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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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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다는 거(9)


BY 개망초꽃 2007-10-13

상습적인 음주 운전으로 구속된 남편이 말이다, 경찰서에 구속된 지 일주일 만에 인천구치소로 옮겨졌다.

남편은 술과 함께라면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음주운전으로 벌금도 덥석덥석 아낌없이 냈고, 운전면허도 여러 번 취소가 되어서 나는 한 번도 따지 못한 운전면허를 찹쌀떡처럼 철썩철썩 잘도 붙었다. 그렇게 술을 먹고 요리조리 신나게 피하며 살다보니 행운이 따라주지 못해서 경찰서 누런 갱지에 적힌 죄명이 상습적인 음주운전이라고 반듯하고 알아보기 쉽게 적혀 있었다.

집을 옮기면 가루비루나 휴지를 사 가지고 집들이를 가듯이 죄를 짓고 들어간 곳도 세끼 밥을 먹고 쌀 거 싸고 잠을 자니 있는 동안은 내 집이니 집들이를 가야겠다.

살다 살다 별일이 다 많다더니 우리가 그 짝이다. 암튼 이리 봐도 웃기고 저리 봐도 웃긴다.
\"잉~~ 구치소에 있다니까 기가 막혀서…….\"
\"아! 글쎄…….인생을 포기한 사람 같어, 폐인 같다니깐. 흐흐흐.\"
\"나도 모르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 헤헤헤.\"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나보고 도 닦았냐고 한다.
태연하게 말하고 실실실 웃으며 말하니까 나도 내가 생각해도 도 닦은 미친 여자 같다.

구치소에 가던 날도 경찰서에 가던 날처럼 날씨가 화창했다. 올 핸 구성지게 비가 많이 내렸는데 남편에게 면회를 가던 날은 화사하게 화창했다.
주민등록증을 내고 면회 접수증을 쓰고 한 줄로 길게 붙여 논 방석같이 생긴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 가만히 앞을 보니 음식 사입 코너가 보이고 돈 사입 창구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속에서 슬그머니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나마나 들으나마나 구치소에서 주는 음식이 제대로 생겼겠어. 이러한 잡스런 생각이 머릿속에 돌더니 돈이나 넣어 줄까, 로 바뀌었다.
지갑을 열어보니 십만 원이 들어 있었다. 오만 원 꺼내 사입 창구에 돈을 내미니 누런 갱지를 한 장 준다. 여긴 뭐든지 음지처럼 칙칙하다. 남편이름 쓰고 내 이름을 표정 없이 써서는 사입 창구에 표정 없이 넣었다.
내 남편만 죄 짓고 사는 게 아닌가보다.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빈 망석이 남지 않도록 많았다. 병원과 구치소는 안 올수록 좋다는데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겠어. 

 

살면서 내 맘대로 되는 게 있었을까? 냇물 흐르듯 여기까지 흘러 흘러 와서는 지금은 구치소 방석의자에서 한 남자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다.  고향 냇물 가장자리엔 잔디가 요처럼 깔려 있었다. 잔디 가장자리로 패랭이꽃이 팔랑개비처럼 날아다녔다. 잔디와 닿아 있던 돌작밭엔 석고처럼 하얗고 외갓집 누렁이처럼 누렇고, 여름내 냇가에서 놀던 아이들처럼 까무잡잡한 돌들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밭이 끝나는 지점엔 모래밭이 이어졌다. 바짝 건조한 하얗고 누렇고 까무잡잡한 돌가루가 섞여서 은은한 빛의 모래가 산골 초등학교 운동장처럼 넓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를 것 같지 않는 냇물처럼 모래운동장도 고향이 없어지지 않는 한 늘 그대로 있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십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고, 이십년이 흘러 애기엄마가 되었을 때 잔디도 패랭이꽃도 모래운동장도 옛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내 맘처럼 남아 있지 않던 고향처럼 내 인생도 내 맘처럼 살아지지 않았다.

지금 나는 죄인의 아내가 되어 고개를 숙이고 한숨과 함께 유년의 은은한 냇가 풍경을 떠올려본다.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도 나처럼 유년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인생을 다 산 것처럼 포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하다 보니 무덤덤할지도 모른다. 나도 처음이라 그렇지 이런 일을 여러 번 겪다보면 초인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래,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거래, 사랑도 미움도 이별도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래, 하게 되지 않겠나.
병원도 무채색이고 구치소도 무채색이다.
병원도 삶과 죽음의 귀로에 서서 절망했다가 깨어나고, 혼미해 졌다가 혼란스러워 지는 것.
구치소란 곳도 병원과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내 차례였다.
큰 문이 달려 있는 복도에 들어서니 똑같은 회색 문이 질서를 지키며 나란히 붙어 있었고,
문마다 번호가 차례차례 질서 있게 붙어 있었다.
지정받은 번호를 찾아 들어가니 질 안 좋은 황토 물에 적신 것 같은 죄수복을 입은 남편이 보였다. 가슴왼쪽엔 명찰인지 번호인지를 달고서 황토 물을 한바가지 뒤집어 쓴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면회시간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오 분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데, 후다닥 시간이 가고 남편도 어디론가 나가고 나도 들어갔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랬다, 후다다닥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것뿐이었다. 흑백 영화를 잠깐 보았다. 빠삐용이란 영화를 봤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영화를 본 것 같기도 하고,  몽롱했고 멍청했다. 오래된 영화였고, 읽다가만 소설이고, 꾸다가만 꿈이었다.

