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의 이중적 이미지
'아줌마'라는 호칭은 이중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아무 연고 없는 남에게도 푸짐하게 밥을 퍼주며 이런 저런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인정미 넘치는 사람이라는 긍정적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주책없고, 자기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그래서 아줌마에 속하는 여성들이 '나는 이제 아줌마인데 신경 쓸 게 뭐 있어' 하면서 자기 편한대로의 생활방식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많고 어떤 경우에는 아줌마라 불려지지 않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우리 시대의 아줌마 군단에는 아이를 낳고도 처녀처럼 보일만큼 잘 꾸미고 다니는 미시족 아줌마부터 세수도 안 한 얼굴로 까치집 머리를 하고서 온 동네 참견 다하고 다니는 아줌마가 있고, 찬 바람에 아기 감기든다고 초보 엄마의 등에 매달려 있는 아기를 단속해주는 아줌마부터 지하철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남들 밀쳐가며 칼 루이스보다 빨리 몸을 날리는 아줌마가 있으며, 초보 주부 인생상담, 살림살이 가르치기, 양로원 김장담그기, 보육원 빨래하기 등등 도맡아 남을 도와주는 아줌마 부터 돈을 좇아 부동산 투기, 환투기는 물론 증권사에 출근하다시피 하는 아줌마까지 있다.
아줌마는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지 않은 중년의 여성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나이 들어 보이는 여성은 아줌마로 불리운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은 신체적인 여성성이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성의 외모나 몸매가 여성에 대한 평가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아줌마라는 존재는 사회적 지위가 낮으며 여성성을 찾아 볼 수 없는 여성에게 붙이는 호칭처럼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이 아줌마가~~'라는 높은 톤의 무시하는 듯한 발언은 하지만 '이 아저씨가~~'라는 말은 자주 하지 않는다. 아줌마는 무시해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는 약자이지만 아저씨는 언제 주먹을 날릴지 모르는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아저씨를 대하는 태도와 아줌마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아줌마는 함부로 부를 수 있고 함부로 대우해도 되는 존재로 되어버렸다. 그 이유는 경제력이 없으며 특별한 사회적 지위도 없으며 아무나 할 수 있는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 손쉽게 대체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교수인 여성이 시장에 나가서 아줌마로 불릴 때 필연코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런 당혹스러움은 왜 느껴지는 것인가? 아줌마가 없이 가정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나 할까? 그런데도 왜 아줌마라는 호칭은 우리에게 부담스러움을 주는가? 아줌마는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누군가의 아내이고 누군가의 딸, 며느리로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줌마에 대한 인식은 그렇지 못하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아줌마에 대한 긍정적 의미보다는 부정적 의미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결혼을 하면 아줌마라는 호칭에서 자유로와질 수가 없는데 20대 후반의 갓 결혼한 여성의 경우 아줌마라는 호칭을 들으면 화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으휴, 아줌마들!"이라는 표현은 남성뿐만 아니라 아줌마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여성들까지도 멸시를 포함하여 던지는 말이다. 아줌마가 아닌 여성들은 마치 아줌마가 여성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문제의 존재인 듯이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아줌마는 주책없으며 자기관리를 하지 않으며 자주 남들을 당황시키고 짖궂은 성적 농담을 하며 여성성을 포기한 듯한 행동으로 여성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저렇게 살고 싶을까' '왜 저런대니' 등등의 표현으로 자신은 아줌마가 되지 않을 것처럼 얘기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을 "아줌마!"라 불러서 자신이 멸시하는 아줌마 집단에 자신이 포함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반가울 리가 없는 것이다.
아줌마라는 호칭은 그 여자의 여성성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기능을 한다. 이와 관련한 필자의 황당한 경험이 있었다. 대학 4학년 때에 결혼한 친구가 있었는데 결혼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신랑 친구가 와서 그 친구에게 다가가 "아줌마"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했으면 아줌마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의 아줌마는 다른 남자에게 성적 매력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타인에게 성적 매력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적 매력을 유지할 어떠한 행위도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줌마에 진입하는 시기인 것이다. 성적 매력은 남편에게만 보여주면 되고 또 과도한 성적 매력은 오히려 분란을 초래하기 때문에(아줌마는 다른 남자의 시선을 받아서는 안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줌마가 꾸며야할 이유는 별로 없는 것이다. 아줌마도 적절히 꾸며야 한다는 것은 남편에게 조차도 성적 매력을 상실하면 안된다는 위기 의식에서 나오는 얘기일 뿐 아줌마를 떠올리며 잘 꾸며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성, 여자'라고 하면 '잘 꾸며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부터 떠오르는데 '아줌마'라고 하면 꾸미는 것과는 멀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아줌마라는 이미지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有婚여성인 아줌마가 無婚여성 처럼 옷을 산다면 남편은 그녀에게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옷을 사느냐, 가족들은 생각도 안 하고 자기만 챙기느냐 하는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아줌마는 이미 성적 파트너에게 선택된 존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여성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아줌마'라는 호칭을 발음도 또렷하게 큰 목소리로 말한 그 사람은 '당신은 꽃다운 나이 23세이지만 이미 결혼을 해서 임자가 있으니 이쁘고 신체 노화되지 않았다 해도 당신의 여성성이 유의미할 수는 없으니까 딴 생각말고 내 친구에게나 잘하라'라는 의미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의 여성성은 여기서 끝'이라는 식으로 그 사람은 그 친구의 여성성에 사형선고를 