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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스케치


BY 김영숙 2000-09-20











만남과 헤어짐은 어떤 우연으로 시작되는걸까?
나는 하나의 만남으로 가을 여로를 떠났다.
이 만남은 이기를 벗어난 순수한 문학으로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고 싶다.
목적지는 원주토지문학공원, 영월 책 박물관.
모두 생소한 곳이어서 가볍게 들떠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특히 토지문학공원은 책 속에서 전해지던 감동이 생각나 더 긴장
하게 했다. 이런저런 상상으로 난 즐거워졌다. 그 책은 어떤 분위
기에서 쓰여졌을까? 그 책을 쓰신 분이 살았던 곳이라니 조금의 향
기라도 맡아오겠지... .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기라도 한 듯 설레
었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여린 산굽이를 돌고 돌아 대관령 길을 오른다.
곧 가을은 시나브로 천지를 물들이겠지. 언뜻언뜻 붉은 기운이 끝
자락에 걸린 나무들을 가끔 만날 때는 반갑다. 저 산 나무의 무리들이
붉은 물감을 뚝뚝 흘릴 때 나도 그네처럼 풍성한 빛으로 빛날 수 있을
런지.
가을의 무리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황금의 벌판과 추수하는 아낙
과 붉은 주홍빛 고추가 익는 마당.
마지막 남은 초록이 남루한 옷을 걸친 듯 이제는 벗어버려야 할 때가
멀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대관령의 자욱한 안개무리와 횡계, 평창, 장평의 에돌아친 산록들을
지나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산을 끼고 생겨난 똑 같은 마을, 도시이지만 그러나 마을마다 독특한
그들만의 향내와 실루엣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들 인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특별나며 다른 냄새를 뿜어내는가?
한국의 산은 우리들 얼굴처럼 둥글고 부드럽고 정겹다.
에베레스트처럼 인간을 향하여 거만의 웃음을 흘리지도 아니하며,
누구라도 다가가 손내밀면 맞잡아 줄 것 같은
낮으막한 토담벼락에서 만나는 어릴 적 나의 할아버지 같다.
점심때가 거의 다 되어서 우리는 원주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 실망감이란.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안았다.
작가와 토개공과의 마찰을 얘기하며 그곳을 지키는 공무원은 마치
그것이 자기 탓인 듯 미안해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일개 공무원
탓일까?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고 돌아온 것
같아 서글펐다. 늘 대책 없이 그때그때 적당히 시행하고는 금방 들
통이 나 난리를 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행정의 부재가 아니던가.
작가가 일구곤 했다던 텃밭에 알 굵은 분홍고구마가 탐스럽게 앉아
있다. 이곳의 어떤 점이 작가를 주저앉아 대작을 잉태하게 했는지
가늠하려 해 보았지만 그곳은 다른 지방도시와 별반 다를 게 없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문득 우리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듯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어느 곳에도 이런 에피소드는 없을 게야.
그러나 우린 씩씩하게 아담한 정원의 잔듸위에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어쩌면 싱그러운 풀밭 어느 한곳에서 그녀의 푸근한 체취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바래보면서.
노년의 작가는 이 집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한한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니, 한국인으로서 가져야하는
문학의 텃밭을 안타까워하며 밤을 뒤척였을지도 모른다.
제천으로 접어들자 곳곳에서 낯선 풍경을 만난다.
아니, 저것은 수수밭이 아닌가?
그것은 장관이었다. 붉은 수수밭.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는
수수밭은 환호성을 일게 했다. 수수밭은 산자락을 덮고 있었다.
산골 마을의 고요한 오후가 한가롭게 이어지는 비탈길을 달리며
여로의 나른함에 한껏 취해 나는 졸고 있었다.
영월 책 박물관.
폐교된 낡은 골말 분교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온갖 고서들로
가득 들어찬 박물관은 분교의 아이들처럼 정겹고 아기자기해
보였다. 우리 고서에 대한 꾸준한 사랑으로 오늘 이 박물관을
있게 한 관장님의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 것에 대한 연구, 수집의 짧은 역사와 정부와 국민들의 몰이해
속에 많은 아픔들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쯤 우리는
우리 국토에 대한 신토불이의 자긍심을 만만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그곳에는 교과서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고,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예전에는 감히 볼 수 없던 월북 작가들의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책 장정에 관한 우리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었다.
지나간 교과서를 통하여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의 자잘한 낡은
사진첩이 도란도란 펼쳐지기도 했다.
"아 ,그렇게 어렵게 살았던 날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구나!"
우리는 지금 물자의 홍수 속에서 얼마나 안일하게 살고 있는가?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들을 우리는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우리 경제에 밀어닥친 경제 한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특히 전시부독본(전시 교과서)은 너무나 인상 적이었다.
우리어버이들의 삶이 어렴풋이 상상되기도 하였다. 얼마나 배움에
목말라 했을까? 대포와 총성이 오가는 그 살벌한 전시에서 배움을
향해 목숨을 걸었을 세대들의 고단함과 애착을 느껴도 보았다.
왜 이곳에서 박물관을 열게 되었는지 박물관을 둘러싼 풍경과
마을의 역사를 관장님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또한 이곳이
단순한 박물관으로서 끝나지 않고 지방 문화 발전에 기여할 많은
계획과 바램을 가지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장작불에 감자를 구우며 밤새 음악회를 열었다며,
이제는 진정 감자 바우가 되고 말았다는 그 분의 말씀 속에서
영월과 책에 대한 사랑을 엿본다.
흐뭇한 마음으로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아름다운 책
한 두 권씩을 사 들고서, 가을 맑은 바람을 안은 채,
긴 계단을 걸어 하늘 아래 동네로 돌아왔다.
귀로는 한없이 여유로와 있었다.
비록 바램만큼 모두를 보고 올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이 가을 여로는
자잘한 일상을 툭 털어 내고, 새로운 발돋움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애써 주신 강릉 도서관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