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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 사는 아흔살 할아버지.


BY 雪里 2003-07-06

"내가 소싯적에 말여 ......."

 

누런 삼베를 조금 탈색해서 꿰맨듯한 적삼은

목덜미 부분부터 앞지락의 일부분이

이미 빨래를 했어도 여러번 했어야 했을 기간을 짐작케 할만큼

싯누런 때가 찌들어 있다.

 

손가락 열개중 한개도 제모양을 갖고 있는게 없는성 싶은 손을

열심히 흔들며 시선을 집중시키시는 할아버지에게서

황소를 끌고 마을 입구로 들어서시던 씨름장사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는건,

두어번 말아 올린 소매사이로 뻗어나온

힘줄이 툭툭 불거지고 얇은 껍질로 덮혀진 굵직한 팔뚝이었다.

 

낮이면 며느리랑 둘이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불편해서,

아침 먹으면 강으로 나간다고 하셨다.

노인회관에 가면 젊은이들이 슬슬 피해 다니며 담배 피우는게

당신 스스로 미안해서 안간다고 하셨다.

 

이제 그만 살고 싶은데,

일찌감치 먼저 가 있는 할머니 곁에 가고 싶은데,

그래서 이승에서의 잘못을 빌며 다 갚고 싶은데,

이것만은 맘대로 할 수 없어서 하루 하루가 길기만 하다시며

진지하게 들어주는게  반가워서인지

모처럼 대화상대를 만나선지 할아버지는

술술 이야기 타래를 풀어 내신다.

 

힘이 장사셨던 할아버지는

그 고장에서 열리는 씨름대회마다 모조리 휩쓸었었고

만주로 오가며 장사를 할때는

가방 가득 돈을 담아서 메고 다니며, 폼나게  기마이(인심)도 써서

이쁜여자들이 주변에 들끌었다시며, 

그대목을 얘기 하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지금에 와서도

잠깐 밝고 힘있어 지시더니

이내 찹찹해지셔서 다시 말씀을 이으신다.

 

"젊었을때 서로 잘하구 살어. 내는 지금 생각하면 죄를 많이 졌든거 같어.

내 마누라가 나땜시 속병이 생겨서 일찍 죽은겨~! 내마누라 죽은뒤로 사는건 죽지 못해 살고 있는거걸랑.~! 왜 그리 살었나 몰러~! 다시 산다면      마누라헌티 잘 허믄서 살틴디...죄 받능겨, 내가 지금 살믄서...."

 

할아버지 한테서 나는 시퀘한 냄새가 많이 역했는데 

어느새 나는 할아버지 옆에 바짝 다가 앉아 있었다.

한창시절 잘못 살았던것을 후회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가

가끔씩은 미웠다가 한없이 안스러웠다가......

 

가르치지도 못한 큰자식이 농사 지으며 허덕이는것도 당신탓이고,

타지에 나가있는 자식이 가끔와서 넉두리 하는것도 당신 탓이며,

시집간 딸년이 신랑한테 대우 못받고 늘 토닥거리며 사는것도

많이 가르쳐서 시집 보내지 못한 당신 탓이라 했다.

 

이제 늙어서 모든 기력을 잃은 몸에다가

모든 멍에들을 몰아서 짊어지시고는 어쩌지도 못하고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며 헛낚싯대 드리우고 계시는 

할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후회 스러우시군요, 이제사 그 후회가 무슨 소용 있으시대요?

그만큼 즐기고 사시는동안 할머닌 얼마나 고생 스러우셨겠어요?

당연하죠, 할아버지도 고생좀 해보셔야해요. 신은 공평 하시다잖아요!"

 

심통스럽게 마음 한구석이 부글거리며 할아버지를

소리없이 몰아 세우다가 ,

입만 살아 움직이듯 맥없이 앉아 있는 그을린 피부속엔

도무지 붉은 피가 흐를것 같지 않아보이는 모습이 금새 안스럽다.

 

음료수의 윗뚜껑을 따서 건네드렸더니 한손으로 받고는

시계를 올려 보시며 일어 서신다.

"가야혀~! 늦으면 저녁밥 달래기가 미안혀서~!"

 

구겨져서 올라붙은 웃도리가 덜렁거리며 뒤에 매달려 가는데

구십이 가깝다시더니 걸음걸이로만 보면 십년은 더 사실것 같다.

 

할아버지 체취가 아직 남아 있는 의자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별의별 생각들이 머리속을 헤집고 다닌다.

 

정확하게 시계처럼 살아 오신 시아버님의 모습이

방금 나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에 클로즈업 되어 지나간다.

 

부슬거리던 비의 줄기를 끊어낸 하늘이

삼층 건물 옆으로 비껴보이는데

이틀동안 못 봤더니 유난스레  맑다.

등록
  • namu 2003-07-06
    저희 할아버님께서 94살에 돌아가셨는데 바라볼때마다 측은한 생각만 들었었습니다. 친구의 아버지도 그 나이가 되어 돌아가셨는데 병간호 하던 딸이 아버지가 아이같으시다고 냄새도 분냄새가 나는것 같다고 하던말이 생각납니다.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어차피 우리의 '생'도 시한부 인생인데 무얼그리 억만년 살것같이들 사는지 가끔 생각나다가도 이내 잊어버립니다.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까닭이겠지요. 할아버지께서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아침이슬 2003-07-07
    사람이 적당하게 살다가는 것이 언제 인지 참으로 모를일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한치앞을 볼수 없는 것이지만 때론 힘겨움에 지쳐 세상과의 인연의 끈이 끊어지길 바란적도 있었지만 살다보니 다 견뎌지고 이겨지더군요....
    우리집 남자가 즐겨가는 낚시터에 가끔씩 따라 다닙니다....
    설리님께서도 낚시터에 자주 가시는듯합니다..낚시터에서 만나는 사람들 인생의 쓴맛경험을 많이 하신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살아보니 인생이란게 쓴맛과 단맛이 늘 함께 하는 것인데 본인이 느끼는 쓴맛이 더 쓴것 같음은 누구나 느끼는 바가 아닐런지요...
    그 할아버지 자식들의 고통과 멍에를 다 지고 저승으로 가고 싶으신 심정이신가봅니다..
    제 엄마가 관절염때문에 고생하던 막내아들의 아픔을 모두 가져갈수 있게 해달라고 비시는것 본적있습니다...
    임종전에...
    인생이란거 아직도 뭔지 모르지만 그래도 살만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할아버지 건강하게 사시다 편안하게 가시길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