아하....남편이 한 말 중에 이 말이 기억난다.
\"오만원만 넣어 줘\"
그래 난 오늘 손해 본 게 없다. 남편이 원하는 금액 오만원만 넣었으니까. 남편도 나도 손해 본 것도 없고 이윤을 남기지도 않았다. 우린 서로 싸우지도 않고 실랑이도 없이 수지타산이 딱 들어맞았다. 결혼해서 이렇게 딱 들어맞는 게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거다, 아마도…….


인천구치소에 갔다 온 뒤 여름 내내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창가에 앉아 몸 놓고 마음 놓고 빗소리를 많이 들었던 여름이었다.
단 한번 눈물을 흘렸고, 두어 번 남편은 지금 뭘 할까?했고, 서너 번 남편이 미웠고, 대여섯 번 앞날이 암담했고, 예닐곱 번 우울증에 시달렸고, 열 번 정도 한숨을 쉬었다.
끈질긴 비와함께 여름이가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빗소리와 잠든 여름이었다면 가을은 조용히 소리 없이 내렸다. 때 이른 코스모스가 호수공원 길가로 듬성듬성 피어나고 있었다. 남편은 구치소에서 여름비의 소리를 음미하며 미래를 찬찬히 계획하고, 과거를 천천히 음미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은 내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구치소에서 나오던 날 남편은 외박을 했다. 밥 먹듯이 하는 외박이라서 밤새워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만 가정을 포기를 해야겠군, 하는 불안감이 오래된 때가 밀리듯 굵다랗게 밀렸다.


아침에 남편은 낯선 낯빛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집 내 놔야겠어, 얼른 팔아서 빚을 갚아야지 별 수가 없다, 한다. 다음날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확인차 전화를 했나보다. 시세보다 싸 게 내 놨으니 잘 팔릴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한다. 걱정은 무슨, 건더기라도 남아 있어야 더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고 미워도 하고 안달이라도 하지, 국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뭔 걱정. 이틀째 되는 날 나보다 젊은 여자가 집을 보러 왔다.

“수리 한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아서 수리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러네요.”

“신경 써서 수리한 거예요. 남편이 조명 회사를 다녀서 조명도 최신 유행하는 거예요.”

“예쁘네요.”

나는 구석구석 따라다니며 자신 있게 집을 보여 주었다.

안방은 아늑하고 포근하라고 분홍색 톤으로 도배와 장판을 했다. 딸아이는 파랑색을 좋아해서 분홍색 책상을 파란색 시트지를 사다가 붙이기도 했다. 천장엔 불을 끄면 별이 뜨도록 형광별도 붙여 주었다. 아들아이 방은 연두색으로 통일했다. 거실과 부엌은 주황빛이 살짝 감도는 베이지색으로 깔끔하게 고쳤다. 베란다 베티칼은 접으면 분홍빛이고 펼치면 주황색이었다.

입주한지 15년 만에 리모델링한 내 집, 남편의 집, 아이들의 집, 우리들의 집이 삼일 만에 다른 사람의 집으로 바뀌었다.


“사모님 도장 갖고 나오세요. 집이 금방 잘 팔렸습니다.”

미련 때문인지 미련스러움 때문인지 끝 여름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날, 남편 이름의 집은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집으로 이전이 되었다.

표정 없는 몸으로 표정 없는 얼굴로 도장을 찍었다. 웬 도장을 이리도 많이 찍는지, 계약서를 여러 장 넘기면서 찍고 장마다 반씩 접어서 도장을 또 찍었다.

 

후덕하게 생긴 부동산 중개인은 날 보고 자꾸자꾸자꾸자꾸자꾸 셀 수 없이 웃었다. 부동산에 들어가면서 우산을 접는데도 우산을 보고 웃고, 인사를 하면서 웃고, 부동산 안으로 한 다리를 올려 놓는데 웃고, 계약서를 쓰면서도 웃고, 도장을 찍으면서도 웃고, 다른 여자 이름으로 집이 팔렸는지 확인을 해 보라고 하면서도 웃고, 계약금을 확인해 보라고 하면서도 웃고, 잔금은 이사하는 날 준다고 하면서도 웃고, 남편의 집도 내 집도 아이들 집도 아닌 이제는 남의 집으로 가려고 우산을 펴려고 하는데도 웃고, 남의 집이 된 집을 향해 한 다리를 올리는데도 웃고, 힘차게 인사를 하면서도 웃었다.


인생사가 참 웃기다. 강원도 깡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엄마의 좁다란 자궁에서 팔다리 긴 내가 태어난 것도 웃기고, 키가 장대만한 아버지 씨를 품어 아빠 외모를 닮아 태어난 것도 웃기다. 연약한 엄마만 홀로 남겨두고 꼴까닥 죽은 아버지는 진짜 웃기는 양반이시다. 똥파리 치워가며 먹고 살려고 기어든 똥파리 왕십리도 웃기고, 변호사 사무실 다니다가 공부해 시험쳐서 삼성으로 스며든 것도 웃기고, 거기서 키가 나만한 남편을 만난 것도 웃기다. 결혼? 웃기다. 내 집? 웃겼다. 이혼? 더 웃기다. 혼자된다는 거? 더더더 웃기고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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