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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보면.....


BY 산아 2002-05-24

살아가다 보면.....

최근 몇 달동안 남편의 수입이 줄어들고(사실 요즘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다)
거기다가 큰돈이 날라갔다면 날라가서
우리집 가정경제도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사소한 것을 남편에게 말하면 나에게 미안해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의기소침해까봐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고 내 나름대로
소비를 줄이는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확실하게 줄인 것은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가족이
그동안 여행을 한번도 가지 않았고 가족들이 즐겨찾는 외각지
싸디싼 보리밥집도 왠만하면 가지 않았다.
대신에 가끔 주말에는 아시는 분의 농장에 점심을 싸가지고 가서
간간히 씨앗들을 뿌리고 작물들이 자라는 재미를 느꼈다.

그동안 최소한의 먹고 사는 것 외에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지만
평소에도 워낙 돈을 잘쓰지 않는 살림살이를 줄이기에는
나름대로 내속이 많이 상하였다.

일주일에 한번꼴로는 꼭 서점에 가서 좋아하는 책을 고르는 큰애에게는
그동안 큰애가 모아논 용돈(30만원)으로 위인전 전집을 사서
당분간 서점에 들어가는 돈을 줄였다

큰애는 워낙 책을 좋아하여 한번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면
기본 5~6만원어치는 사서 그돈이 사실은 만만치 않았다.

직장을 다녀서 좋은 것은 딸로써 친정부모님께 가끔씩
용돈을 드리고 간간히 좋아하시는 것을 사다드리는
것이었는데 한동안은 친정으로 가는 발걸음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 아무리 씀씀이를 줄여도
통장의 돈이 달랑달랑하다.

며칠전부터 큰애가 무슨 영어급수시험에 합격했다며
축하 해주지 않냐고 하면서 "엄마 월급날이 엇그제였잖아요"
하는 소리에 "그래 어떻게 축하를 해줄까"
했더니 평소 우리가족이 자주가는 보리밥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남편, 아이들과 함께 어제는
시외의 보리밥집으로 외식을 나갔다.

집이 외각지라 시외로 약 15분만 가면 분위기 좋은 전통찻집이나
라이브 음악이 흐르는 값싸고 맛있는 음식점들이 산자락에 많이 있어
예전에는 가끔씩 가는 곳이었다.

어머님은 일부러 그러셨는지 도련님들 저녁이 걱정된다며
도련님 아파트에 가신다며 우리보고 맛있게 먹고 오란다.

초저녁 밤시간이지만 시외로 나가는 도로는 여유롭고 시원했으며
약간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라 도로주변의 논에서는
개구리들의 합창소리가 듣기에 좋아 모처럼만의 밤나들이에 기분이 상쾌했다.

애들은 개구리 울음 소리가 신기하다며
정말 개구리 울음소리가 맞냐며 우리부부에게 연속 확인을 한다.

우리가족이 자주 가는 보리밥집은 농촌지역에 있어 식당터가 넓어서 좋다
마당에는 시멘트가 아니라 자잘한 자갈이 깔려있고
한쪽에는 애들이 놀수 있게 미끄럼틀과 시소가 있고 각종 꽃들이 심어져 있으며
강아지도 키우고 있어 애들은 답답한 도심의 값비싼 식당보다는 이곳을 좋아한다.

보리밥에 각종 나물과 고추장 넣어 비벼
주인장의 밭에서 뽑은 얼기설기 구멍뚫린 열무잎파리에
매운고추 분질러 넣고 된장조금넣어
싸먹는 맛이 일인분에 오천원치고는 꿀맛이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식당은 황토로 천장과 벽을 바르고
중간중간 큰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밖에서 노는 애들하고 눈맞추기에도 그만이고
편하게 주저앉아 밥먹고 차마시다가
정말 운이 좋으면 멋있는 주인아저씨의 노래도 들을수 있는 곳이다.

어제는 운이 너무 좋았다.
저녁시간 모처럼 식당에 손님이 별로 없어 주인아저씨가
통기타를 치며 잔잔한 노래를 불러주고
안경을 쓰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슨 조개 껍질 같은 걸로
연주를 해주니 꼭 바닷가에 나와 있는 착각도 일으켜준다.

남편 왈
오천짜리 보리밥먹고 노래 듣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순도낮은 술한병을 추가시킨다.

배가 부른 애들은 밖에서 뛰어놀고 남편과 난
오랜만에 결혼전 데이트하던 것처럼 분위기에 젖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남편도 안단다.
요즘 내가 속으로는 힘들어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남편은 앞으로 2년만 자기를 봐주란다.

2년동안 지금시작한 일이 안정되지 않으면 그때는 예전에 하던일
계속하여 아무생각없이 돈만 벌겠단다.
(사실 남편은 예전에 그 계통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일하자는 사람이 많다)
난 속으로는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고 나도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입에서 나오는 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신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다.-
난 괜찮다고.

그랬다. 남편이 이미 시작한 일에 초를 치고 싶지도 않았고
모처럼만에 기분좋은 남편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싼값에 비해 맛있는 보리밥하며 "맛있게 드세요" 하면서
반기는 인상좋은 주인아저씨의 멋있는 노래와 연주도 들었으니
"그냥 오늘 하루만은 우리가족 모두 기분좋게 보내자"
하면서 난 술두어잔에 남편에게 하고싶은 말을 안주삼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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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근하여 일을 하다 잠깐 짬을 내어 컴에 일기처럼 끄적이다가
예전에 남편이 집을 며칠씩 비웠을 때 자주 보냈던 메일을 일기장에
보관해둔 것이 있어 다시한번 읽어보니 기분이 좋아지고
잔잔해진다.

....... 인생길을 가다보면 ......

"내리막길이 있으면 다시 오르막길이 있다"는
아컴 인생선배님들의 말씀처럼 인생을 얼마살지 않는
우리가족은 지금 오르막길을 오르는 첫 시점이라고
낙관적인 생각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니 나름대로 마음이 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