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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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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깎기


BY 은빛여우 2002-08-19

딸아이의 피아노 가방을 열어 필통을 살펴보니 심이 부러진
연필들만 나란히 누워있었다
입으로는 진즉 알아서 내 놓지 않았다며 아이에게 잔소리를
퍼 부으면서도 모양 좋은 자동 연필깎이 대신 칼을 찾는다

애미의 연필깎는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딸아이의 앞에서
돌돌 말리며 떨어지는 나뭇결을 조심조심 벗겨내어 까만
속살이 보이도록 한다
작은 숨결에도 나뭇결이며 까만 연필 가루가 날려 버리기에
연필깎는 순간에는 어느덧 숨조차도 참아가며 해야한다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연필.... 그래서 칼날을 대면
미끄러지듯 벗겨지는 나뭇결과 그 사이에 향긋하게 풍기는
나무 특유의 향이 기분 좋아지게 만든다

물론 시중에 나와있는 연필깎이에 비하면 깎아진 모양이나
연필심의 마무리가 썩 이쁘지는 않지만 칼이 닿아진 면의
생김이 그대로 남아있고 조금은 투박스러워 보이는 모양새가
자연스러워 보이는게 그래서 나는 칼로 깎은 연필을 좋아한다

가끔은 딸아이가 애미 몰래 연필깎이로 돌려 깎아 날렵한
모양새를 한 연필을 넣어가기도 하지만 연필 깎는 동안
학원 이야기며 친구들 이야기 진도 이야기 등을 나눌수 있어
그 시간도 사랑스럽다

예전에 나 학교 다니던 시절 친정엄마는 아무리 일에 지치고
피곤에 절어도 밤사이 연필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깎아 필통에
넣어주셨었다

얼마 지나지않아 누르면 얼마든지 심을 내밀어주는 샤프펜슬
이라는 것이 나와 편리함을 자랑했지만 엄마는 연필을 깎아
주시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왜 그리도 연필보다는 샤프펜슬이 쓰고 싶었고
자동 기계에서 깎아진 연필의 날렵함이 이뻐 보였었는지......


이제 내가 엄마의 나이가 되고 그때 내 나이의 딸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니 한밤중 작은 스텐드 불빛을 의지해 딸의
머리 맡에서 연필을 깎아 정성스레 가방에 챙겨 넣어주시던
엄마의 그 마음을 조금은 알것 같다


당시의 애미보다 훨씬 영악해진 딸이 앞으로 얼마나 더 애미가
깎아주는 연필을 좋아라고 넣고 다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