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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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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오년 전 기차


BY 이화 2001-08-09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어 대전에 다녀왔다.
만남의 장소는 대전역 청사-
언제나처럼 역은 붐비고 있었다.
여행이라 하면 웬지 꼭 기차를 타야 할 것
같은 느낌...

십 오년 전 여름, 서울발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여행갔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고
나는 회사일로 본사에 왔다 내려가던 참이었다.

좌석이 없어 한시간이 넘게 기다린 끝에
겨우 입석을 구해서 탄 기차였는데 휴가철이라
칸마다 서있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겨우 자리를 잡고 선 곳에서 마주보는 자리에
역시 나처럼 서있던 사람이 남편이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고 있던 나에게 한 시간쯤
뒤에 그가 말을 걸었다. 그는 파란 나일론
츄리닝 바지에 새빨간 면 티셔츠, 그리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얼굴이 얼마나 동그랗던지
언뜻 축구공이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무슨 귀신이 씌였었는지 그에게 선뜻 집 전화번호를
적어주었고 며칠 뒤에 그가 전화를 했다.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동안 그에게 이성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냥 시간이 있으니 만나고,
사귀는 사람이 없으니 만나는 그런 식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도
내 마음은 꽁꽁 닫힌채 열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드는 경계심이 남편에게는 들지 않는 것이었다.

금요일 오후가 되어 아...내일은 동생이랑 영화나
보러 갈까...생각하고 있으면 남편에게서 어김없이
전화가 오고 주말은 남편과의 데이트로 채워졌다.
만남이 이 년, 삼 년 이어지던 어느 날
(그 날도 금요일쯤 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남편을 만나는 것이 없으면
나의 휴일은 얼마나 우울할까...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나에게 전화를 주고 주말마다
데이트가 있고, 어느새 남편은 나에게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비록 첫눈에 반해 죽네 사네 하는 사랑은 아니었어도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애정을 키워온, 그런 만남이었다.
연애를 오 년 하고 결혼을 했다.

서로를 잘 안다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는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장점이 더 많은 사람이었지만 모든 면에서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한마디로 우린 물과 불이
만난 것 같은 부부라는 것을 알았다.

당연히 불화가 생기고 갈등이 생겨났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한가지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다음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그러다가 마침내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주식 투자...

혼자 생각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 자존심을 접고
언니에게 그간의 사정을 다 털어놓았다.
얘기를 다 듣고난 언니의 말은 이러했다.

너 솔직히 말해 봐라. 니 남편이 재산가라면,
니 시댁이 부자라면, 그래도 니가 이혼 생각했겠니?
돈 없다고, 어려울 때 사람 떠나는 거 아니다......

참 많이 부끄러웠다.
그래...사업에 망한 남편을 대신해 돈버는 아내도 있고
재기시키는 아내도 있는데 내가 이정도 일로 이러면 안되지
아내란 남편이 어려울 때 더욱 힘을 주는 존재가 아니더냐...

현실이 변한것은 없지만 마음이 달라지자
우선 내가 편하고 남편도 나의 진심을 알아 주었다.
남편의 주식 투자에 무반응으로 대응하는 나를
주위에선 이해심이 많다느니, 혹은 너라도 정신
차리라느니 하지만 나는 마음 속에 심지를 하나 세웠다.

그것은 남편이 어렵고 힘들 때 그를 더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이다. 주식투자 한답시고 거덜난
살림살이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 가서 다 퍼부으리라.
쥐도 도망갈 곳을 남겨두고 쫓는다니까.

십 오년 전 남편을 만났던 성하의 계절이다.
기차에 오르니 청춘남녀가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수작이(?) 오고가는 현장이 곳곳에서
보이고 마치 십 오년 전의 우리를 보는 듯 하다.

우리처럼 결혼에 골인하는 커플도 생기겠지?
그럼 그들도 우리처럼 아웅다웅, 티격태격,
당신 때문에 내 신세 망쳤느니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청춘이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땐 남편을
처음부터 사랑하고 싶다......
십 오년 전 기차에서 사랑을 일궈낸 내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떠올린 상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