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풍부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장황하고 수다스런 말수의 주인공 빨간머리 앤은 에이번리의 초록지붕 집으로 잘못 입양되어온 11살 소녀다. 어려서 고아가 되고 의지할 무엇도 없이 십여년을 흘러다니며 살았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분방한 상상력의 힘으로 묵묵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흔치 않은 매력을 소유한 귀여운 꼬마 아가씨다. 몽고메리라는 캐나다의 여성 아동문학가의 작품 속 이 주인공은 꼭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을 가졌었다.
앤이란 소녀,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면서 그토록 친근감을 주었었다.
가영이, 나의 둘째딸이 어느 날 노랑머리에 여러 개의 구멍이 휭하니 뚫린 청바지를 입고 몇 달만에 나타났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 보는 외계인의 얼굴을 대하듯 강한 이질감을 느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수능 시험을 며칠 앞둔 찬바람은 끊임없이 가영이의 청바지 구멍으로 우우 소리를 내며 몰려 들어갔다. 난 아이의 바지가랑이 속으로 도망쳐들어가는 바람의 꼬리를 잡아채고 싶었지만 잡아낼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막대기처럼 가늘은 아이의 종아리 살에 도드라진 파란 정맥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환상을 외면하려고 땅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시퍼러죽죽하게 얼어붙은 아이의 두 볼엔 뿔긋불긋한 여드름들이 저마다 서로 더 커다고 자랑을 하려는 듯 뾰죽뾰죽 솟아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제대로 밥은 먹었던 걸까?
아마 컵라면 정도로 겨우 끼니를 모면하며 살았을 것이다.
지난 해 여름 남편은 농사일하다 허리와 뇌 등을 다쳐서 장기간 병원에 입원하여 있었다.
마악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는데 난 아이의 두툼한 등기 편지를 받았다.그 애의 학교 가까이 있던 이모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아이는 주말마다 집에 왔었고 세세콜콜이 일주일동안 있었던 일들을 주고 받아 왔었기에 등기편지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편지의 내용을 옮기지는 못하지만 결코 집안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기의 학교 생활이 무의미하여 검정고시를 해야하겠으니 꼭 허락해달라는 것과 후회없는 삶을 살기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언젠가는 자기를 낳아서 행복하다고 엄마가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등의 내용이 장황하게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는 김밥집에서 일을 했다.
아이가 하는 일은 손님이 오면 손님을 맞이하고 김밥을 예쁘고 균일하게 빨리 썰어서 가져다주는 등의 일이었다. 김밥을 마는 일을 제대로 배워서하면 한시간에 2500원보다 몇 백원 더 받을 수 있었지만 아이는 그 것을 배우지 않았다.
김밥을 제대로 싸기까지 하면 완전히 자기가 김밥집에 안주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가 보았다.
2학년 2학기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아이가 일한 돈을 하얀 봉투에 담고 아이와 나는 학교로 갔다.
아이의 땀방울이 밀린 수업료로 서무과에 바쳐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하얀 은쟁반에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련.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육사의 청포도란 시가 자꾸만 앞 뒤 구절이 엉키어 뒤죽박죽으로 떠오르고 전설이 알알이 박혀란 구절에서 모든 구절이 정지되더니 나의 눈에선 뭔지 모를 것들이 쉼없이 흐르고 있었다.
“ 엄마는 차암... ”
아이가 볼멘 소리로 말하며 서무실에서 나오자는 듯 나의 옷을 살짝 꼬집어 비틀었다.
다시 교장실로 가서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가영아, 왜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려고하지? ”
“ 선생님, 돈도 벌고 공부도 하려고요.”
“니가 뭘 해서 돈을 벌겠니? ”
“선생님, 저는 두 가지 다 할 수 있습니다.”
“ 세상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한번 더 생각해봐라.”
“ 아니요. 저는 충분히 생각해봤습니다.”
아이와 교장선생님의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멍하니 있었다.
마지막 걸었던 기대는 이 무능한 엄마대신 교장선생님이 호통을 치거나 혹은 그럴듯한 설득력으로 가영이가 학교 그만두는 일을 막아주었으면 했다.
검정고시를 치려면 그에 상당한 날짜에 맞게 퇴학이 되어야했고 고등학교 자퇴후 검정고시 합격이 안되면 다시 고교로 복학이 안되는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또래의 아이들보다 얼마나 늦게 대학을 진학하게 될지 모든 것이 불안했다.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데 체육시간인지 회색츄리닝을 입은 여러 아이들이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이 빙빙 도는 듯한 한 편의 무성영화안으로 가라앉으며 나는 아주 천천히 걷는 배역을 맡아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옆의 아이의 마음에 위로를 해준다거나 신경을 써 줄 엄두도 못내고..
그 일이 있고 나서 바로 아이는 집안의 친인척이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난다며 대전으로 떠났었다.
가끔 이메일이나 전화를 주고 받고 택배로 아이의 고시원으로 반찬을 보내긴 했지만 직접 만나는 건 정말 몇 달만의 일이었다.
노랑머리의 여드름 투성이의 처음 보는 얼굴이 내게 말을 했다.
“ 엄마, 나 이상한 눈으로 보지좀 마.”
아, 목소리는 내가 잘 아는 목소리였다.
나의 둘째딸이 돌아왔다.
반가워서 왈칵 껴안으며 다시 나는 아이보다 더 철없는 평소의 깔깔대는 모습으로 돌아갈 수있었다.
아이가 운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 공부한 실력이 밑바탕된 것일까?
아이는 지난해 8월2일 검정고시를 무사히 합격했다.
검정고시 발표가 나기 전 가족들은 오히려 불합격할까 초조하고 불안해했지만 아이는 떨어지면 다시 한번 치면 된다며 담담해했다.
또한 대학교 수능도 아주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치르고 자기가 원하던 대학교도 무사히 입학했다.
이제 노랑머리는 싫증났는지 다시 검은색으로 원상복귀하더니 뽀글뽀글한 아줌마파마를 했다. 아이의 155cm가 채 안되는 작은 키에 걸맞게 어른주먹만한 작은 얼굴이 머리숱에 포옥 파묻힌 모습을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다.
아이가 흑인들의 레게머리라는 걸 해보겠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누구보다 모험심과 자립정신이 있고 자신감과 긍정적인 생각이 있다고 믿기에 아이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바라본다.
겁없이 세상의 어려움에 맞서 나가는 나의 마음 속 작은 영웅,빨강머리 앤보다 더 열정적인 노랑머리 가영, 강, *걍, 널 사랑할 수밖에 없다.
**즐!
* 강- 가영의 애칭, 난 아이를 강아, 강아 부른다.
*걍_ 그냥의 사투리말 기양의 준말, 가영이와 나의 통하는 말,. 항상 주어진 어려움 그냥 담담히 수긍하자는 말.
** 즐!- 아이와 문자주고받을 때마다 마지막 쓰는 글자. 즐겁게 지내라는 말의 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