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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BY 주인주 2009-05-08

새벽 2시

남보다 일찍여는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 대부분 곤히 잠든 시각, 나의 하루 일과가 종료 되어지는 시각이다.

집으로 돌아와 정리하고 잠자리에 눕는 시간은 새벽 3시가 넘기 일쑤 이다.

 

24시간 열려있는 요즘 생활 패턴으로인해 24시간 열린 시간속에서 밤을 새우는 직업들 중 하나 일 뿐이지만, 

돌아와 잠자리에 피곤한 몸을 뉘우면서 밀려오는 현실에 몹시 슬퍼 지기도 한다.

아직 지난달 임대료도 밀린상태 , 어느 날 부터인가  삶의 곤곤함으로 풀리지않는 현실들과 부딫치면서 

정말로 힘든 것은 , 지금의 고단함보다도 앞날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않는 다는 것이다.

 

한 때는 열심히만 하면 잘 살수 있다는 희망으로  앞날이 기대되고 설래이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열심히 살다보니 작은 행복들을 맛보기도 했었다.

나름대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열정을 삶을 불태우며 성취감에 행복해 했고,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면서 그야말로 내가 살아 있음에 행복했던 시절,

그 때엔  누구나   가지는 평범한 삶인줄 알았고  앞으로도  나의 앞날은 그렇게 이어져 갈줄 알았다.

 

어느날 문득

작은 자영업이로도 가족들이 살만했던 1998년

IMF 가 오면서 생애 처음으로 실패라는 것을 맛보았을 때만 해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 시절 수입향수 로 유통업을 하던때 ,급작스럽게 올라버린 달러로 인한 수입금지 거래처 반품

얼어버린 시장 ..대처할 시간도 없이 닥쳐버린 외환위기로 올 스톱이 되어 작은 대출금을 갚지못해

결국 작은 집이지만 은행 경매로 날라가 버리고 말았다.

그 실패의 원인을 찾아보니  나의 잘못으로 인한 실패가 아니라 나라의 통화 정책의 실패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때부터 정치에대한 관심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나의 삶의 행복권이 거대한 권력들의 실수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이 나에게 올수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못했던 그야말로 평범한 소시민이였던 나의 실수도 작은 실패임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 엄청난 소용돌이 속을 그래도 잘 넘기면서 다시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후배의 소개로 연결된 사업은 주택사업에 관련된 유통업이였는데 , 남아있는 날들 을 위한 재도전을 위한

열정은 남아 있을 시절 이었다.

 

금모우기 운동등 온 국민들의 합심으로 나라가 재구축 되는 그시절, 나 역시  희망을 가지고 다시

시작 할수 있었던 것은 , 열심히 하면 잘 될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 이다.

그 땐 모두들 열심히  나라 살리기의 온열정을 쏟아 붓던 그 힘든 IMF 시기 시작한 사업은

한  3년정도  전국을 무대로 뛰 다보니 결실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종업원 5명 차량 5대..그정도면 혼자 이룬 성과에 대한 결실물로써 는 괜찮은 것이였고 수주된 물량도
제법있어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2003년 쯤은 년 매출이 20억이 넘는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다 . 허나 어느날 문득  중국의 불랙홀 같은 거대한 소비가 시작되면서 ,한국에 자재난이오기시작하게

되었고 ,그 때 부풀대로 부풀어버린 아파트 거품경기에 대한 경고등이 켜지면서 나의사업도  발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

일본도 부동산 거품 경제로 인한 위기를 오랫동안 맞고 있던 시절이라 . 우리나라도 그 거품을 일찍 빼지 못하면

커다란 위기가 올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던 나의 생각이 정부 생각과 같기에 ,나의 사업에 작은 영향을 받더라도  부동산의 투기 광풍이 불던그 거품들은 제거 되어 마땅하다는 믿음으로 지켜 보았다.그러나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 같을수 없다고는 하나 ,거대한 역풍으로 힘들게 부동산 경기가 바람을 타더니

우리업계에도  하나씩 파편이 날라오기 시작했다.

