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처음 학부형이 되면서 내겐 새로운 일거리가 하나 생겼다. 바로 연필 깎기다. 물론 초등 1년생 엄마가 할 일이 이것만은 아니다. 매일 알림장 확인도 해야 하고 숙제도 들여다 봐 줘야 하고 저 혼자 잘 정리해 놓은 가방도 몰래 점검해야 하는 등 챙길 게 참 많다. 가방 메고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의 뒷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던 나는 이 모든 수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기쁘고 설레던 그 일들도 결국은 매일 해야 하는 밥이나 청소처럼 나른한 일상으로 자리 잡아 갔다. 한데 신기하게도 이 연필 깎는 일만은 성가시기는커녕 갈수록 재미있다.
이삼일에 한 번 꼴로 나는 연필을 끌어모은다. 심이 부러지고 끝이 뭉툭하게 닳은 연필이 많으면 많을수록 신이 난다. 칼과 못 쓰는 종이 한 장이면 준비 끝이다. 연필은 하나같이 아이들 손때가 묻어 거무스름하다. 처음 깎았을 때의 깨끗한 속살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첫날밤에 신부의 옷고름을 푸는 새신랑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칼을 잡는다. 연필은 부드러운 칼질 한 번에 별 저항 없이 순결한 속살을 드러낸다. 임무를 다한 겉껍질 역시 도르르 말리며 미련 없이 종이 위로 툭툭 떨어진다. 아이들은 그걸 보고 파마머리 같다며 좋아한다. 연필은 속살이 분홍색인 것도 있고 갈색인 것도 있다. 또 결이 부드러운 것이 있나 하면 아주 거칠고 품질이 나쁜 것도 있다. 연필 깎기의 절정은 사각사각 심을 갈 때다. 상에 턱을 받치고 조용히 구경하던 애들도 이 부분에선 늘 엄마 대단하다는 감탄을 쏟아낸다.
나는 연필심을 갈 때마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 연필심 하면 떠오르는 연상 작용 같은 거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지 싶다. 그날 수업시간에 나는 연필을 깎고 있었다. 당장 쓸 연필이 없었던 것이다. 앞에 앉은 아이의 등 뒤에 숨어서 연필을 깎는 것까지는 좋았다. 한데 그놈의 심을 갈다가 그만 딱 들키고 말았다. 책상 모서리에 심을 간 다음 나는 그 가루를 후 하고 불어버렸던 것이다. 그 장면을 본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 입에 들어가라고 그 가루를 그냥 날려버리는 거냐며 노발대발하셨다. 그날 얻어먹은 욕이 아마 한 바가지는 될 것이다.
겨우 열 살짜리 아이가 한 실수인데 그게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었을까 싶은 생각에 가끔 섭섭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마음 없다. 난 여섯 살짜리 내 아이한테도 관대할 수 없었으니까. 작은애는 뭐든지 부딪쳐 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다. 내가 연필심을 갈 때마다 재채기는 물론이고 콧바람조차 세게 내면 안 된다고 하도 주의를 주니까 대체 바람이 불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엄청 궁금했나 보았다. 하루는 연필을 깎고 있는데 갑자기 깔아놓은 종이가 휙 날리며 그 위에 있던 내용물들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작은애가 턱을 괴고 구경하는 척하면서 입술을 아주 작게 오므리고 후 하고 바람을 만든 것이었다. 아이의 그 여린 숨결 한 번에 새카만 가루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찌나 열이 받던지, 나는 아이한테 마구 소리를 지르며 광분했다. 만약 작은애와 그런 소동을 벌이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그 선생님을 원망하며 살 뻔했다.
뾰족뾰족 멋쟁이가 된 연필들은 먼저 큰애 필통에 가지런히 채우고 나머지는 연필꽂이에 조르륵 꽂아 둔다. 그때의 기분은 잘 말린 빨래를 차곡차곡 개서 서랍장에 넣을 때처럼 산뜻하다. 아, 예전의 난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내가 연필깎이를 처음 산 것은 큰애 나이 다섯 살 때다. 마트에 진열돼 있는 예쁜 연필깎이를 보고는 탐이 나서 덜컥 사 버렸다. 아이가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당장 쓸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필요한 거 좀 일찍 사는 셈 치기로 했다. 하지만 금세 망가져 버렸다. 애들 손이라 남아나지 않은 건지 겉만 화려하게 만들어진 물건 탓인지 하여간 얼마 못 가 고장이 났다. 그 뒤로도 두 개를 더 사 주었지만 다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러자 더는 사 주기가 싫어졌다.
