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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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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엄마와 나의 꿈


BY 개망초꽃 2006-09-08

아버지 그거 아세요? 엄마가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는 거...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엄만 젊었을 때 꿈이 뭐였어?\"
오늘,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의 꿈을 물어 보았답니다. 아버지도 엄마의 꿈을 물어보신적이 있나요? 저도 참 무심하지요? 이제서야 물어보니...

\"무슨 꿈이 있었겠니. 외할머니가 일 못하면 빌어먹을 년하고 욕이나 했는데... 그림을 잘 그려서 선생님이 내 그림을 반 친구들에게 보여 주곤 했지. 그래서 그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긴 했었지... \"

아버지, 저도 엄마처럼 초등학교 때는 그림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엄마의 재주를 이어 받아서 제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지만 전 지금 그림과 연관된 일이 아닌 과일을 주로 파는 수퍼마켓을 하고 있어요.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요? 엄마가 무얼 하면서 우리 삼남매를 키웠는지 알고 계실겁니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월남에 다녀 오신 후 몹쓸병을 얻어 사형선고를 받고, 엄마의 친정인 강원도 골짜기로 이사를 하셨다지요. 죽음의 그림자를 앞 세우고 스물여덟살 된 젊은 아내와  제가 초등학교 일학년이었고, 6살인 맏아들과 막내아들은 였으니까, 아버지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아버진 그 때 한숨 한번에 걸음 한번떼면서 강원도 고갯길을 넘으셨을 겁니다. 그 해 여름 아버지는 제 손을 잡고

“미안하다. 동생 잘 보살피고...”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 있답니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외갓집에 우리 삼남매를 맡게 놓고, 서울 왕십리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셨답니다. 안 해 본 장사가 없었지만 제일 오래도록 한 장사가 과일장사였어요. 당연히 노점이었지요. 제가 장사하기 힘들어 할 때 마다 엄마는 그러세요.

\"난 쫒겨 다니며 장사를 했단다. 넌 가게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그때는 꿈이 뭔 줄 아니? 가게안에서 장사를 하는 게 꿈이였단다. 가게 안에서 쫒겨 다니지 않고 따뜻한 난로 쬐면서 장사하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어. 넌 행복한거야. 내 꿈을 넌 이루었잖니?\"

 

아버지 전 요, 장사하는 게 꿈이 아니였어요. 초등학교 땐 엄마의 재주를 닮아 미술을 하고 싶었고, 고등학교 땐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근데 엄마의 팔자를 닮아 과일장사를 하고 있어요. 몇년전 혼자될 준비를 할 때 살아낼 자신이 없어 무기력자로 한 달을 살았었어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고, 전화 통화도 하지 않았어요. 종일 전화를 안 받으면 엄마는 혹시 딸이 딴 세상 사람이 됐을까봐 덜컹거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며 우리집으로 와서는 울고 있는 나를 보시고,

“그래 실컷 울어라. 엄마도 니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니들 셋을 재워 놓고 얼마나 었는지... 그래도 내가 다시 추스리고 살 수 있었던 게 뭔 줄 아니? 그래...너희들 때문이었지.“

아버지, 전 다시 일어났어요. 왠 줄 아세요? 물론 아이 둘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마 때문이었어요. 제가 힘들어 쓰러질만큼 보다 더 아팠을 엄마를 보았기 때문이예요.

 

아이 둘과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엄마네로 이사를 했어요. 낡고 작은 엄마네 아파트 뜨락에 자주색 소국꽃이 막 피려고 할 때니까? 그래요. 2002년 9월이었어요. 그 해 겨울부터 전 장사를 시작했지요. 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으면 두도 못 낼 일이였지요. 엄마는 부지런하시고 극성맞으세요. 옛날엔 안 그랬다고요? 맞아요. 혼자서 자식 셋을 키우다 보니 변했을거예요. 전 게으르고 욕심이 없어서 엄마한테 잔소리를 많이 들어요. 그래서 엄마와 언성을 높일 때가 더러더러 있지요.

