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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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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꽃-일찍 떠난 동생에게


BY 송영애 2005-06-23

        하늘 꽃 송영애 내겐 나보다 4살 밑인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젓가락처럼 늘 나와함께 붙어 다니던 동생. 시골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은 시냇가며 바다를 늘 손잡고 다녔었고 뒷산 소나무 밑에 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들에 나간 아버지를 기다렸으며 꿈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몸을 간지럽게 하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뒹굴기도 많이 했었다. 내 나이 7살, 동생 나이 3살 되던 해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동네 어르신들은 우릴 보고 불쌍하다고 혀를 차셨지만 우린 엄마가 가는 길에도 많이 울진 않았었다. 엄마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영영 가시는 줄 알기엔 우린 나이가 너무 어렸었기 때문이다. 그저 멀어져 가는 꽃상여를 웃다가 울다가 바라본 채, 엄마가 다시는 못 오신다는 동네 분들의 말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3살짜리 동생은 동네 어르신들이 주는 부침개며 과일을 덥석덥석 받아서 잘도 먹어댔다. 그나마 나이가 좀 많다고 난 시무룩해서 외할머니 품에 안겨 젊은 딸을 보내는 외할머니의 그 아픈 통곡을 이해 못하며 동네 어르신들이 메고 가는 꽃상여를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바라보았다.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난 후 동생과 나는 더욱 붙어 다녔다. 동생이 동네 다리 밑으로 떨어져 얼굴에 피투성이가 됐을 때의 기억은 그 때까지 자라면서 가장 놀라고 무서웠던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엄마가 멀리 떠나시고, 할머니가 우릴 엄마 자릴 대신해 보살펴 주셨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할머니께서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눈이 잘 안보이시는 할머니의 도시락은 늘 머리카락도 가끔 섞여 있었고 티끌도 밥과 함께 섞여 있었다. 그나마 누나라고 난 그냥 할머니께 투정 안하고 먹었지만 내 동생은 일부러 도시락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그러면 할머니께서 학교까지 도시락을 가지고 오셔서 동생에게 주면 동생은 더럽다고 먹지 않았었다. 그 도시락을 다시 들고 가며 서러웠을 할머니, 많이 자란 후에 동생도 그 얘길 하면서 뼈아프게 후회를 했었다. 내가 중학교 졸업 후에 서울로 돈 벌러 오면서 집에는 동생과 할머니, 아버지 세 식구가 살았다. 공부를 미치도록 하고 싶었던 나는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며 야학을 다녔다. 생활비도 보내 줘야하기 때문에 무척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내겐 돈 많이 벌고 공부 열심히 해서 가족과 함께 살 찬란한 꿈이 있었기에 견디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초등학교만 마치고 서울로 돈 벌러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께 전화 드렸더니 정말이었다. 같은 동네 사시던 분이 서울에서 중국음식점을 하는데 거기에 종업원이 필요해서 보냈단다. 난 내가 못 배우고 서울에 나왔을 때보다 더 가슴이 아팠고 그때처럼 아버질 미워해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도 가난해서 못 배우셨으면서 자식들마저도....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원망하며 전화할 때마다 아버지한테 싫은 소릴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마음도 오죽했으랴 싶지만 자식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참 많이도 미워했었다. 아버지는 본인도 가난 때문에 못 배웠으면서도 배움의 중요성을 전혀 알지 못 하셨다. 아니 못 배우셔서 배움의 중요성을 몰랐는지도 모르겠다. 동생은 그렇게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서울의 중국음식점에서 일을 하였고 다행히도 나와 같은 동네여서 자주 만나긴 했었다. 월급 12만원 받아서 8만원씩 저축하며 부자가 돼서 할머니, 아버지 서울로 모시고 오겠다던 내 순진하고 착했던 동생. 아버지 원망일랑은 어디에 묶어뒀는지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살아가던 그 고왔던 내 동생. "누나야 돈 빨리 벌어서 우리 한 집에서 같이 살자." "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와서 같이 살자 응?" 늘 내게 보채던 동생.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누나가 돈 많이 벌어서 할머니 아버지 모시고 올게. 조금만 참아 알았지?" 난 그 날이 빨리 오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늘 동생에겐 그렇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어린 나이의 그 푸른 꿈을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봉제공장에서 죽어라 하루 12시간 씩 일해봐야 내게 돌아오는 건 8만원이란 임금과 지친 몸뚱아리 뿐. 그 꿈을 이루기도 전에 언제부턴가 동생의 행동이 좀 이상해졌다. 동생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었다. 