일반주택  미분양들이 늘어나고 , 분양이 안되는 통에 결재를 날려버린  납품 업자들이 쓸어지고 ,그곳에 납품한 나의사업에도 휘청 거리기 시작했다.수주된 물량도 많아서 그래도 기대를 버릴수 없어 버티기 시작했는 데

한 2년을 버티고 나니 나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한숨과 분노와  부채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도 희망을 꺽지 않았는 데..업계의 중론이 정권이 바뀌기전에는 투자를 하지않는 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의 희망을 접은체 사업장을 폐쇄 할수 밖에 없었다.

난 그들보다 약자일수 밖에 없고 버텨낼 재간이 없기 때문 이었다.

 

평생  긍정의힘으로 열정을 가지고 살아온 나에겐 너무나 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번번히 좌절당하는 약자의 설음이 이런것이라는 절절한 아픔으로  모든 것을 놔 버릴때의 허망함이란...

인생이 그런 것이라고 자위 하려해도  쉽게 잊을수가 없었다.

왜냐면 바로 현실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기 때문 이다.

또다시 미납된 세금으로 인해 작은 집을 경매로 날리고 나니 갈곳이 없었다.

가족 과함께 평생 처음으로 월세라는 것을 살기 시작했다. 

절반의 살림살이를 버리고도  부족한 공간 , 모시고 있던 노모에게 엄청난 고통을 드린 불효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들 둘은 저데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되었고 , 그 야말로  앞이 도통 보이지 않던  암울한 시기였다.

그야말로 밑바닥인생 막장으로 들어선 것이다. 현실도 어렵지만 정말로 힘든것은 다시금 희망을 꿈꿀수 없다는 좌절감이 나를 더욱더 쓸어지게 만드는 것이 었다. 사무실 집기 서류 들을 그냥 버릴수 없어 시골 아는 집 창고로  모두를 실어 보내고 남은 내가슴은 쓰라린 고통으로 날마다  마치 꿈속처럼 몽롱한 상태로 운둔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싫고 ,세상이 싫었다. 왜?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는 가?

그동안 함께 했던 거래업지들의 부도 소식과 함게 몰락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 나마 위안을 받을수 있었다.

아무리 지본주의 라고는  하지만 , 자본으로 인격조차 저울질 당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

있는 것일까?  생각을 해보지만 앞날은 캄캄 하기만 하였다.

한발짝도 땔수 없는 시간들, 나야 아직 젊지만 노모의 고통을 바라보는 게 몹시 힘들었다.

다행히 한동네 이장님의 호의로 노모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받아 기초생활은 하실수 있게 된적은 너무 너무 다행 이었다. 다른 것보다 의료 복지가 정말로 다행이었다 거의 무료에 가까운 의료해택으로 거의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시는 노모를 건진건 기초생활 수급 복지 였다 .참말로 다행이 아닐수 없었다

작년 에 작은 돈으로 6평 짜리 집도 국가에서 마련해 주어 노모 한분이라도 마음 편하게 사실수 있게 해드린것은

처음으로 국가에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한달에 한번씩 찾아온다는 복지사가 방문하여 위암 수술을 하신

노모의 건강도 체크해주는 고마운 사회 복지제도는  정말로 힘든 나의 한쪽을 책임져주는 커다란 의지가 아닐수 없다.평생 국가에 감사해본적이 없는 데.기초 생활 수습혜택은 그나마 살아갈수 있는 의지까지 함께준

고마운 선물이 아닐수 없었다.

 

50이 넘어 사업에  쫄딱 망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시작 한다는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무엇이 있어 다시 시작할까? 신용을 잃고 일자리를 잃은 처지의

나 는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일 만큼 ,빈지갑으로 바라보는 현실은  너무 야속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가 생각났다.

높이 올라 창공에서 비행하다 추락해버린 절망 ,다시 일어설수 없는 좌절감 평생처음 느끼는 좌절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세상 의문을 닫아 버린체 , 마치 하루살이 의 생활처럼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생애 처음 만나는 빈곤감 과 상실감으로  어찌 할바를 모른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서 나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세상이 야속했다. 마치 사막에 버려진듯한

느낌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른체 지나던중

 친구가 제공한 식당의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돈 일당 5만원 ,,그 5만원은 엄청난 돈이었다.

