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71

강아지 입양 실패기(2)


BY wwfma 2002-05-24

그러나 이젠 끝난 일인 듯 싶었던 털 달린 것 키우기는 사실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모처럼의 숙원사업을 끝내고 의기양양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며칠 후 딸아이가 제안을 해왔던 것이다.
"엄마, 이젠 병아리도 키워봤으니 토끼를 키울래요."
"토오~끼?"
징집명령서를 받아든 것 같은 얼굴로 딸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선 다시 갈등의 시작이었다.
'병아리 키우던 새장에 내친걸음으로 토끼도 한 마리 키워보지 뭐'하는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가 기껏 얻은 빈집에서의 자유로움을 다시 내어줄 게 아득해서 어쨌거나 버텨보려는 고집이 생기기도 했다.

여기에 남편도 합세를 해주었다. 어렸을 적 토끼장까지 만들어 대대적으로 토끼를 키워봤다는 남편은 토끼의 지긋지긋한 오줌냄새가 기억나는지 절대로 아파트에서 키울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주었다. 요즘의 토끼는 집안에서 키울 수 있도록 많이 개량이 된 것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나름대로의 경험은 타협할 수 없는 확신을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한마디 더 거든다는 것이 실수였다.
"토끼가 뭔 재미가 있느냐? 토끼는 하루종일 눈도 못맞추고 아무 데에다 볼 일 보고... 차라리 강아지가 낫겠다."
딸아이의 얼굴에 희망이 스쳐갔다. 좀 전에 엄마가 토끼 불가론을 펴면서 했던 말도 강아지보다 못한 게 토끼라는 것이지 않았는가. 딸아이의 꿈이 대번에 일취월장하였다. 언감생심 값도 비싸고 가둬 키우는 것도 아니어서 말을 못 꺼냈다 뿐이지 강아지야말로 지상최대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 날로부터 강아지를 사이에 둔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토끼처럼 마지막 거부권을 행사할 것 같던 남편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더니 생각해보니까 강아지는 키우는 일을 감당해야할 엄마가
최종 결정권을 가진 것이라며 은근히 깃발을 내려버린 것을 시작으로
동생까지 꼬셔 두 아이가 시간만 나면 나에게 협공을 해왔다. 강아지만 생기면 갑자기 전과자가 새 사람되듯 모든 생활 습관을 일거에 고치고 살 것처럼 맹세를 남발했다.

개에 관한 뒷처리는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매일 일찍 일어나서 산책도 시키고 엄마도 안 귀찮게 하고... 강아지만 들어오면 아무튼 안될 일이 없어 보였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가 아니라 저토록 키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소망을 져버리기가 어려웠다. 병아리를 키우며 애틋하게 하는 양을 본 터라 더 그랬다. 물론 키울 때 뿐이었지만...

나는 솔직하게 아이에게 내 마음속의 갈등을 내보였다. "너희들 생각하면 강아지를 키우고싶지만 용기가 안 난다. 강아지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약 키우더라도 여름엔 냄새가 나서 싫다. 여행도 가야하고... 그러니 여름 동안 엄마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아이는 여름 지나고 사준다는 소리로 알아들었는지 기꺼이 유예시간을 허락하였다.

마음에 둔 갈등이 있으면 담아두질 못하는 성격대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다시 강아지 키우기에 대한 상담을 시작했다.
그들에게 받을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무도 강아지를 키우라는 사람이 없었다.
정들면 애물단지라고 심지어는 지금 강아지를 옆에 안고 가는 사람까지 고개를 젓는대는 기껏 생겼던 용기마저 수그러질 판이었다. 그러면서도 최종허락이 내리기를 바라며 기대에 찬 아이들을 향해 나는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한 달이나 우려먹는 그 주문을 잘도 써먹었다.

"그러면 강아지 받을 꿈도 꾸지 말아라"든지 "이번 여름방학 숙제로 강아지 키우기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봐라"하는 것 말이다.

그 여름이 그렇게 가고 아이들의 생일이 다가오는데 나는 아직도 결심을 못하고 있었다. 도무지 물어보는 사람마다 키우지 말라는 데는 달리 어쩔 도리가 생기지 않았다. 급기야는 시어머니께 전화까지 걸어 원조를 요청했다. 모처럼 며느리에게 살뜰한 원조 요청까지 받은 어머니는 맡은 일을 한 몫 해보이시려고 아이들과 번갈아 전화를 바꿔가며 긴 통화를 하셨다.

딸아이가 울먹이며 전화를 내게 내주었고 나는 어머니로부터 우정이는 아직 미련이 많으니 잘 다독이라는 사후 지시까지 받았다. 한 여름 내내 써먹던 주문을 사기 치는데 시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악역을 맡기는 게 죄송스러웠으나 내 한마디로 수습하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도 잠시 나는 긴 여름 동안의 갈등을 접고 아이들 생일 선물을 백화점에서 하나씩 사주는 걸로 '빕스'에 가서 네 식구가 고깔모자를 쓰고 행복하게 웃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아니 그런 줄 알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