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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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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의 첫사랑.(7)- 마무리


BY 일상 속에서 2006-06-22

 

<전 영록을 많이도 닮은 철과 깡패라 불리던 소녀의 추억담,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내가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끝내지 못할듯하여 오늘 대단원(?)의 막을 내려 한다. 이 글에 관심 가져준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일주일이 흐르고 다시 집으로 내려가는 날이었다.

평소보다 좀 더 늦은 시간이었다.

혹여 중학생의 하교 길과 맞아 떨어지게 될까봐 의도적으로 늦게 출발했다.

일주일동안 철로 인해 속을 끓인 자신에게 소녀는 슬슬 부아가 나던 판이었다.

예전에 그를 몰랐을 때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고도 묘했다.

한산한 버스 안, 뒤쪽에 철이 있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예쁘장하게 생긴 또래의 여학생들과.

버스에서 철을 본 순간 소녀는 다시 내려버리고 싶었지만,

‘내가 왜 저런 놈을 피해야 해?’ 하는 오기가 발동했다. 동생 진영이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면서 먼저 막내를 데리고 집으로 간 후라서 소녀는 혼자였다.

버스 안에서 본 창밖의 풍경은 회색빛이 감돌고 있었다.

12월이 멀지 않은 늦은 가을은 벌판과 산의 나무들을 앙상하게 만들어 놓았다.

버스 안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그중 소녀가 앉은 자리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였다.

“안녕!”

“...”

어느새 철이 바로 옆자리로 다가와서 앉았다.

하지만 소녀는 창가로 향한 시선 거두지 않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사과했는데도 아직 화가 안 풀렸어?”

“?”

무슨 사과? 사과는 먹는 사과도 본 적 없는 소녀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녀가 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한 것을 잊고 철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여학생들의 우상인 전 영록 형을 닮은 철이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들어내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잘생긴 얼굴이다.

“편지 못 받았어?”

“무슨 편지? 받은 적 없어.”

철이 동생에게 편지를 주며 진영이에게 주라고 시켰단다. 가방 정리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동생의 가방에서 뒹굴고 있을 편지의 영상이 순간 소녀의 뇌리로 스쳤다.


사과... 철이 길바닥에서 스트립 쑈를 하건 말건 그것에 발끈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언을 퍼부었으니 사과할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라고 생각한 소녀였다. 하지만...


철이 뾰로통한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리 지금 화해하자.”

“싫어.”

소녀는 자신의 성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곁에 있는 철로 인해 잔뜩 긴장할 정도로 마음을 뺏겼음에도 철과 가까워지면 자신이 더 바보같이 변하게 될 것만 같았다. 깡패라고 불리 우며 큰 걱정 없이 지내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의 사과를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던지 소녀의 반응에 기분이 상했는지 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쪽으로 갔다.

그리고 소녀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여학생들과 떠들어댔다.

중간쯤 왔을까? 한 무리의 남자애들이 버스에 올랐다. 소녀와 한반 남학생들이었다. 다들 한 손에는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있었다.

“야!!! 깡패... 아니, 영미야. 너 이제 집에 가냐?”

친구들의 등장이 소녀는 내심 반가웠다. 더 이상 뒤에서 다른 여자들이랑 시시덕거리는 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터이니.

소녀 역시 그에 뒤지지 않게 친구들과 동성친구처럼 어울리며 떠들었다.

그 날, 늦은 오후.

집안정리가 끝난 소녀가 바닷가로 가기 위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철이 살고 있는 집을 지나쳐 가려는데 지켜보기라도 한 듯, 철이 제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너 웃긴다. 다른 애들 앞에서는 그렇게 신나게 잘도 떠드는 애가 내 앞에서만 쌀쌀맞게 구냐? 너 나 좋아하잖아.”

다짜고짜 다가 온 철이 소녀에게 시비를 걸었다.

소녀... 구두 발로 철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착각은 자유라며? 넌 이 세상 여자들이 다 너만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사냐? 웃기고 있어.”

.
.

.

.

.

.

둘은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는 앙숙이 되어버렸다.

소녀가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더욱 엽기발랄 해졌다.

걱정했던 것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친구들과 잘 적응했다.

그런 소녀 앞에 자주 등장하는 철은 역시나 꽃들 속에 나비 한 마리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소녀의 친구들 중에도 철에게 마음 뺏긴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철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애쓰는 가시나들 속에서 끝까지 모르는 척, 안면몰수에 철판을 깔고 다니던 소녀였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이 철을 보고,

“정말 잘 생기지 않았니?\" 하면,

“너 눈 삐었냐? 저게 잘 생긴거게? 안경 써, 지지배야.\" 한다거나,

“눈웃음치는 거 봤니? 심장이 벌렁거려.” 하면,

“썩은 동태눈도 저보다는 났겠다.” 하는 식으로 헐뜯곤 했다.


그렇게 철에 대한 비 호감을 확실하게 들어내고 다니는 어느 날, 철이 소녀의 반으로 찾아 왔다. 그날 지지배들 반은 자지러졌다.

철이 소녀에게 ‘학 알’이 담긴 작은 병을 건넸다. (그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종이학과 학 일이 유행일 때였다.)