동동 걸음으로 무거운 밥상을 나르고 치우고 하면서 땀흘린 일당 5만원은 발바닥이 갈라지는 아픔과

평생 받아먹는 밥상에서 타인에게 밥상 차려주는 전환의 경험을  바꾼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제서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시작했고

이제 최저 빈민으로 바꿔진 나의 모습에 대한 인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나마 나이가 들어버린 여인네들이 쉽게 자리를 구할수 있는 일도 아니였다.

힘든 일들은 좀 젊은 여인들 이거나  돈벌기를 작정하고 들어온 중국 교포들의 몫이였다.

 

무언가  다시 시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시간을 보냈으나  무엇을 해야할지는 생각조차

나지않는다.  인력소개소를 통한 파출일 ,식당일 허접한 일들을 때때로 하면서 근근히생활하는 처지로서는

엄두를 낼수도 없었다 .

일당 일들 은 힘든일이 태반이었다 . 일감을 밀려 두었다가 부르는 것이기에 힘들수 밖에 없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나는 맡는 일들에 성심을 다하고 열심히 하는 통에 몸은 더욱더 피곤할수 밖에 없었다.

부르는 사람들은 효율이 좋으니 나를 더 부르지만 .

내 집일처럼 해주어야 자존심이 상하지않을거라는 마음으로 일하는 나는 몹시 힘들어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던중

함께 힘들어 하던 후배의 제의를 받았다 . 노점상 ... 노점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말을 듣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다. 노점상 ?

 

군인 아버지를 둔 덕에 어려움 이라고는 모르고 자랐고 ,   3급 갑(지금 군수급)이던 시댁을 만나

아이들 자랄때 까지 ,그리고 마지막 사업이 망할때 까진  삶의 빈곤이라고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내가

노점상을 한다고?  세상사 새옹지마 라고는 하지만 어쩌다 내가 노점상을 해보라는 권유 까지 받는

처지가 되었나  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비교적 젊은 시절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적부터 직장생활을 통해 경제 활동을 하면서

쌓여진 능력으로 작은 사업 이지만 해왔던 나의 능력을 발휘할곳이 없어진 지금 나에게 던져진 숙제는

너무도 기가 막혔다. 한 20일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해 보아야지 라는 결심을 할수 밖에 없었다 .

 

평생 처음 얻어쓴 일수돈. 후배의 소개로 100만원을 얻으니 선이자를 때고 88만원을 쥐어 주었다.

남대문 시장에가서  신발 들을 사고 차에 있던 소풍용 돗자리를 무조건 펴고  노점의 길에 들어섰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나씩 팔려나가는 기쁨을 만나면서  이렇게 다시 시작을 하는 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주변을 보니 떡볶이 노점 등 각종 노점상들이 눈에 들어왔고 열심히 사는 힘든 이웃들이

보였다.  남 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이렇게도 살수 있는 거구나를  느끼는 안도의 마음도 잠깐.

사나흘이 지나니  구청에서 단속이 나와 돗자리에 깔려진 신발들을 쓸어 차에담는 구청단속반을 보면서

온몸이 떨렸다. \"아니 이럴수가\"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던 단속반 에의해 나의 꿈들이 휩쓸려 앗아가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러지 마세요\" 라고 고함을 치는 나의 모습은 그들눈에 아무것도 아닌듯했다.

이제겨우 살아보겠다고 자존심을 구겨버린체 일수돈을 얻어 시작한 노점, 불과 사나흘만에 이렇게

빼앗겨야 하나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어쩔 수없이 물건을 뻬앗기고 정신을 차리니  내일 구청으로 들어오라는  통보만을 남기고 그들은

돌아갔다. 세상은 정말 호락호락 하질 않는 구나. 참 으로 어려운 사람들 어떻게 살았을까? 나 역시

빈곤층으로 전락한 처지였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내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

정말로  힘든 이웃들 생각이 나는건 동병상련이여서 일까?

이튼날 구청엘 찾아가니 처음이니까 벌금만 내고 물건은 돌려 줄테니 앞으로 장사를 하지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더니 물건을 내어 주었다. 생각보단 다행이었지만 어찌해야  할까?

이제 시작한 일이고 아직 일수돈도 갚지못했는 데...

