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하기 그 세 번째
호주에서 공부 하고 있는 늙은 학생입니다. 지난 3개월 여름 방학동안 노가다 (페인트)를 하였답니다. 다음 글은 세번째 이야기로 저와 함께 일하였던 연변 아주머니에 대한 글입니다.
오늘은 저가 만난 연변 아주머니의 일대기를 써 보려 합니다. 58년생이라고 하더군요. 약 한달 반 같이 일을 하였는데 그 동안 그녀의 일생 주요 사건들을 모두 들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반복해서 들은 이야기도 있으니 어떠 했을 것인지 상상을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주로 4명이 함께 일하였는데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면 반드시 그녀와 관련되는 사건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남편’, ‘우리 남동생’, ‘우리 언니’, ‘우리 아버지’ 등등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로 끝이 났으니까요.
그녀의 할아버지는 혁명 당시 붙잡혀가 가슴에 간판을 메 달고 대중 앞에서 비판을 받아야 만 했을 정도로 부자였다는군 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겠다고 끝을 맺은 것으로 보아 지금도 사는 것이 나쁘지 않은 모양입니다.
배급으로 생활을 했어야 할 때 그녀의 아버지는 산에 몰래 돼지를 길러 가족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밤에 몰래 돼지를 잡아야 하기도 했고, 새벽 일찍 돼지 먹이를 남들 모르게 실어다 날아야 했다고 합니다. 배급으로 생활을 해야 할 당시 남자 아이들이 많은 가족은 언재나 먹을 것이 모자라 힘들어 했고 그녀의 집은 딸들이 많아 아들 많은 친척집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군요.
대학을 다닐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였는데 할머니가 언제나 누룽지를 만들어 주셔서 그녀는 언제나 급식 표가 남아 남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군 요.
아마도 회계관련 학과를 나와 감사를 하는 당 간부의 자리에 있었나 봅니다. 명절이 되면 바로 위의 책임 관과 합의 해 직원들의 선물을 결정하고 돈을 얼마 줄 것 인가를 결정하곤 했는데 언제나 직원들이 받을 돈의 두 배를 가지고 또 둘은 출장 핑계로 먼 장에 가서 비싼 옷을 사 입고 와선 시간이 한 참 지나서야 꺼내 입곤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이 가장 안전하게 챙길 수 있는 방법이었던 같습니다.
결혼을 늦은 나이에 하여 그 당시 만혼을 격려 하던 시대라 당에서 주는 선물을 잔뜩 받았다고 하는군요. 당시엔 부부 나이를 합해 50살이 넘어야만 결혼 허가가 나왔다는군 요. 또 어떤 분은 결혼신고를 위해 본인이 어느 정부 기관에 가야 했지만 본인 먼 곳에 가 있어야 할 때 동생이 대신 형수와 같이 가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한 자녀 낳기 운동이 한참일 때 그녀는 당간부로 앞장서 일을 처리 했어야 했는데 동네 어느 삼대 독자 며느리가 딸 둘을 놓고 셋째를 임신하여 시골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 아이를 사산시켜 수술을 하였더니 아직 살아 있어 아기를 엎어 두어 죽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군 요. 그리고 그녀는 그 일을 그만 두었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손자의 할아버지는 대를 잊지 못한 것에 한이 되어 그만 자살을 했다고 하네요. 그건 소름 끼치는 이야기였습니다. 아기의 색깔이 까만 색이었다니 다시 한번 강한 인간의 생명력을 생각하게 하더군요.
그리고 6년 전 한국에 가서 함 밥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주인 할머니가 너무나도 못되게 굴었는데 어느 날 밥을 푸는데 밥알을 제대로 처리 하지 못한다고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하기에 너무 화가나 밥공기를 던져 버리고 할머니에게 화를 내었더니 그 할머니 경찰관을 불렀답니다. 출동한 경찰관은 여권을 보자 하기에 보여주었고 자초지종을 듣고 난 경찰은 오히려 할머니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고 갔다는 군요. 같은 동포인데 그리하면 쓰겠느냐고… 그리고 어느 식당에서 일을 하였는데 주인이 그녀를 너무 믿고 모든 일을 맡겨 거의 모든 일을 본인이 알아서 했다는군 요. 한국을 떠날 때 금 목거리와 반지를 고맙다고 받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돌아 갈 때 비행기 안에서 어느 한국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혹시 아는 사람들 중에 다른 나라로 무비자 입국을 원하는 사람 있으면 소개 시켜달라고 하더라는 군요 그리고 명함을 받았답니다. 한 명당 12만원을 받을 것이며 그 중 3만원은 소개 시켜준 사람이 챙길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중국으로 돌아가 3일간 출근을 하고 그만 두었답니다. 당 간부라 출근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월 2000원의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에서 받은 명함으로 전화를 했답니다. 그 한국인은 기꺼이 그녀를 호주에 데려다 주기로 하였는데 소지품 중에 절대로 중국제품을 넣지 말 것 그녀가 그의 아내라고 할 것을 조건으로 타이로 가서 일주일간 머문 후 호주에 아무런 문제 없이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가 4년 전이라고 하는군요. 그녀는 공항에서 그 한국분과 깨끗이 헤어졌고, 얼마 후 그녀는 다른 3 사람의 중국인을 그 한국인을 통해 호주로 오게 한 것을 성공하여 그녀가 오기 위해 쓴 돈 9만원을 챙길 수 있었다는데 그 후로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그녀의 소개로 다음 팀이 중국에서 나오려다 한 사람이 잡히게 되어 그 팀 모두가 잡혀 되 돌아 가는 일이 생겼었다고 합니다. 그 한국 분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나 봅니다. 몇 주전에도 중국인 한 분이 그 분을 통해 호주에 도착하였다고 하더군요. 불법 거주자가 되는 것이지요.
호주도 불법 체류자들에게 많은 제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10년이 넘게 무 비자로 살고 계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그저 말로만 들을 수 있었던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지요. 얼마 전 뉴스에 어느 100살이 넘은 중국인 할머니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중국으로 되 돌아 가야 하는 사건이 보도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도 관광비자로 십 수년 전 호주에 도착 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있다가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 할머니 100살 되던 해 여러 정부기관에서 축하 편지와 선물들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중국인들 무 비자로 살고 있는 할머니를 정부에 신고해서 선물 받을 것 다 받을 수 있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정말 대단한 중국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 뉴스에 관련 장관이 그 할머니 인정상 호주에 머물 수 있게 하기로 했다는군 요. 헛갈리는 세상입니다. 문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100살 넘은 분들 선물 받기가 쉽지 않게 될 것 이라는 것이 저의 짐작입니다.
공산권 생활이 어떠하였는지 생생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어 너무 재미 있게 이야기를 듣곤 했지요. 저에겐 상당한 충격과 놀라움 그 차체였습니다. 짧은 기억력으로 모두 글로 남길 수 없음이 안타깝기 조차 합니다. 어째 꺼나 이 글이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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