아버지, 제가 이혼을 하고 엄마네에서 살고 있을 때, 엄마의 꿈이 뭔지 아세요? 제가 집 장만을 하는 거랬어요. 근데 2년 6개월 만에 그 꿈이 이루어졌어요. 올 봄에 집을 샀답니다. 전 가을쯤에 살 계획이었는데 엄마가 먼저 서둘렀어요. 가을엔 집 값이 올라간다고 뉴스에서 떠들어 대니까. 대출을 받아서라도 집을 사자고 했습니다. 그래요? 그럴까?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동네 부동산을 뒤적이며 이틀 만에 집을 샀어요. 번개 불에 콩 궈 먹는다는 옛말을 우리에게 붙여야 맞겠지요? 엄마네 집 옆 동에다가 앞 뒤 가릴 틈도 없이 일을 저질러 버렸지 뭐예요. 겉은 십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지만 속은 깨끗이 수리한 집이라서 첫눈에 반했지 뭐에요. 암튼 집을 사서 며칠 전에 이사를 했답니다. 엄마는 저보다 더 신이 나서 제가 장사 나간 사이에도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리며 청소를 하고 창밖을 내려다보며 전망이 참 좋다 가로수가 연두빛이다 하시며 전화를 하셨어요.

“이제 네가 집을 장만해서 엄마는 더 바랄게 없다.”

아버지도 기쁘시지요? 제가 혼자 되었을 때 엄마처럼 아버지도 한숨을 많이 쉬셨지요? 이제 작지만 집이 있어요. 아이 둘과 편히 쉴 수 있는 내 집이 생겼답니다.

 

엄마한테 다시 물었지요. 앞으로 꿈이 뭐냐고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아세요? 우리 삼남매 건강하게 사는 거래요. 그래서 그거 말고 엄마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했더니 마당 있는 집에서 꽃 가꾸면서 사는 거래요. 아버지 앞으로 제 꿈이 뭔지 아세요? 고향으로 내려가 들꽃 가득한 집에서 글을 쓰며 살고 싶은 게 제 꿈이에요. 엄마도 나도 어릴 적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건 잘 될 것 같지 않나요?

엄마에겐  땅이 조금 있어요.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 동시에 나의 고향인 강원도에다가 집은 소박하고 작게 짓고 마당은 넓게 만들고 싶어요. 앞마당엔 흔한 들꽃을 기를 거예요. 씀바귀 꽃과 강아지풀이나 개망초 꽃을 심을 거예요. 느티나무로 그늘을 만들어 평상을 놓고,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공간을 돌멩이로 동그랗게 만들고 싶어요.  

뒤뜰엔 앵두나무가 좋겠어요. 장독대 사이로 봉숭아, 과꽃, 채송화, 백일홍을 심고 싶어요. 어릴 적에 외할머니가 키우던 추억의 꽃이거든요. 아버지도 아프셨지만 고향 내음이 나는 꽃 알고 계시지요? 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아버지가 내려다보고 있는 산골 마을에 엄마랑 나랑 십년 안으로 이사갈  생각입니다.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고 처참하게 넘었던 그 고갯길을 엄마와 함께 꿈을 가꾸러 넘어갈 겁니다. 

엄마는 지금도 꽃을 잘 가꾸세요. 초봄이면 연산홍에게 꽃을 피어 물게 만드시고, 군자란은 해마다 노을색꽃잎이 머물고, 사시사철 꽃들이 숨을 고르게 쉬게 하는 재주를 갖으셨어요. 아버지 저두요. 가게 앞 플라타너스 나무 밑 둥에 들꽃을 매년마다 불러들인답니다. 요즘은 민들레가 한창이고 도라지도 새 순을 내밀었어요. 씀바귀 꽃이 피려고 준비중이고요. 점나도나물 꽃도 피어났구요 토끼풀도 싱그럽게 올라왔어요.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해요. 알뜰하고 헌신적인 엄마가 옆에 있어서 벗이 되어주고 동반자가 되어준다고. 의지할 수 있고 속상한 일 탈탈탈 털어 놓을 수 있는 엄마가 있어서 혼자 살아도 전 괜찮아요. 이리 빠르게, 기적처럼, 기적처럼 집을 샀다고들 해요. 다 엄마 기도 덕분이지요.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밤마다 새벽마다 기도를 드리셨어요.  엄마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전 그걸 믿고 싶어요. 이제는 마당이 있는 고향으로 가서 엄마가 원하시는 꽃을 키우며 남은 세월을 살고 싶답니다. 제 꿈이기도 한 그날이 십년 안으로 당겨지길 저도 밤마다 기도 해야겠어요.

아버지? 아버지의 꿈은 뭐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