다시한번 눈을 감고 다시 노점을 전개했다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쉽지 않았다

거의 숨박꼭질 비슷한  일들이 여러번 생겼고 , 다시 물건을 쓸어가는 일이 번복되었고

그 두려움을  떨칠수 없어 접을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당하니 떨리고 분하고 누구에게 하소연 할수도 없는 안타까움으로 힘들었다.

생존권을 박탈 당하는 처절한 분노앞에 눈물과 좌절감에 온몸이 떨렸지만  약자 일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를 도와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보도위에 물건을 깔고 파는 행위는 불법이였고 ,위법을 한사람은 바로 나였기에

하소연 할수 있는 처지 가 못되는 것이었다.

 

근 20년 정도 내가 해왔던 일 들에게서 멀어질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쩔수없이 선택한 밑바닥일도

현실에선 불가능했던 것이다.

여자 이지만 가장 이였던 나 ,

언제나 앞장서서 일했고 능력을 인정받던 받아 기뻤던 시간들  현실적 어려움이라고는 없었던 나에게

미쳐 준비하지 못했던 서민도 아닌 빈민으로의 몰락은  내인생에서 엄청난 시련을 주는 시간이 되고있다.

아픈만큼 성숙되어진다는 노랫말이 떠올려진다.

이젠 굴러가는 100원 짜리도 줍게되었고.

지갑에 1만원만있어도 부자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인간으로 성숙했다는 것일까?

내나이 55세의 중년여성  , 자식에게 나를 의탁한다는 생각은 아예없는 신세대 장년층으로 진입하면서의 걱정은 노후 준비가 하나도 안되었다는 것일께다.

 

언제부터인가 중산층이 붕괴되고 서민층로 전락했다는 표현들을 자주 보게 되거나 느끼고 있다.

서민층이 아니라 빈곤계층이라고 불러야 하지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얼마전까지 살만했던 나의 처지에서 쌀 걱정 집세 걱정을 하는 차지가 되고보니 그렇다.

일체 옷가지를 산다거나 하는 사치는 잊은지 오래되었다.

그 나마 나는 아이 교육 문제는 없는 단순 생활 빈곤층이기에 무어라도 몸을 움직이면 먹고사는 문제는

어렵지만 해결할 수 있지만,요즘 비졍규직 문제와 사교육비 증가때문에 힘들어하는 가정을 보면서

남의 일같지않게 볼수있는 것은 ,이제 그 고충을 함께 느낄만큼 없는 설음을  당했기 때문일게다.

내몸하나 살려해도 집세에 전기료 가스료 수도료 인터넷비 전화비 그리고 작은 생활비를 해결하려면

최소 100만원은 있어야 버틸수 있는 데, 한달 88만원 세대는 어떻게 할것인지 정말로 걱정 되기 때문 이다.,

아이들 이라도 있을라치면 유치원비용 의료비등 기초생활비에 못미치는 수입으로 사는 생활을 모습이

극명 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최저 생계비 보장을 위해 붉은 띠를 두른 가장들의 절규가 남의 일같지않아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아닐까

돈이 없으면 살수 없는 사회구조속에서 점점 벌여지고있는 빈부의  극심한 차이를 보면서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에대한 생각을 해보기도한다.

오늘 보도 자료를 보니 근로자중 10%는 상대적 빈곤상태 라고한다.그 중 50%는 절대 빈곤상태인

최저생계미달 가구 라고하니 이미 이사회 빈곤층에 대한 현상은 묵과할수 없는 상황에 이른게

아닐까 한다 .

이미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린 나와 빈곤한 이웃들 은 누군가 도와주지 못하면 재기불능의 현상을

경험한 나로써는 절실한 해법을 찾지않으면 안되는 수준까지 온게 아닐까 걱정을 해본다.

뉴턴의 관성이론 처럼  한번 빈곤층으로 떨어져버린 사람들은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벗어날수 없는

가난의 관성으로  오랜시간 고통 받기 때문이다.

