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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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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이벤트에도 감동하라!


BY 바다새 2009-04-15

 

어설픈 이벤트에도 감동하라!

 

 


이틀 전부터 부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방에 들어가 둘만의 은밀한 대화를 속삭이는가하면, 저녁식탁에서도 눈짓으로 뭔가 주고받는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주느라 고도의 연기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단 네 명의 가족 중 아들은 딴 짓 하느라 여념이 없고, 홀로 나를 남겨놓고 둘이서 모의하고 있으니.

차라리 눈치 못 채게 밖에서 따로 만나 일을 추진할 것이지 지켜보는 관객으로서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맘 같아선 감독을 자청하고 나서 진두지휘하고 싶었으나 꾹꾹 눌러 참았다. 


바로 오늘 아침.

음력 삼월 스무날이다.

수십 년쯤 세월 거스르면 할아버지 생신 상 차리느라 부산할 시간이다.

당골 당숙 네도 초대하고 경로당 친구 분들과 동네 어른들까지 북적대는 아침이었을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는 손님들마다 소주병이거나 선물보퉁이를 챙겨들고 오셨지.

안방에선 남자어른들 목소리 섞이고 건넌방은 화투판멤버 할머니들 차지다.

사랑방구석 간신히 끼어 앉은 나는 급하게 차려진 생일상을 대충 먹는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씹는 둥 마는 둥 먹고 등굣길에 나섰다.

손님들 치르느라 아침시간 내 생일은 어른들 관심 속에서 저만치 벗어나 있곤 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근사한 음식상이 차려지고 친구들을 초대하라며 어머니가 바쁘다.

농번기철인데도 할아버지 덕분에 누려본 호사였다.


이래저래 장성하여 시집와 자식 낳고 누구네 집 며느리 역할에 충실하다보니 생일의 의미조차 희미해졌다.

더구나 건망증 심한 남편에게 축하이벤트까지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무슨 기념일이라든지 축하할일에 유난히 둔감한 사람이다.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 겹겹으로 치고 아니, 입체조각을 붙여둔다 해도 마찬가지일거다.

그나마 내가 자기 마누라인 것은 잊지 않고 집 찾아오니 다행으로 여기고 산다.


그러던 위인이 며칠 딸아이 극성에 장단 맞추느라 꽤나 버거웠을 것이다.

이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준비를 하는 게 분명했다.


어젯밤 학원에서 밤늦게 돌아온 딸아이가 아빠를 재촉하는 표정이 엿보인다.

두런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나서려는 두 사람.

피곤할 아이를 먼저 생각하고 한마디 보탰다.

“어이! 적당히 하시지. 나 괜찮거든. 케이크 안 좋아 한다구!”

남편의 말투에 애원이 섞여있다.

“그냥 모른 체 좀 해주라!”

아이고! 도저히 눈뜨고 못 봐줄 어설픈 모의꾼들 같으니.

삼 십 여분 뒤에 들어온 딸아이가 후다닥 주방으로 내달리더니 냉장고에 뭔가 숨긴다.

자꾸 쿡쿡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드디어 그들의 허술한 이벤트가 절정을 보일 바로 오늘이다.

아침식탁위에 아이손바닥만한 케이크가 올려져있다.

초를 꽂으며 남편이 던지는 말.

“뭔 나이를 이렇게 많이 먹은 거야?”

듣고 있다 한마디 보탰다.

“여보세요, 당신 생일날은 한 살짜리 초로 가득 채워 줄 거다!”

어느새 끼어 앉은 아들도 손바닥 쳐대며 축하노래를 불러준다.

식순에 의거하여 다음은 선물 증정식이란다.

누런 상자를 내미는데 열어보니 외출용 여름 슬리퍼다.

딸아이의 앙증맞은 글씨로 써내려간 편지도 들어있다. 남편도 아래 두어줄 축하메시지를 적긴 했다.

“어머! 예쁘다. 딱 맞네! 고마워! 마침 신발이 필요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대본에 맞는 연기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필요이상 콧소리를 내며 감탄사 연발탄이었다.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딸아이에게 물어본다.

“근데...., 엄마가 신발 필요한건 어떻게 알았어? 너 돈 없는데.”

재잘거리며 풀어놓는 그간의 두 사람 이벤트계획서가 폭로되기 시작한다.

“엄마가 전에 신발장 앞에서 그랬잖아. ‘갈색 신발이 없네. 가방이랑 맞아야 좋은데...’ 그거 기억했다가 아빠한테 말했지. 나한테 용돈 만원밖에 없다구.

좀 보태라구했어. 편지 밑에 글도 쓰라고 말했지!”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이 딱 맞긴 하구나.

내키지 않아도 딸의 성화에 마지못해 응했을 남편의 성의가 괘씸하다.

엄마의 생일조차도 모른 채 케이크 먹을 생각에만 몰두하는 아들이지만,

동그랗게 모여 앉은 가족이 있어 눈물겹게 행복하다.

억지로라도 축하받고 싶은 마음에 아들의 가방에 노란편지지를 접어 넣는다.

“아들! 여기다 ‘엄마생일 축하해요’ 편지 적어줘! 학교에서 꼭 써와야 돼. 알았지?”

“네..., 알았어요!”

들었는지 말았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설사 글씨 하나 없는 빈 봉투를 들고 온다 해도 녀석은 내 사랑이다.


때로는, 

가족이 벌이는 어설픈 이벤트에도 지극한 감동으로 다가서라.

끈끈한 사랑이 깔려있음에야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가족들이여! 피곤의 먼지 털고 집으로 돌아오라.

 

저녁엔 엄마가 쏜다!




2009년 4월 15일에 음력 삼월스무날로 기억하고 싶은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