 싶었어? 클클클....\"

틀니가 들썩일 정도로 환하게 웃습니다.

 

\" 있잖수, 나...허리가 잔뜩 아파서 서울 딸네가서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었걸랑.

퇴원하고 나서도 딸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서 이것 봐, 옷이랑 가방 죄다 사줬지뭐야.\"

할머니는 대뜸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열어보이며

\" 돌아 올 때는 나한테 용돈도 이렇게 많이 줬잖아.\"

당신 아팠던 기억은 사라지고 딸자랑에 입에 침이 마릅니다.

\"할머니, 딸이 서울에서 잘 사나봐요. 멋진 가방도 사주고 솜누빔 조끼도 되게 따뜻해보여요.\"

\" 말단 공무원이야, 그냥 반 지하에 전세 살어.....\"

 

지금 할머니가 살고 있는 아들 집은 지방에서도 수 억하는 아파트입니다.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을 뿐더러 소위 학군이 좋아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몰론 이런 건 할머니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할머니네 식구들한테만 중요하지요.

 

여태껏 할머니가 밑도 끝도 없이 봉자에게 한 말을 짐작해보니

넓고 깨끗한 아파트에 들어서면 할머니는 곧장 유령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번호 따서 들어서봤자 각자의 방에서 나와보지도 않고

\'나 들어왔는데....나 들어 왔어...나 왔다구\'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 혼자서 중얼거린다지요.

 

그렇게 중얼대면 며느리한테는 귀찮은 잔소리처럼 들릴테고,

손자들은 팔순 할머니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이면 식구 누군들 할머니에게 집안팎 일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을 해줄까요.

해줘봤자 도움이 안될 게 뻔하고

도움은 커녕 엉뜽한 소리나 하지않을까 쉬쉬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알만합니다.

할머니의 마트답사 쓰리쿠션은 못견디게 외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푼어치 말동무를 사기 위해, 봉자 가게를 기점으로 마트 쓰리쿠션을 치는 셈이지요.

그러니 이물없이 맞아주는 세 군데 동네마트는 할머니의 즐거운 나들이 장소가 됩니다.

 

오늘, 할머니의 등장이 이렇게 반가운 것은

손님을 기다리는 봉자의 장사속 때문만은 아닌듯 합니다.

할머니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구멍가게 봉자도 할머니만큼 외로웠나 봅니다. 

 

홀로 가게를 지키는 밤, 싸락눈이 친구삼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