삶 은 행복해야 하는 권리를 가질수 있음에도 인권조차 박탈하는 이사회구조 모순을 더 이상 두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빈곤은 사람을 지치게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자살율 높은 불행한 나라로 가는 첩경일 뿐이다 라는

생각만 든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는 구조 가 만연한 사회풍토를 약자들은 바꿀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 에서 평등만을 부르 짖을수는 없지만 ,

부자 만 부자되는 시스템을 계속 끌고 갈수는 없지 않은 가? 권력층 만이 누리는 기득권을  뺏을수도 없다면

구제 될수있는 기회를 주는 시스템만이라도 구축해야 하는 일은 나라에서 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열심히 일해도 빈곤할수 밖에 없는 처지의 절대빈곤층을 구제할 방법은 국가 시스템이

우선할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먹구 살기가 급급한 이들의 처지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을 뿐더러 약자의 굴래를

벗어날수 있는 평등의 기회도 없기 때문 이다.

이문제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없인 이루어질수 없는 문제이고 ,언제고 반전을 할수있는 기회를 사회가

제공하지못하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빈곤의 대물림이 이어질수 밖에 없기 때문 이라고 본다.

 

절대 지출비가 나간다는 공부 하나만 보더라도 공교육의 부재라면서  있는 집 아이들은

현실 적으로 유학도 보내고, 과외도 시키고 학원도 보내는것이 아닌가? 

인수위가 불쌍해서 구제를 시킨다는 기러기 아빠도 그래도 공부시킬 여력이 있어 기러기 아빠가 된것 아닌가?

결국 있는 자들 아닌가?  아이 분유값이 없어 장발장이되어버린 母情두 발생하는 현실에서 보면 말이다.

대한민국의  공부하는 학생들의 상위 %계층만이 할수 있는 게  유학 이다.

남은 부모들의 애끓는 자식사랑은 상대적 빈곤감으로 더욱더 피곤한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이고.

산다는 것이 꼭 돈만으로 다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보지만

곤곤해진 내삶을 보니  돈이 없으면 불편한것이 하나둘이 아니고 삶조차 피곤해서 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드는 것은  없는 사람들 심정과  똑같을 것이다.

 

봄이오는 거리마다 개나리와 목련들이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있다.

전 같은 면 그 자연의 신비에 황홀해하며 살아있음에 행복감을 느낀적이 많았다.

그러나 빈민이 되어버린 지금은 \"아 봄이 어느새 왔구나  이제 가스비가 줄겠네.\"

참으로 비감이 몰려오는  생각이다.

 

인생 이란 한번 왔다 가는 것이다 , 두번 두 ,세번두 아닌 딱 한번

운명 처럼 대한민국 의  국민으로 태어나 사는 이땅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야할 권리가 있다.

태어난곳도  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들이 모두 다르지만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행복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다.

제도에 의한 피해는 없어야함 이 또한 마땅한다.

학교 성적순이 인생의 복순이 아니것은 살아가면서 알게 되지만

순위를 정하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나라가 할일이 아니다.

국민들을 위해 일해 달라고 맡긴 이나라 는 기득권자의 배부림의 기회가 아니라

없고 소외당하는 약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가는

주는 임를 국민들이 부여한 것이다.

정말로 위정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국가의 성장수치를 높이는 숫자놀음에 빠질것이아니라

점점 양극화가 심화되어가는 이 사회를 국민 모두가 살아있음에 행복감을 느낄수 있는

조금은 부족해도 살아가는 데 최소한의 경제적자유를 가질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야말로

지금 이사회 정부가 해야 할일이 아니가 한다.

광에서 인심이 난다라는 옛말이 있다. 살아가는 데 기초적 으로 필요한것들만이 라도 충족된다면

작은 행복을 느끼고 살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사는 게 피곤하고 곤곤 하여도  작은 둥지라도 있어 집세 걱정하지않고

가족들과 오손도손 식탁에 둘러앉아 끼니걱정없이 먹고

아이들이 즐겁게 학교에 가는 그림만으로도 인생은 행복할것 같다.

IT니 최첨단 디지털시대이니하여도 기본적인 삶의 형태인 먹고 자는 그리고

평등하게 교육 받을수있는 기회만이라도 갖출수있다면  자신의 능력을 배양하고 발휘할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 가.

 

절대 빈곤은 절대 불행 할수 밖에 없는 이사회가

부자가 아니여도 행복할수 있는 나라가 되어지길 진심으로 기대할 뿐이다.

행복 은  삶의 희망을 꿈꾸게 해준 다

꿈이 없는 삶, 꿈을 잃어 버린 사회는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이다.

나라는 꿈을 잃은 국민 들에게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이 최대의 임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