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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씻겨가면 좋은 것들


BY 은하수 2005-08-25

어제 하루(그저께)는 일년 중에도 몇일 안된다 싶을 정도로 맑고 청명한 날씨였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실선을 한 줄 확실하게 긋는 듯,

여름의 끝은 꼬리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뭉툭한 뒷모습을 하고 벌써 저~만치 총총히 가고 있다.

나의 여름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던 칸나가 검붉게, 샛노랗게 아직 한창 타들어가고 있는데...

바라볼 적마다 보는 나의 가슴 한켠을 들뜨게 하고 때론 눈물조차 짓게 만들던  

나의 비밀의 화원인 칸나의 뜰에는 미처 깨어나지 못한 여름의 꿈이 서성이고 있는 듯하다.

또, 어제 아침 한결 높아진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듯한 하늘 빛깔은 어땠는데...

칸나가 붉은 루비 같다면 코발트 물감을 듬뿍 탄듯한 하늘빛은 터키석과도 같았다... 라고 한다면 조금 속물스러운 표현일까...

그동안 자주 내린 비에 대기 속의 먼지가 모두다 씻겨 간듯 풍경들이 여과없이 또렷하게 시야안으로 들어왔다. 나의 시력도 덩달아 좋아진 것 같이 느껴졌다.

낮에 이어 밤에도 맑은 대기 덕분으로 하늘은 모처럼 까아만 빌로드천을 펼쳐 놓은 듯 했고 그 속에 수 많은 별들이 맑디 맑은 수정 같이 빛나고 있었다.

동쪽하늘에 높이 떠오른 하현달은 너무도 희고도 맑게 빛나서 검은 빌로드 옷을 여미다가 구멍 속에 약간 숨은 은단추처럼 아름다왔다. 

 

저녁밥을 먹고 아이들이 졸라 레몬에이드를 만들어 먹고 까무룩 잠이든 아이 옆에서 나두 까무룩 그만 잠이 들었다.

난 브래지어를 하면 깊은 잠을 못자고 자다가 일어나도 기분이 맑지가 않다. 기분이 나쁠 정도다.

잠 자기 전에 이를 정성들여 닦고 낮동안의 먼지와 때를 잘 씻고 별과 달이 수놓아진 흰색 민소매 얇은 잠옷(요즘엔 좀 춥다)을 입고

웬만한 잡다한 것은 머릿속에서 모두 몰아내고 침대로 들어가 몸을 최대한 편안히 누인다.

향나무 베갯 속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면서 약간 낮으면서 너무 묻히지 않게 딱딱한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달콤하면서 평화로운 잠을 청해 본다.

물론 불은 켜져 있어선 안되고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워야 한다. 사방은 고요할수록 좋으나 풀벌레 소리나 아스팔트를 때리는 빗소리 정도는 괜찮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지금 사방은 칠흑같고 흰색 잠옷을 입었고 잘 씻었고 빗소리도 듣기 좋을만 한데 뭣땜에 잠을 못 이루고 있나?

아이와 잠깐 어설픈 잠이 든 것이 화근인가?

머릿 속에 맘 속에 낮동안 담아둔 화가 비워지지 않은 탓인가?(나름대로 노력하였건만)

난 누가 나를 얕잡아 본다고 생각하면 그가 밉다.

난 누가 나의 좋은맘으로 베푼 친절을 고마와 하지않고 당연스레 여긴다면 그가 환멸스럽다. 

난 누가 나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 하거나 주제에 걸맞지 않게 군다면 그를 무시하고 싶어진다.

난 누가 나와의 약속을 어그러뜨린다거나 나중에 딴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때 화가 치솟고 그를 경계해야 한다고 느낀다.

난 누가 특히 나이도 어린 것이 건방지게 구는 것은 밟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현실에서는 굉장히 민주적인 척 한다...

허나 현실에서는 혼자 겸손한 척 별 생각없이 사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산다.

척하고 살면 겉은 평화롭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는 죽냄비다. 언제 넘칠지도 모른다.

속에걸 솔직하게 들어내 놓으면 잠깐은 속이 편하겠지만 외부의 평화를 기대해서는 안되고 적을 만들 수도 있다. 그 적으로 인해 마음의 평화가 또한번 깨질지도 모른다.

마음의 평화는 절대적인 것이라야지 상대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

침입자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틈을 보이면 자꾸 공격해 온다.

나의 마음밭에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안된다.

또 지나치게 평화를 완벽을 갈구해서도 실망할는지 모른다. 다 이세상 살다가 보니 겪는 시트콤같은 일상일 뿐이다. 인생에 삽화일 뿐이다.

쉽게 노여움을 타고 쉽게 풀리고 웃는 나의 감정상태도 때로 나사를 바짝 조일 필요가 있다.

물론 내 느낌이나 감정은 중요하고 대부분 정확하다. 곤충의 더듬이처럼.

쉽게 화를 표출해선 재미 없어진다.

화는 안에 가두어 두고 연료로 써야 한다. 좋은 연료로...

이 모든 잡다한 생각들도 밤새도록 내리는 저 빗소리에 모두 먼지가 되어 씻기어 떠내려 갔으면...

그리하여 내일(오늘)은 또다시 맑게 갠 파아란 하늘과 명징한 풍경들을 볼 수 있다면...

 

비는 그치고 풀벌레 소리만 고요를 가르고 들려온다.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한 밤의 깊은 잠과 바꾼 풀벌레 소리...

맑고 청아하다. 나의 투덜거림에 비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