선언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성의 여성성이 지나치게 유의미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성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아줌마라는 호칭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아줌마라는 용어에는 '나이가 들었다'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신체의 노화는 사회적으로는 여성의 여성성이 무력화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이를 출산할 수도 없고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주지도 못하므로 아줌마에게서 여성성을 찾아보기란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남성의 나이듬에 대해서는 '성취를 이룬 자의 여유로움, 허허로움'이라는 이미지가 있음에 반해 여성의 나이듬에 대해서는 '허전함, 외로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우리 사회는 "꽃도 한철이다" 라거나 "사십이면 장승도 안 돌아본다"든가 하는 속담이 있는 사회이다. 이러한 속담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주로 신체성 특히 성적 매력의 측면에서 구성하도록 하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했다고 해서 아줌마가 아니고 아이를 낳아야 아줌마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아줌마라는 호칭은 세상에 태어난 소임을 다 한 여자에게 특별히 부여될 수 있는 호칭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를 낳아서 물론 몸은 흐트러졌지만 사실 여자의 소임은 출산이기 때문에 모성의 존재인 여자에게나 아줌마라는 호칭을 달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여자들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넉넉하게 받아주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을 가진 사람 중에는 박탈된 여성성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정합적인 태도를 취해서 '그러기에 아줌마는 한 물 간 존재'라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서 우리는 출산에 대한 이중적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즉, 출산은 여성의 소임이지만 출산은 여성에게서 여성성을 박탈시는 것이라는 평가를 확인할 수 있다. 여성성을 발현함으로써 여성성을 박탈당한 존재가 바로 아줌마인 것이다. 여자라면 모름지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지만 아이 낳은 여자는 더 이상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고 매력이 없는 여자인 것이고 그래서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여성이 아닌 여성'인 것이다. 그래서 아줌마를 제3의 성이라고들 한다. 여성은 남성이 있기에 비로소 여성이고 남성은 여성이 있기에 비로소 남성이다. 이 상대성을 고려해본다면 아줌마를 제3의 성이라고 하게 하는 사회적 실재는 엄청난 메타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남성에게 더 이상 여성으로 설 수 없는 존재. 여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성은 더욱더 아닌 제3의 성을 가진 존재. 그러한 존재가 바로 아줌마인 것이다.
아줌마라는 존재는 아줌마가 아닌 여성에게는 '되고 싶지 않지만 되어야만 하는 숙명의 존재'로서 더욱더 거부감을 주는 존재이고 남성에게는 더 이상 성적 선택의 대상이 아닐 뿐만아니라 여성이라는 느낌을 준다해도 타인에 소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상대에게서 여성성을 느껴봐야 자신만 괴로와지게 하는 부정적인 존재이다. 남성에게 아줌마가 부정적인 이유 중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려볼 수 없다'는 점이 작용한다. 함부로 말 걸다가는 아줌마의 남편으로부터 가혹한 대접을 받을 위험이 있으며 아무리 그 여성성에 끌린다해도 가까이 해봐야 이로울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건드릴 수 없다'는 부정적 느낌을 주고 그리고 그 때문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남성이 아줌마를 무시하고 싶어 하는 심리에는 신포도기제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끌린다해도 나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니 그 여성성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속 편한 일일 것이다.
아줌마 스스로에게도 아줌마는 부정적인 존재이다. 좋은 시절 다 갔다는 자괴감, 그 좋은 시절에 자신은 자식, 남편, 시가 식구를 위해서만 살아야 했다는 박탈감, 자신의 희생으로 삶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힘듬을 전혀 알아 주지 않는다는 소외감, 급속한 세상의 변화 속에서 반복되는 가사노동을 하면서 제자리 걸음만 했다는 허탈함 등등이 아줌마의 행태를 더욱 더 비뚤어지게 만든다. 지금까지 희생하며 남편, 자식, 시가 식구 눈치보며 살아왔는데 더 이상 누구 눈치를 보겠는가 하는 심정이 공중질서를 무시하는 무례함, 이만큼 희생했으면 되었으니 사회적 의무 쯤 무시해도 되지 않느냐는 뻔뻔함, 아줌마가 집에만 있어서 뭘 모르니 모른다고 타박하지 말라는 배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줌마는 자아정체성을 확인할 일을 가지지 못한 채 성취감을 별로 주지 않는 반복되는 가사 노동에 시달리기 때문에 유일하게 관심을 둘 수 있는 존재인 자식이나 남편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해서 오는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자식 남편이 더 이상의 관심을 거부함으로써 겪게 되는 빈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 쇼핑으로 스스로를 확인하는 쇼핑중독증에 걸리기도 한다.
아줌마의 부정적 이미지에는 '성적인 관심이 지나치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남성들은 결혼 전이나 후나 대부분의 대화를 성에 관한 이야기로 채우지만 여성의 경우는 무혼 시절과 달리 결혼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성에 관해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된다. 아줌마들 대부분 관심의 대상이 가족 뿐인 경우가 많아서 남편 자식 얘기로 대화를 채우게 되는데 남편과 특별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창구를 가진 경우-동종 업종에 종사한다거나 취미활동을 같이 한다거나하는 경우-가 아니면 남편과의 대화는 성이라는 바디랭귀지로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연히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여성이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지 않는다. 일단 여성이 성문제에 관심이 있어 하면 '밝힌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돈 벌어 오기도 바쁜 남자 고생 꽤나 시키겠군' 하는 은밀한 지적도 받아야 했다. 의무방어전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한 개인에게 그만큼 가정생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줌마들이 성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그렇다는 식의 시각이 일반적인 것이 사실이다.