그제야 나는 내 잘못을 깨달았다. 왜 나는 망가질 때마다 당연한 듯이 새 걸로 샀을까? 왜 내가 직접 깎아줄 생각을 못 했을까? 시간에 쫓기는 맞벌이 부모도 아니면서 말이다. 애들 공부에 필요한 건 무조건 사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또 연필은 연필깎이로 깎아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 같은 것들이 맞물려 그런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좀 더 따져 보거나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세태를 따라가려 했다는 점에서 나는 깊이 반성했다. 그 벌로 연필은 끝까지 내가 책임지기로 마음먹었다.
옛날에는 연필깎이라는 게 없었다. 부잣집 애들은 썼는지 몰라도 나는 구경을 못 해 봤다. 그래서 늘 막내오빠가 연필을 깎아 주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막내오빠는 연필 깎는 솜씨가 좋았다. 오빠는 참 부드럽고 섬세한 성격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연필심도 미인의 속눈썹처럼 길고 날카로웠다. 그 연필로 숙제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글씨들이 날씬하다가 그 끝이 어느 정도 닳아야 비로소 편안한 글씨체가 나오곤 했다. 그렇게 잘 깎은 연필을 필통에 넣어두고 잠자리에 들 때면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이 든든했다. 그렇게 나한테 다정했던 막내오빠는 지금 몇 년째 소식이 끊어진 상태다. 연필을 깎을 때마다 나는 막내오빠가 그립다.
연필 하면 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몽당연필이다. 몽당연필을 튼튼한 볼펜대에 끼울 때의 뿌듯함은 연필을 깎으면서 얻는 보너스 같은 거다. 절약이나 교육적인 측면보다도 아무 쓸모없던 몽당연필이 한순간에 뚝딱 키다리 연필로 변신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내게는 더 매력 있다. 몽당연필의 무한한 가능성이 내 인생에도 적용되었으면 하는 마음일까. 한번은 아이가 필통을 잃어버리고 왔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볼펜대가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볼펜 한 개를 다 써야 볼펜대를 하나 얻을 수 있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뒤로 아이는 단단히 조심을 한다. 간혹 잊은 채 두고 올 때도 있지만 다음날 분실함 같은 데를 뒤져서 꼭 찾아온다. 필통, 우산, 신발주머니 같은 것들이 한 번씩 미아가 되곤 했다. 첨엔 잃어버린 물건이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이들이 정직해서라기보다는 남의 물건은 고사하고 내 물건도 잃어버리면 그걸로 그만인 무관심 탓임을 알고는 기분이 씁쓸했다.
이렇듯 연필을 깎다 보면 온갖 상념들이 머리를 스쳐 간다. 연필 몇 자루 깎는 데는 단 몇 분이면 된다. 한데 그 짧은 시간에 그토록 복잡하고 많은 생각들이 샘솟는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단지 잡념으로만 끝나지 않고 한 단계 높은 사고로 승화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내가 해 줄 일은 없다. 그저 연필만 열심히 깎으면 된다. 그러면 머리가 다 알아서 문제제기도 하고 정리도 하고 결론도 내린다. 사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수확은 대단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 일을 꾸준히 계속한다는 점이다. 확실히 연필을 깎기 전보다 지금 내 마음이 훨씬 안정되고 생각의 키도 부쩍 자란 느낌이 든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데 형편은 언제 펼지 기약이 없다. 하지만 나는 늘 지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려 한다. 불평불만을 갖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욕심을 내 본다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연필을 깎고 싶다. 연필을 깎고 아이들을 챙기고 남편을 섬기는 고요한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내가 다시 직장에 안 나가도 될 만큼 남편의 일이 잘 풀려야 한다. 지금 내 소망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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