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늦게 얻은 손자인 남동생을 무릎에 앉히고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손자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반복해서 확인하면서 주입식 교육을 시켰다.
본은 진주, 파는 통정공이며 통계공파는 작은 집이 된다 하였다.
우리의 18대 조 할아버지가 되는 '맹'자 '경'자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훌륭한 분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통정공파의 24대 손이고 우리는 26대 손이며 돌림자는 소리'성'자라 하였다.
어디서든 같은 성씨를 만나면 항렬을 따질 줄 알아야 한다며 소리'성'자 다음 대는 무슨 한자를 쓰는 지, 그 다음은 또 무슨 한자를 쓰는 지, 반복 또 반복해서 교육을 하였다.
항렬자인 소리'성'자가 들어간 이름마저 얻어 갖지 못한 내가 듣기에 은근히 배알이 꼬이는 이야기들이었다.
족보 이야기만 나오면 배알이 꼬이는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동갑이던 사촌은 툭하면 이렇게 말했다.
"기집애가, 족보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 공부만 잘하면 제일이야?..."
기집애는 공부를 잘 해도 잘 난 체 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촌보다는 잘 난 것 같은데, 기집애라서 잘 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사촌만 비위를 슬슬 건드린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자기는 남의 농사만 열심히 짓고 있다고...
딸이 셋이고 아들이 하나니, 딸은 열심히 키워봐야 키워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란 뜻이었다.
배알이 꼬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남동생 이름을 앞에 붙여 '**네 아버지'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느네 아버지'가 남동생과 말 할 때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린 섭섭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족보의 허구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양반이란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먼저 아버지에게 커다란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속닥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아버지, 어디 가서 당췌 조상이 양반이었다고 말하지 말아요.
그리 말하는 것은 망신스런 일이예요.
아버지가 보내 준 학교에 가서 배웠는데, 옛날에 못된 짓은 양반이 다 했더라구요.
양반을 조상으로 둔 것은 무지무지 창피한 일이더라니까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땡감 씹은 얼굴이 되었다.
학교를 못 다닌 무지랭이 농사꾼 아버지는 반박할 말도 없고, 딸이 학교에서 배웠다는데 말짱 근거없는 소리는 아니기도 할 것이고,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떨떠름해서 아버지는 그저 쓴 입맛을 다셨다.
조상을 잘 섬겨야 복 받는 것이라고 배운 아버지는 문중 행사에 참여해서 조상들의 묘을 찾아가 절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았다.
생물시간에 배운 지식과 할아버지에게 들은 상식을 적당히 섞어서 그런 아버지의 행동에 초를 쳤다.
"아버지가 조상이라고 열심히 찾아다니는 뼈다귀는 아버지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다구요.
아버지랑 그 뼈다귀가 같은 성씨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한번 들어 볼래요?
아들은 그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반 어머니의 유전인자 반을 물려 받거든요.
그러니까 일대손은 그 뼈다귀의 피를 1/2을 물려 받았다는 뜻이지요.
그 다음 손자는 1/4이 되는 거구요.
아버지는 17대 손이라고 하니 아버지는 1/512이 그 뼈다귀의 피를 무려 받았다는 뜻인데 우리나라 성씨가 이백개가 조금 넘는다고 하니 아버지는 그 어떤 성씨보다 그 뼈다귀하고의 거리가 멀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조상이라고 며칠씩 일도 못하고 찾아가 성묘를 한다구요? 아서요. 말아요."
고개를 살살 흔들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딸을 괜히 학교에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를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결정타를 안겼다.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족보를 돈 주고 샀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조시대엔 양반이 30%, 상놈이 70%였다는데, 요즘 양반 조상을 못 둔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요.
조선시대 말기에 사회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사람들이 족보를 사고 팔았다는데 그 때 상놈들이 모두 양반으로 둔갑을 했다더라구요.
우리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래도 30%보다는 70%가 가능성이 많잖아요.
그리고 5대조 안에 벼슬한 사람이 없으면 양반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는 거라는데, 우리는 5대조 안에 벼슬한 사람이 없잖아요."
아버지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초등 6학년이 된 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물었다.
"엄마, 우리는 본이 뭐고 파가 뭐야? 학교에서 숙제로 알아오래..."
그 말을 들은 나는 다시 배알이 꼬이기 시작했다.
뿌리교육을 하려거든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해 알아오라고 할 것이지,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도 모를 조상에 대해 알아오라고 하다니..., 아들의 담임이 갑자기 미운 생각까지 들었다.
잠시 생각하다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내일 선생님보고 이렇게 말씀드려라.
우리는 조상이 상놈이라 그런 것 모르고 산다고..."
순진한 아들은 숙제가 간단히 끝난 것이 좋아서 이렇게 선선히 대답했다.
"알써, 엄마."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아들 숙제 이야기를 하였다.
조상이 상놈이라 그런 것 모른다고 했다는 말에 남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기 죽을 내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싸움이라면 이미 숱하게 겪은 내다.
"아니, 설마, 당신 우리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요?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사학을 공부할까 생각도 했었다면서 족보가 얼마나 허구로 가득찬 것인지 모른다고 할 생각인가요?"
이 말에 남편은 즉시 꼬리를 내렸다.ㅎㅎㅎ
세월이 많이 흘렀다.
시아버지가 나이 들어 큰아들인 우리에게 족보관리를 하라고 하였다.
남편은 말이 없다.
옆에 앉은 내가 남편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아버지가 우리보고 족보를 맡아서 관리하라고 하시잖아요."
남편은 자기 아버지가 듣거나 말거나 간단하게 말했다.
"그러면 없어지는 거지, 뭘..."
남자들은 세상이 여자와 남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간혹 잊고 산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는데...
남자들 만의 족보에도 의미가 있음을 왜 모르랴,
하지만 여자를 무시하는 무기로 이용하면 나처럼 한을 품는 여자도 생기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