얼떨결에 받게 되게 된 그것으로 소녀는 친구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내숭 떨었네,

속셈이 뭐였냐?

언제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느냐...는등...


처음 본 순간부터 소녀의 심장을 고장 냈던 철이 갑작스레 어느 순간부터 미워졌다. 그냥 미운 것이 아니라, 화가 치밀어 오를 만큼 미워했다. 그 당시는 몰랐다. 미움이란 것도 아무에게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그만큼 커다란 관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소녀가 복도로 나오기가 무섭게 학 알을 건네고 말없이 달려가던 철의 모습이 내내 소녀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철을 보게 되는 마지막인 줄을 소녀는 몰랐다.


학 알을 받고 그동안 자신이 너무했다고 뉘우친 소녀는 일주일 만에 내려간 집에 가방만 던져 놓기가 무섭게 그의 집으로 향했다.

매일 닫혀있던 문이 어쩐 일로 훤히 열려있었다.

살짝 고개를 디밀고 본 집 안이...텅 비어있었다...


뒤늦게 알았다.

철네 식구가 이사를 갔다는 것을.

소녀는 뒤늦게 엄마에게서 철의 엄마가 몹쓸 암에 걸려서 친정집이 가까운 곳으로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소녀는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때 늦은 후회를 해야만 했다.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남몰래 많이도 힘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고등학교 다닐 시절, 동창들이 또래의 남학생을 사귈 때, 소녀는 나이차가 좀 나는 사회인을 만나곤 했다. 그때 역시 남자 앞에서 도도한 콧대와 고집만 세우던 소녀는 남자를 만날 때, 혼자 나가는 법이 없었다. 친구들을 떼거리로 데려가서 실컷 얻어 먹이고 영화까지 때리고 그냥 헤어지곤 했었다.


소녀 사회인이 됐을 때도 2년 넘게 죽기살기로 따라다니는 남자에게 친구임을 강요하며 어울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과 그 친구...영화 속 한 장면처럼, 결투 비스무리 한 것을 했다.

내 남편 나 때문에 마음고생, 참으로 많이 했다.

내 방에 들어와서 읽기를 훔쳐 읽다가 누군가와 키스한 대목에서 혈압 지대로 올리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정말 폭삭 망한(?) 아줌마가 되어버렸지만...소시 적에(못난 사람들 다들 이말 응용하더만...쩝...-_-;;;)날리고 다닌 때가 있었다.

일찍 남편에게 코가 꿰여 잠깐 날리다가 말았지만...


아빈이가 6살 쯤.

친정에 내려갔다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영이는 엄마에게 맡기고 아빈이만 데리고 나갔던 것 같다.


그곳에서 철을 보았다.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스 안에서만 이뤄진 것 같다.

첫사랑의 달콤 쌉싸름한 기억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지금쯤...그는 어디서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고 한번 씩 꺼내보곤 했었다.


아련한 추억 속에 그를 한번은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 그를 만났는데...

모습이 영...거시기 했다.

미소년의 모습... 당연히 세월이 흘렀으니 찾아보기 힘들 테지만... 그는 세월 속에서 너무도 색이 바래있었다. 흑백사진처럼...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까칠한 턱수염, 후질 구레한 옷이며, 구겨 신은 운동화, 그 밖으로 나온 뒤꿈치에 구멍 뚫린 양말... 생각해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첫사랑은 마음에 품고 있을 때가 좋다는 말이 떠올랐다.

보지 않았음 좋았을 것을...


미소년의 탈을 벗은 그가 다가왔다.

아이만 없었다면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을 조금만 밀고라도 잠시 차라도 마셨을 텐데... 스쳐 지나가는 인연 때문이지 그마져도 여의치 않았다.


그가 예전에 내게 떨림을 줬던 가지런한 치아를 들어내 보이며 다가왔다.

“그래도 보게 되네요. 몇 번 왔었지만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는데... 시집갔다는 얘기 들었어요. 반갑네요.”

“아... 그랬어요?”


세월의 두꺼운 벽을 두고 만난 둘... 대화가 자연스러울리 없었다.

아빈이가 내 옷 끝자락을 잡아 당겼다.

“엄마, 누구에요?”

“음...”

아들의 질문에 나는 선뜻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아들의 곁으로 다가와서 예전에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안녕, 아저씨는 옛날에 엄마 친구야. 만나서 반가워.”

“엄마, 정말이에요?”

낯선 아저씨의 내미는 손을 잡기 전에 아빈이가 나를 올려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에서 함께 있던 20여분 동안 나는 참으로 어색했다.

그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헤어지며 본 어깨가 쳐진 뒷모습에서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무거운 삶을 보았다.


어디 사느냐,

결혼은 했느냐,

철수는 잘 있느냐,

전에 줬던 학 알 늦었지만 고마웠다...뒤 늦게 떠오른 말들... 제법 주고받을 얘기가 있었건만... 나는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나와 달리, 그는 내가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편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 같다.

그때 역시 단답형으로 대꾸했던 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 가끔 생각나는 그.

내 기억 속에 있는 그의 모습은 성인이 되어 만난 그가 아니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밖에서 늘 해맑게 웃으며 생활하던 미소년 철이다.

억지소리를 해가며 싸워대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정말 세월을 거꾸로 먹나보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