착한 동생이라 믿었었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라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 여자친구라 그런지, 아니 힘든 객지생활하며 만난 친구라 그런지 동생은 쉽게 그 여자친구에게 마음을 주었다. 난 예쁘장하고 돈 씀씀이가 헤픈 그 친구가 맘에 들진 않았지만 너무나 행복해 하는 동생을 말리기엔 이미 늦은 듯 했다. 누나인 내 말은 이제 여자친구의 말 뒷전으로 밀려났다. 두 사람은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동거라는 걸 하기 시작했고 동생은 돈을 벌면 다 그 여자친구에게 주곤 했다. 둘이 동거를 시작한지 한달 정도 됐을까? 동생이 전화를 했다. 여자친구가 이상하단다. 돈을 가져다주면 어디에 쓴 줄도 모르게 금방 다 써 버리고 또 다른 남자친구와도 만나는 것 같다고... 역시,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난 당장 헤어지라고 했지만 어린 동생에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이랴 결국엔 그 여자친구는 동생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짐을 싸서 다른 남자랑 도망을 갔다. 다 잊어버리라고, 미친개한테 물린 셈치라고 해도 동생은 도통 그 친구를 잊지 못했다. 각박한 세상이 주는 그런 아픔을 견디기엔 내 동생은 너무나 착하고 때가 묻질 않았었다. 결국은 그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동생은 정신분열증세가 왔다. 난 너무나 무서웠지만 동생이 의지할 곳은 누나인 나 하나밖에 없기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병원에 입원도 시켜보고 집에 같이 데리고 있어도 봤지만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 재발하곤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의 양이 아마도 그 때가 가장 많았으리라. 불안에 떨며 살았던 시간도 그 때가 가장 많았었고... 동생의 아픔이 조금 차도가 보이자 취직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의 모 레스토랑에 나간다고 했다. 그 곳에서 숙식을 해결한다고 해서 마음은 놓이지 않았지만 본인의 의견을 따라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게 병을 이기는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적응을 잘 해 나가나 싶더니 자신도 병이 다시 찾아 온 걸 알았는지 나에게 전화를 했다. "누나, 나 또 머리 아프고 이상해." 집으로 오라고 했더니 조금 참아보겠단다. 불안했지만 본인의 의지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살아가는 동생을 보는 순간이 내겐 아파하는 동생만큼이나 힘들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아침 일찍부터 전화벨이 울려댔다. 이유도 없이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고 내 얼굴은 갑자기 달아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상대편도 무척이나 조심스레 입을 여는 느낌이 들었다. "네...말씀하세요." "거기 송민국씨 누님 되십니까?" 난 철렁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네...그런데요...?" "아...놀라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에 동생 분이..." 그 상대편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난 직감적으로 동생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차마 전화로 말을 할 수가 없어 그 곳으로 가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리 만치 그런 느낌이 가끔 들었었다. 동생이 꼭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난 정신 없이 경찰서로 달려갔고 그 곳에서 자초지종을 담당경찰관에게 들었다. 아침에 레스토랑에 먼저 출근한 직원이 화장실 문을 여니 그 곳에 동생이 약을 먹고 쓰러져 있었다고... 레스토랑 직원들 말로도 동생이 며칠동안 이상한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정신분열증이란 게 그랬다. 갑자기 온 몸에 바퀴벌레가 기어다닌다고 목욕을 몇 번씩이나 해대고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면 자신한테 욕을 한다고 밖을 내다보면서 그 사람들한테 마구 소릴 지르고 눈에 자꾸 헛것이 보이는지 괴로워하곤 했다. 보는 사람도 괴로운데 정작 당사자는 오죽했으랴. 동생은 자신의 병을 잘 알기에 견디지 못 하고 스스로 먼길을 홀로 떠난 것이었다. 너무 아파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그 날 비로소 실감했다. 내 하나 뿐인 남동생은 그렇게 먼길을 지켜주는 이 하나도 없이 홀로 터벅터벅 떠났다. 그 아픈 동생을 이름도 모르는 외딴섬에 뿌리고 돌아오던 길, 자꾸만 뒤에서 동생이 "누나, 누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했지만 무심한 갈매기만 날아다니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바다를 찾은 사람들의 함성 소리만이 내 귓전을 때렸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동생을 한줌 재로 뿌리고 온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지금도 등뒤에서 동생이 날 애타게 부르는 듯 하다. "누나야..." "누나야..." 하늘 꽃 - 일찍 떠난 동생에게 송영애 고왔던 스무 살의 나이를 접고 홀로 떠나며 외로웠을 길 하늘에 먹장구름 흐르더니 가슴으로 감당할 수 없는 소나기, 사선을 긋는다 널 외딴 섬에 한 줌 재로 뿌리던 날, 너의 흐느낌인 듯 파도는 배의 갑판 위로 오르고 나는 또 눈물을 보태며 함께 울었지 별빛 부서져 내리는 이 밤 머나먼 수평선에서, 속절없이 밤바다는 하늘과 입을 맞추고 이지러진 조각달의 치마폭 사이로 별똥 별 하나, 꽃 되어 바다에 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