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갑자기 출장을 갔다.
감기 걸린 아이에게 연신 뽀뽀를 해대더니, 전화기 저편의 남편의 목소리가 맹맹했다.
볼 일이 있어 얼굴 못 보고 보내어서 못내 마음에 걸린다.
일년내내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사람인데.
전화를 잘 하지 않는데, 오늘은 3번씩이나 했다. 포토 메일도 요란하게 보내고.
나 때문에 주말부부를 할 때에야 지은 죄가 있어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지만, 남편의 생떼로 집안에 주저앉은 이후부터는 기세등등하여 전화를 왠만해서는 잘 안한다.
"밥은 먹었어? 목소리가 까칠하네. 약이라도 사 먹어.
그렇게 아픈데 일도 많아서 어떻해. 조심해"
마음이야 굴뚝이지만, 내 입 밖으로는 고작 이런 말밖에 나가지 않는다.
약 사먹을 시간도 없이 쫓아 다니는 남편이 안스러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런 남편이 다음 날 저녁에야 비로소 돌아왔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생생하다.
젓가락 세워 놓은 듯 빼쪽한 그이기에, 한 번 아프면 휘청한다.
피곤할 것 같아, 빨리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아이를 안고 내 등 뒤에 와 살며시 속삭였다.
"자기, 보고 싶었어. 당신 된장국이 제일 생각나더라. 이제는 다른 여자들이 잘 안 보여."
넘친다. 왠일이지?
평소 같으면, 텔레비젼이나 보고 아이들 얘기하다가 자기 좋아하는 낚시 얘기나 하는 사람인데 오늘은 나에 대하여 얘기를 했다.
쑥스러워서 씩 웃었다.
'왠일이야 그런 말도 다 하고'라고 받으면 다시는 그런 말을 안 할 것 같아 꾹 참았다.
잘하는 일은 칭찬을 해 주어야 하는데, 오늘도 웃는 것밖에 못했다.
아이들이 자고 남편이 내 손을 살며시 잡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증이 발동해서.
"자기, 오늘 좀 다르네. 꼭 신혼으로 돌아간 것 같애. 마음이 따뜻해 오고 많이 부드러워제는 것 같아. 그런데,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출장가서 하루 안 봐서 보고 싶은 거 치고는 조금 과한 것 같은데"
"응, 당신이 전화를 자꾸해서 내 건강을 챙겨주니까 좋아서."
"난 항상 마음으로 당신을 그렇게 생각해. 몰랐어?"
"알긴 아는데, 표현을 안해 주니까. 조금만 표현을 해 주면 좋을 것 같아"
또 한방 먹었다.
사람 마음을 공부한 나 보다도 더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남편에게 한수 배운다.
남들 상담해 주면서는 부부끼리 표현을 해라 마음에만 담고 있으면 모른다고 수없이 말하면서 정작 나는 안 그랬으니.
이제 우리 이야기의 내용도 "오늘 딸이 열발자욱 걸었어, 대견하지. 봐봐"보다는 "당신, 오늘 피곤해 보이네. 수고했어요"부터 해야겠다.
결혼 9년차인 우리 부부는 주말 부부를 많이 해서 실상 붙어 산 세월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직 맞추어 갈 부분이 많다.
옛날에 상담 온 어떤 아내가 시작한것처럼 나도 남편이 퇴근해서 오면 아이들보다 더 빨리 현관에 나가 눈을 맞추어야겠다. 비록 뻣뻣하게 서 있겠지만 말이다.
마음에 있지만, 꺼내어 내 보인다는 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하도 뒤섞여 있어 자신조차도 잘 모를 수도 있고,
말은 해도 상대방에 대한 애증이 너무 커 마음과는 반대로 나가는 수도 있고,
입안에 뱅뱅뱅 멤도는 데도 용기가 없어 밖으로 안 나오는 수도 있고,
내 딴에는 많은 마음을 내 보였는데도 상대방이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천차만별이다.
사람사이에 마음을 내 보이는 일은 어렵다고 포기하기엔 너무도 중요한 일이기에 일단, 저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을 내가 먼저 꺼내어 매일매일 살피고 내가 다둑거리고 보담아야 할 것들과 다른 사람에게 줄 것들을 찬찬히 골라낼 일이다.
그리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남에게 줄 것들은 미련없이 주어 버리고, 뒷 일은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사람처럼 우리는 마음에 있는 말을 하고 난 이후 상대방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두려움때문에 자꾸만 담고만 있다. 아니면, 마음에 있는 말을 하고 난 이후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반응해 주기를 바라는 오만함때문에 멈칫거리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